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밤은 깊었으나, 그 어둠 속에 잠든 영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전각의 처마마다 매달린 청사초롱이 미친 듯이 흔들리며,
궁궐 바닥에 기괴한 그림자를 그려냈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으나,
공기는 비릿한 쇠 맛을 머금은 채 무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궁 전체의 목을 서서히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
그 서슬 퍼런 압박의 정점에는, 백동수가 서 있었다.
백동수는 금호문(金虎門)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뒤로 열 명 남짓한 장용영 정예 무사들이 귀신처럼 늘어섰다.
화려한 의장용 갑옷 대신 소리 없이 움직이기 편한 검은 겹무복을 입고,
오직 예리하게 갈린 별운검(別雲劍)만을 손에 쥔 채였다.
그들의 눈에는 이미 인간의 온기가 사라져 있었다.
오늘 밤, 자신들이 모시던 선왕의 원수를 잡아야 한다는,
결연함이 그들을 흉폭한 사냥개로 만들었다.
백동수는 품 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다시 한번 훑었다.
심환지(沈煥之).
어린 왕의 분노가 서린 그 이름 위로 백동수의 안광이 번뜩였다.
"궁 안에 숨어든 쥐 새끼, 심환지를 찾는다."
백동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사들의 가슴을 울릴 만큼 단단했다.
"살아 있는 채로 왕 앞에 꿇려야 한다.
저항하면 사지를 분질러서라도 데려가겠다. 알겠느냐?"
"명을 받듭니다!"
짧고 굵은 대답이 공기를 찢었다.
장용영 무사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백동수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들끓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 시각, 심환지는 정순왕후의 처소에서 나와 회랑을 걷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얼음장같이 차갑고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갓끈 아래로 흐르는 식은땀과 평소보다 반 박자 빠른 걸음걸이가,
그의 내면을 폭로하고 있었다.
노회한 정객의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궁궐의 공기가, 자신을 지탱하던 권력의 향기가 아니라,
'처형장의 냄새'로 바뀌었음을.
‘궁문이 닫혔다니. 그 어린것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심환지는 멈춰 섰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회랑 끝,
정적이 내려앉아야 할 그곳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터벅, 터벅.
규칙적이고 무거운 발소리.
심환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심환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백동수… 장용영이 이 시각에 어찌 여기 있는가?"
백동수는 대답 대신 심환지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세 걸음.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영의정 심환지 대감."
백동수가 천천히 칼자루를 움켜쥐며 읊조렸다.
"왕명(王命)이다."
그 짧은 세 글자가 떨어지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빙점 아래로 추락했다.
심환지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뒷걸음질 쳤다.
"왕명?
고작 열한 살 아이의 잠꼬대를 왕명이라 칭하며,
나를 가로막는 것이냐!"
"그 입 닥쳐라."
백동수의 눈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전하께서 너의 죄를 묻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아바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눈을 뜨셨단 말이다!"
심환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독살'을 알고 있다.
그 어린것이, 단순히 겁에 질려 우는 줄 알았던,
그 아이가 진실을 쥐고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구의… 누구의 명이냐고 물었다."
심환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백동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포효했다.
"조선의 주상, 순조대왕 전하의 명이시다!"
사방에서 장용영 무사들이 그림자처럼 튀어나와 심환지를 포위했다.
탈출구는 없었다.
심환지는 허망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실성한 듯 낮게 웃었다.
"하... 하하하! 그 아이가... 결국 피 묻은 칼을 뽑았구나.
조선의 앞날에 피바람을 불러오겠어."
"그 피는 네놈의 목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백동수의 수신호에 무사들이 달려들어 심환지의 양팔을 꺾어 눌렀다.
차가운 쇠사슬이 영의정의 손목을 파고들었다.
조선을 호령하던 권력자가 일순간에 끌려가는 죄인의 처지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심환지는 고개를 들어 먼발치에 있는 왕의 침전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어린 포식자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처럼.
같은 시각, 침전에 홀로 앉아 있던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금속음과 거친 발소리.
육신은 이곳에 있었으나, 나의 감각은 백동수의 칼날과 연결된 듯 선명했다.
사냥개가 목표물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감각이 전신을 타고 짜릿하게 전해졌다.
나는 타오르는 등불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불꽃이 위태롭게 춤을 추었다.
"잡았군."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연극은 끝났다. 내일부터는 조선의 조정이 통곡과 피로 가득 찰 것이다.
"들여보내라."
나는 차갑게 명했다.
이제, 조선의 심장을 도려내는 잔혹한 심문이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