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 독살: 유령의 귀환
조회 : 78 추천 : 1 글자수 : 5,048 자 2026-02-21
쓰다.
혀끝이 썩은 피를 머금은 듯 지독하게 썼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비릿한 쇠맛이 역류하고, 숨은 가시 덩굴에 걸린 듯 꺼칠거렸다.
침을 삼키는 지극히 당연한 행위조차 이제는 난도질당하는 고통이었다.
내가 마신 것은 차였다.
늘 마시던 약차, 늘 잡던 익숙한 잔, 코끝을 간지럽히던 그윽한 향.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것이 죽음의 색이었다.
몸의 끝단부터 서서히 차갑게 식어 가는데, 이상하게도 의식만큼은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마치 누군가 내 영혼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이 참혹한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는 것처럼.
나는 침상 곁에 엎드린 인간들의 얼굴을 하나씩, 아주 천천히 해부하듯 읽어 내려갔다.
슬퍼하는 얼굴이 있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점의 슬픔도 없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들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손놀림은 기괴할 정도로 침착하고 분주했다.
사태를 수습하는 그 매끄러운 동작들,
이미 정해진 결말을 확인하러 온 집행관의 눈빛.
나는 그 눈빛을 사무치게 잘 알고 있었다.
'혁명'이라는 단어만 혀 위에 올려도 차디찬 옥에 갇히던 시대.
가슴 속에 폭탄을 품고 어둠이 내린 경성의 골목을 소리 없이 누볐던 자들.
경무총감부의 구두 소리를 듣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 서늘한 결의.
나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의열단.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동지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 이 지옥 같은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결국, 나 또한 이렇게 죽음을 마주한다.
그런데—
여기는 대체 어디란 말인가?
침상 위에 놓인 내 손이 낯설게 크고 희었다.
핏줄은 검게 부풀어 터질 듯했고,
손목에는 왕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얇은 비단끈이 감겨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키려 했으나 폐는 이미 기능을 멈춘 듯 공기를 거부했다.
"커헉...! 윽!"
격렬한 발작과 함께 검붉은 선혈이 입가를 타고 흘러 비단 이불을 적셨다.
"전하...! 전하! 정신을 차리옵소서!"
내관의 찢어지는 비명이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어의가 허둥지둥 달려들었으나,
그들의 움직임은 늪 속을 걷는 것처럼 느릿했다.
아니, 늦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연출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소란의 틈새,
침전 깊숙한 어둠 속에서 낮게 깔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끝이옵니다."
그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진리인 양 흘러나왔다.
끝? 내가 여기서 끝이라고?
나는 마비되어가는 고개를 겨우 돌렸다.
휘장 너머로 일렁이는 그림자들.
한 사내는 검은 도포에 몸을 숨긴 채 망석중이처럼 서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매와 칼날같이 얇은 입술.
스스로 '법'과 '도리'의 화신이라 자부하는 위선자의 얼굴.
그보다 높은 자리에는 붉은 비단 치마를 늘어뜨린 노회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번득이는 옥가락지.
세월에 패인 주름 뒤로 숨겨진 눈빛은 탐욕스러운 맹수처럼 번득였다.
권력을 수십 년간 쥐고 흔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오만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들을 단번에 알아봤다.
정순왕후.
심환지.
이것은 죽음이 선사하는 환영이 아니었다.
나는 이 이름들을 역사서에서,
조선의 심장을 파헤치며 피로 쓴 기록들 속에서 수천 번은 읽었다.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꼽을 때,
반드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던 불멸의 악인들.
숨이 완전히 끊겨가는 찰나,
벼락 같은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이건 병이 아니다. 명백한 독(毒)이다.
그리고 이 독은 단지 왕의 숨통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나라, 조선의 명운을 도살하기 위한 칼날이다.
"전하... 제발...!"
어의가 내 맥을 짚었으나 손끝으로 전해지는 진동은 이미 잦아들고 있었다.
시야가 백색 소음처럼 흐려졌다. 천장은 아득히 멀어지고,
아우성치던 인간들의 얼굴이 물속의 수초처럼 일렁였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보았다.
정순왕후의 입가에 어린 아주 희미하고도 조용한 미소를.
슬픔이 거세된, 완벽한 승리자의 웃음.
그리고 심환지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끝났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나는 마지막 남은 생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이를 악물었다.
피비린내가 입안 가득 진동했다.
내가 이대로 눈을 감으면,
조선은 저들의 아가리 속으로 떨어진다.
내가 실패하면 역사는 반복되고,
내 동지들은 다시 차가운 땅에 묻힐 것이다.
나는 끝낼 수 없다. 아니, 끝내선 안 된다.
나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다.
나는 조선을 되찾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던 기록자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는 육신의 숨을 놓는 대신, 영혼의 깊은 곳에 맹세를 새겼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죽인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
"전하! 전하! 통곡하옵니다…!
어찌 이리 허망하게 가시나이까!"
고막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숨이— 들어왔다.
지독한 기침도, 비릿한 피 냄새도 없었다.
대신 가슴 속에서 작고 빠르게 뛰는 심장의 진동이 느껴졌다.
너무나 가볍고 가느다란 박동.
몸이… 기괴할 정도로 작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작고 부드러운 손.
칼을 쥐어본 적도,
붓을 짓눌러 잡아본 적도 없는 어린아이의 희디흰 손이었다.
내가 침상 위를 짚고 몸을 일으키자,
방안에 엎드려 있던 내관들이 혼비백산하여 바닥에 머리를 짓찧었다.
방 안은 장례의 냄새로 진동했다.
향연과 피, 그리고 독한 약재가 뒤섞인 왕실 특유의 불길한 냄새.
"전하... 순조대왕 전하...! 기적이옵니다!"
순조? 내가 순조라고?
나는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억누르며,
머릿속으로 역사적 연대기를 거칠게 뒤적였다.
순조. 정조의 아들.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왕좌에 오른 소년 왕.
그리고 역사 속에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휘둘려 권력을 빼앗기고,
조선이 망국의 늪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한 비극의 기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나는 지금, 조선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변곡점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정조가 독살당한 바로 그날'에.
충혈된 눈의 내관이 통곡하며 말했다.
"대비마마께서 곧 당도하실 것이옵니다.
수렴청정의 교지를..."
수렴청정(垂簾聽政).
그 단어 하나에 머릿속의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정순왕후가 커튼 뒤에서 권력을 잡는 순간,
정조가 일구어놓은 모든 개혁의 싹은 잘려 나간다.
국왕의 친위부대 장용영은 해체될 것이며,
실학자들은 벽파의 칼날에 스러질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다시 폐쇄와 부패의 어둠 속으로 침잠하리라.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었다.
문밖으로 바삐 오가는 그림자들.
누군가는 이미 노론 벽파에 줄을 대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권력을 나눌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묵직한 문이 열렸다.
겨울 서리보다 차가운 기운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비단 옷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들어섰다. 늙었으나 권세의 서슬이 시퍼런 얼굴.
내 기억 속에서 나를 죽음으로 밀어 넣으며 미소 짓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그녀의 뒤로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심환지가 그림자처럼 따라 들어왔다.
나는 확신했다. 내가 본 것은 죽어가는 자의 망상이 아니었다.
정조는 저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
정순왕후가 가증스러운 자애로움을 연출하며 내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지만, 그것은 독사가 먹잇감을 감싸는 듯한 서늘한 촉각이었다.
"전하... 이 어린 몸에 어찌 이리 큰 상을 당하셨단 말입니까.
애통하여 가슴이 찢어지는구려."
나는 울먹이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대비마마... 아바님께서...아바님께서 어찌..."
나는 마음속으로 살생부를 펼쳤다.
잉크 대신 피를 찍어 첫 장을 넘겼다.
첫 번째 줄, 심환지.
두 번째 줄, 정순왕후.
종이도 붓도 필요 없었다.
내 영혼에 붉게 새겨진 명단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정순왕후가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권력을 향한 갈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제부터 나라 일은...
이 할미가 대신 살피겠소.
전하는 그저 마음을 추스르기만 하셔요."
수렴청정 선언의 서막.
나는 터져 나오려는 비소(緋笑)를 짓눌렀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오늘 그 교지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는 척하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비마마... 아바님의 승하에 의문이 남아서는 아니 됩니다."
정순왕후의 눈동자가 아주 찰나,
경련하듯 흔들렸다.
"의문이라니요? 그게 무슨..."
"아바님의 마지막을 지켰던 어의들을 즉각 불러야 합니다."
나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덧붙였다.
"강명길과 피재길을…
단 한 걸음도 침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잡아 오십시오.
지금 당장."
정순왕후의 얼굴에서 미소가 증발했다.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어 경직되었다.
뒤에 서 있던 심환지의 눈빛이 맹독을 품은 침처럼 내 얼굴을 파고들었다.
'이 어린 왕이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나는 그 살기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내 눈은 더 이상 공포에 질린 열한 살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한 번 나라를 잃고, 그 참혹한 대가를 온몸으로 겪어본 망국의 기록자,
신채호의 눈이었다.
나는 조선의 왕으로 돌아왔다.
이번 생에 역적들이 숨 쉴 구멍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순왕후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 그리하도록 하라."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나는 승리를 예감했다.
나의 첫 번째 수가 저들의 심장을 찔렀다.
이제 시작이다.
독의 증거를 찾고,
정조의 친위 군사 조직이었던 장용영을 소집한다.
백동수의 칼날을 빌려 심환지를 포획하고,
정순왕후를 차가운 별궁에 유폐할 것이다.
살생부의 첫 페이지가 저들의 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나는 내관들이 밖으로 뛰어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정조에게 속삭였다.
'아바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받은 고통, 당신이 당한 치욕...'
'남김없이 되갚아 주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순왕후와 심환지의 눈빛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나는 확신했다.
조선의 역사는 오늘 밤, 피의 잉크로 다시 쓰일 것이다.
혀끝이 썩은 피를 머금은 듯 지독하게 썼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비릿한 쇠맛이 역류하고, 숨은 가시 덩굴에 걸린 듯 꺼칠거렸다.
침을 삼키는 지극히 당연한 행위조차 이제는 난도질당하는 고통이었다.
내가 마신 것은 차였다.
늘 마시던 약차, 늘 잡던 익숙한 잔, 코끝을 간지럽히던 그윽한 향.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것이 죽음의 색이었다.
몸의 끝단부터 서서히 차갑게 식어 가는데, 이상하게도 의식만큼은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마치 누군가 내 영혼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이 참혹한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는 것처럼.
나는 침상 곁에 엎드린 인간들의 얼굴을 하나씩, 아주 천천히 해부하듯 읽어 내려갔다.
슬퍼하는 얼굴이 있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점의 슬픔도 없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들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손놀림은 기괴할 정도로 침착하고 분주했다.
사태를 수습하는 그 매끄러운 동작들,
이미 정해진 결말을 확인하러 온 집행관의 눈빛.
나는 그 눈빛을 사무치게 잘 알고 있었다.
'혁명'이라는 단어만 혀 위에 올려도 차디찬 옥에 갇히던 시대.
가슴 속에 폭탄을 품고 어둠이 내린 경성의 골목을 소리 없이 누볐던 자들.
경무총감부의 구두 소리를 듣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 서늘한 결의.
나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의열단.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동지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 이 지옥 같은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결국, 나 또한 이렇게 죽음을 마주한다.
그런데—
여기는 대체 어디란 말인가?
침상 위에 놓인 내 손이 낯설게 크고 희었다.
핏줄은 검게 부풀어 터질 듯했고,
손목에는 왕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얇은 비단끈이 감겨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키려 했으나 폐는 이미 기능을 멈춘 듯 공기를 거부했다.
"커헉...! 윽!"
격렬한 발작과 함께 검붉은 선혈이 입가를 타고 흘러 비단 이불을 적셨다.
"전하...! 전하! 정신을 차리옵소서!"
내관의 찢어지는 비명이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어의가 허둥지둥 달려들었으나,
그들의 움직임은 늪 속을 걷는 것처럼 느릿했다.
아니, 늦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연출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소란의 틈새,
침전 깊숙한 어둠 속에서 낮게 깔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끝이옵니다."
그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진리인 양 흘러나왔다.
끝? 내가 여기서 끝이라고?
나는 마비되어가는 고개를 겨우 돌렸다.
휘장 너머로 일렁이는 그림자들.
한 사내는 검은 도포에 몸을 숨긴 채 망석중이처럼 서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매와 칼날같이 얇은 입술.
스스로 '법'과 '도리'의 화신이라 자부하는 위선자의 얼굴.
그보다 높은 자리에는 붉은 비단 치마를 늘어뜨린 노회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번득이는 옥가락지.
세월에 패인 주름 뒤로 숨겨진 눈빛은 탐욕스러운 맹수처럼 번득였다.
권력을 수십 년간 쥐고 흔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오만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들을 단번에 알아봤다.
정순왕후.
심환지.
이것은 죽음이 선사하는 환영이 아니었다.
나는 이 이름들을 역사서에서,
조선의 심장을 파헤치며 피로 쓴 기록들 속에서 수천 번은 읽었다.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꼽을 때,
반드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던 불멸의 악인들.
숨이 완전히 끊겨가는 찰나,
벼락 같은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이건 병이 아니다. 명백한 독(毒)이다.
그리고 이 독은 단지 왕의 숨통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나라, 조선의 명운을 도살하기 위한 칼날이다.
"전하... 제발...!"
어의가 내 맥을 짚었으나 손끝으로 전해지는 진동은 이미 잦아들고 있었다.
시야가 백색 소음처럼 흐려졌다. 천장은 아득히 멀어지고,
아우성치던 인간들의 얼굴이 물속의 수초처럼 일렁였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보았다.
정순왕후의 입가에 어린 아주 희미하고도 조용한 미소를.
슬픔이 거세된, 완벽한 승리자의 웃음.
그리고 심환지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끝났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나는 마지막 남은 생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이를 악물었다.
피비린내가 입안 가득 진동했다.
내가 이대로 눈을 감으면,
조선은 저들의 아가리 속으로 떨어진다.
내가 실패하면 역사는 반복되고,
내 동지들은 다시 차가운 땅에 묻힐 것이다.
나는 끝낼 수 없다. 아니, 끝내선 안 된다.
나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다.
나는 조선을 되찾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던 기록자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는 육신의 숨을 놓는 대신, 영혼의 깊은 곳에 맹세를 새겼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죽인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
"전하! 전하! 통곡하옵니다…!
어찌 이리 허망하게 가시나이까!"
고막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숨이— 들어왔다.
지독한 기침도, 비릿한 피 냄새도 없었다.
대신 가슴 속에서 작고 빠르게 뛰는 심장의 진동이 느껴졌다.
너무나 가볍고 가느다란 박동.
몸이… 기괴할 정도로 작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작고 부드러운 손.
칼을 쥐어본 적도,
붓을 짓눌러 잡아본 적도 없는 어린아이의 희디흰 손이었다.
내가 침상 위를 짚고 몸을 일으키자,
방안에 엎드려 있던 내관들이 혼비백산하여 바닥에 머리를 짓찧었다.
방 안은 장례의 냄새로 진동했다.
향연과 피, 그리고 독한 약재가 뒤섞인 왕실 특유의 불길한 냄새.
"전하... 순조대왕 전하...! 기적이옵니다!"
순조? 내가 순조라고?
나는 타들어 가는 목구멍을 억누르며,
머릿속으로 역사적 연대기를 거칠게 뒤적였다.
순조. 정조의 아들.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왕좌에 오른 소년 왕.
그리고 역사 속에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휘둘려 권력을 빼앗기고,
조선이 망국의 늪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한 비극의 기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나는 지금, 조선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변곡점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정조가 독살당한 바로 그날'에.
충혈된 눈의 내관이 통곡하며 말했다.
"대비마마께서 곧 당도하실 것이옵니다.
수렴청정의 교지를..."
수렴청정(垂簾聽政).
그 단어 하나에 머릿속의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정순왕후가 커튼 뒤에서 권력을 잡는 순간,
정조가 일구어놓은 모든 개혁의 싹은 잘려 나간다.
국왕의 친위부대 장용영은 해체될 것이며,
실학자들은 벽파의 칼날에 스러질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다시 폐쇄와 부패의 어둠 속으로 침잠하리라.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었다.
문밖으로 바삐 오가는 그림자들.
누군가는 이미 노론 벽파에 줄을 대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권력을 나눌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묵직한 문이 열렸다.
겨울 서리보다 차가운 기운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비단 옷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들어섰다. 늙었으나 권세의 서슬이 시퍼런 얼굴.
내 기억 속에서 나를 죽음으로 밀어 넣으며 미소 짓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그녀의 뒤로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심환지가 그림자처럼 따라 들어왔다.
나는 확신했다. 내가 본 것은 죽어가는 자의 망상이 아니었다.
정조는 저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
정순왕후가 가증스러운 자애로움을 연출하며 내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지만, 그것은 독사가 먹잇감을 감싸는 듯한 서늘한 촉각이었다.
"전하... 이 어린 몸에 어찌 이리 큰 상을 당하셨단 말입니까.
애통하여 가슴이 찢어지는구려."
나는 울먹이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대비마마... 아바님께서...아바님께서 어찌..."
나는 마음속으로 살생부를 펼쳤다.
잉크 대신 피를 찍어 첫 장을 넘겼다.
첫 번째 줄, 심환지.
두 번째 줄, 정순왕후.
종이도 붓도 필요 없었다.
내 영혼에 붉게 새겨진 명단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정순왕후가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권력을 향한 갈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제부터 나라 일은...
이 할미가 대신 살피겠소.
전하는 그저 마음을 추스르기만 하셔요."
수렴청정 선언의 서막.
나는 터져 나오려는 비소(緋笑)를 짓눌렀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오늘 그 교지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는 척하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비마마... 아바님의 승하에 의문이 남아서는 아니 됩니다."
정순왕후의 눈동자가 아주 찰나,
경련하듯 흔들렸다.
"의문이라니요? 그게 무슨..."
"아바님의 마지막을 지켰던 어의들을 즉각 불러야 합니다."
나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덧붙였다.
"강명길과 피재길을…
단 한 걸음도 침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잡아 오십시오.
지금 당장."
정순왕후의 얼굴에서 미소가 증발했다.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어 경직되었다.
뒤에 서 있던 심환지의 눈빛이 맹독을 품은 침처럼 내 얼굴을 파고들었다.
'이 어린 왕이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나는 그 살기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내 눈은 더 이상 공포에 질린 열한 살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한 번 나라를 잃고, 그 참혹한 대가를 온몸으로 겪어본 망국의 기록자,
신채호의 눈이었다.
나는 조선의 왕으로 돌아왔다.
이번 생에 역적들이 숨 쉴 구멍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순왕후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 그리하도록 하라."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나는 승리를 예감했다.
나의 첫 번째 수가 저들의 심장을 찔렀다.
이제 시작이다.
독의 증거를 찾고,
정조의 친위 군사 조직이었던 장용영을 소집한다.
백동수의 칼날을 빌려 심환지를 포획하고,
정순왕후를 차가운 별궁에 유폐할 것이다.
살생부의 첫 페이지가 저들의 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나는 내관들이 밖으로 뛰어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정조에게 속삭였다.
'아바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받은 고통, 당신이 당한 치욕...'
'남김없이 되갚아 주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순왕후와 심환지의 눈빛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나는 확신했다.
조선의 역사는 오늘 밤, 피의 잉크로 다시 쓰일 것이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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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순조로 환생해 노론을 숙청하다
7.제7화 — 창덕궁의 밤: 포식자의 조우조회 : 45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424 6.제6화 — 체포 명령: 주사위는 던져졌다조회 : 43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153 5.제5화 — 살생부: 피로 쓴 판결문조회 : 2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681 4.제4화 — 봉쇄: 포식자의 눈을 마주하다조회 : 41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674 3.제3화 — 왕의 검: 사선의 결단조회 : 43 추천 : 1 댓글 : 0 글자 : 2,744 2.제2화 — 어의들: 장막 안의 칼날조회 : 54 추천 : 1 댓글 : 0 글자 : 3,373 1.제1화 — 독살: 유령의 귀환조회 : 87 추천 : 1 댓글 : 0 글자 : 5,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