백동수가 침전을 떠난 뒤, 방 안은 다시 적막의 늪에 잠겼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패배자의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기 전,
바다가 숨을 죽이며 뒤로 물러나는 파괴적인 전조였다.
나는 흔들리는 등불 밑에서 내 작은 육신을 응시했다.
심장은 터질 듯 고동쳤으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사냥꾼의 서늘한 고취감이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돌이킬 길은 없다.
문밖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졌다.
훈련된 무사들이 대열을 갖추어 바닥을 짓누르는 규칙적인 발소리.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창덕궁의 지도를 펼쳤다.
돈화문(敦化門).
금호문(金虎門).
숙장문(肅章門).
육중한 빗장이 걸리는 둔탁한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장용영의 무사들이 각 문을 장악하고,
창을 교차하며 서슬 퍼런 경계를 서는 모습이 그려졌다.
백동수는 내 명령의 행간을 정확히 읽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부인의 침입을 막는 '수비'가 아니다.
안에 있는 짐승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우리를 잠그는 '쿠데타'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내관이 기어 들어왔다.
그의 안색은 핏기가 가신 채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전… 전하…!"
"말하라."
"궁의 모든 문이 봉쇄되었사옵니다.
장용영 무사들이 개미 한 마리 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있사온데...
조정 대신들이 명분이 무엇이냐며 소란을 피우고 있사옵니다!"
나는 차갑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누가 명했느냐 묻는 자들에게 무엇이라 답했느냐."
"전하의… 지엄하신 국명이라 하였사옵니다."
"잘했다. 앞으로 그 어떤 정승이 앞을 가로막든,
그 대답 하나로 일관하라.
물러나지 않는 자는 베어도 좋다고 전하라."
내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단호함에,
그는 대답조차 잊은 채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내관이 물러나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거칠고 소란스러운 예법 따위는 없었다.
비단 옷자락이 바닥을 뱀처럼 스치는 서늘한 소리.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순왕후.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얼굴엔 여전히 인자한 할머니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으나,
그 너머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날카로운 살의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내 침상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전하."
나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응수했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와,
내 숨소리가 들릴 거리에서 멈춰 섰다.
"궁문이 봉쇄되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장용영이 성난 짐승처럼 날뛰고 있는데,
대체 누구의 명입니까?"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나의 명입니다."
방 안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다.
정순왕후의 고운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 무서운 장난을 치시는군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노론의 중신들이 공포에 떨고 있사옵니다."
나는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췄다.
"아바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독살(毒殺)되셨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명백한 '당혹'이었다.
"전하… 충격이 크시어 헛것을 보시는 게로군요.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함부로 입에 담으시면..."
"강명길과 피재길이 이미 시신에서 증거를 찾았습니다."
내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목줄기에 닿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나는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범인이 아직 궁 안에 있습니다.
범인을 잡기 전까진,
정승이든 내관이든 단 한 명도 이 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정순왕후는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처음으로 '어린아이'를 보는 가벼움이 사라지고,
자신을 위협하는 '포식자'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 찼다.
"전하께서... 참으로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상심이 깊어 판단력이 흐려지신 게지요."
그녀는 냉정함을 되찾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소란은 할미가 수습하겠사옵니다.
대신들을 돌려보낼 것이니,
전하는 그만 쉬십시오."
그녀가 오만하게 등을 돌려 나가려던 찰나,
내가 낮게 읊조렸다.
"멈추십시ㅇ오."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비마마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침묵.
정순왕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얼음처럼 차가운 권력자의 민낯이었다.
"...소신조차, 전하의 감옥에 갇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투명한 증오를 마주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길고도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침상 머리를 꽉 쥐었다.
이제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겁에 질린 소년이 아니라,
복수를 위해 지옥에서 돌아온 유령이라는 것을.
나는 마음속으로 백동수에게 전언을 보냈다.
백동수.
이제 쥐 새끼를 몰 시간이다. 심환지를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