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가 물러간 침전은 지독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는 독사다.
굴속으로 숨어든 뱀은 몸을 웅크린 채,
가장 치명적인 순간에 송곳니를 박을 기회를 엿볼 것이다.
심환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살기 위해, 그리고 얻어낸 권력을 지키기 위해,
궁궐 지하의 모든 인맥과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적들이 먼저 목줄기를 물어뜯기 전에,
내가 먼저 심장을 꿰뚫어야 한다.
나는 침상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발바닥이 차가운 방전 바닥에 닿는 순간, 소
년의 연약한 골격이 다시금 느껴졌다.
열한 살의 육체는 여전히 깃털처럼 가볍고,
뼈마디는 아직 여물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다.
칼은 근력이 아니라, 증오와 의지로 휘두르는 것이니까.
"내관."
문밖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내관이 용수철처럼 튀어 들어왔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무엇을 대령할까요?"
"붓과 종이, 그리고 먹을 가져오라."
내관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지… 지금 말이옵니까?
시각이 이미 자시(子時)를 넘겼사옵니다.
옥체에 무리가 갈까 두렵—"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차가운 안광(眼光)에 내관은 비명을 지르듯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하옵니다! 즉시 대령하겠나이다!"
잠시 후, 떨리는 손으로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내 앞에 놓였다.
검은 벼루 위에 먹이 갈리는 소리가 서걱서걱 방 안을 메웠다.
나는 붓을 들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이의 것이라 작고 가늘었으나,
붓끝만큼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나는 하얀 종이를 펼쳤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곧 피로 얼룩질 조선의 미래였다.
붓끝을 진한 먹물에 푹 담갔다.
첫 번째 글자, 심환지(沈煥之).
종이를 긁는 붓의 파찰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노론 벽파의 수장이자,
주군을 배신하고 이 나라를 썩은 도랑으로 밀어 넣은 자.
곧 목숨이 끊어질 자의 이름이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정순왕후 김씨(金氏).
김관주(金觀柱).
심풍지(沈豊之).
노론 벽파의 핵심 수뇌부,
정조의 개혁을 비웃으며 독약을 잔에 채웠던 자들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졌다.
이것은 명단이 아니었다.
단재 신채호의 영혼과 순조의 육신이 합작하여 내리는 최종 판결문이었다.
마지막 획을 긋고 붓을 내려놓자,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관은 옆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종이를 들어 올려 먹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입을 열었다.
"내관, 이 이름들을 똑똑히 보아라."
내관이 고개를 슬쩍 들어 종이를 스치듯 읽었다.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동했다.
조선의 하늘을 쥐고 흔드는 실권자들이,
왕의 손에 의해 죽음의 명단에 적혀 있었다.
"전하... 이들은... 이들은 대신들이옵니다.
조정의 근간을...!"
나는 그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두려운가?
이 이름들이 적힌 종이가 너의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목이 날아갈까 무서운 것이냐?"
내관은 바닥이 깨질 듯 머리를 박았다.
"소신은… 오직 전하의 그림자일 뿐이옵니다!
전하의 길이 소신의 길이옵니다!"
"좋은 대답이다."
나는 종이를 거칠게 접어 그에게 내밀었다.
마치 펄펄 끓는 용암을 건네듯,
내관은 소매로 손을 감싸 쥐며 그것을 받았다.
"백동수가 오면 이 종이를 전하라.
단 한 명도 놓치지 말고, 거부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장용영의 칼로 답하라 전하라."
내관이 물러가고 다시 혼자가 된 방 안에서,
나는 붓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종이의 가장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한 이름을 더 썼다.
김조순(金祖淳).
정조가 아들 순조를 위해 준비했던 마지막 방패.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사돈이라는 이름으로 왕권을 찬탈하고,
세도정치의 문을 열었던 인물.
아직은 내 편이다.
저 노론 벽파라는 거대한 괴물을 잡기 위해,
사냥개로 부릴 수 있는 가장 영리한 칼이다.
하지만 사냥개는 주인이 약해지는 순간 주인의 목덜미를 노리는 법.
나는 그 이름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워버렸다.
'너는 가장 마지막에 벤다.'
문밖에서 묵직한 갑옷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백동수였다. 그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궁궐의 공기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하, 백동수 장군이 명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자마자 백동수가 성큼성큼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엔 밤이슬이 내려앉아 있었고,
눈빛은 이미 피 맛을 본 맹수처럼 형형했다.
"준비되었느냐?"
"장용영 오백 무사가 서신 한 장에 목숨을 걸고 대기 중이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나는 내관에게 맡겼던 종이를 직접 낚아채 백동수에게 던지듯 건넸다.
백동수는 거친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첫 번째 이름 '심환지'를 읽는 순간,
그의 칼자루를 쥔 손등에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다.
"이 자들을…"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나의 광기를 마주했다.
"…전부 잡아들여라.
가로막는 자는 반역으로 간주하여 즉결 처분하라."
백동수의 대답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포효와 같았다.
"존명(尊命)! 날이 밝기 전,
이 종이 위의 모든 이름이 전하의 발치에 무릎 꿇게 하겠나이다!"
이제 창덕궁은 비명과 금속음으로 채워질 것이다.
조선의 썩은 고름을 짜내기 위한 피의 축제가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