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투박하고 굳은살 박인 손바닥 위에는 내가 방금 써 내려간 종이가 들려 있었다.
먹향이 채 가시지 않은, 아직은 축축한 살생부.
나는 그의 시선이 종이의 가장 윗부분, 그 서슬 퍼런 이름을 이미 읽어냈음을 직감했다.
심환지(沈煥之).
그 세 글자가 지닌 파괴적인 무게를,
이 방 안의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자가 바로 백동수였다.
노론 벽파의 심장이자, 조정의 모든 숨구멍을 쥐고 흔드는 실권자.
정순왕후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며, 무
엇보다 나의 선왕(先王) 정조를 독살한 의혹의 정점에 서 있는 사내.
침묵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방 안을 가로질렀다.
나는 일부러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명검(名劍)이 자신의 첫 번째 표적을 인지하고,
살기를 다듬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독한 정적 끝에, 백동수가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그의 음성은 낮게 깔렸으나,
그 안에는 형용할 수 없는 파동이 일고 있었다.
“이 자를… 지금 이 시각에,
직접 체포하라는 명이시옵니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 지체할 이유가 없다.”
백동수의 손가락이 종이 끝동을 꽉 움켜쥐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압송이 아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노론의 치세(治世)에 던지는 선전포고이자,
피로 얼룩질 전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의 귓가에 닿을 듯 낮게 읊조렸다.
“궁문은 이미 봉쇄되었다.
내 허락 없이는 바람조차 이 담을 넘지 못한다.”
백동수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들렸다.
“그는 아직 궁 안에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
승리의 축배를 들기 위해 잔을 채우고 있을 터이지.
내가... 그 잔을 깨뜨리라 명하는 것이다.”
백동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수만 가지 연산이 휘몰아치고 있었을 것이다.
장용영의 가용 병력,
심환지가 머물고 있을 처소의 위치,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대부들의 반발 가능성.
마침내, 백동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한 점의 흔들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능하옵니다.
소신이 직접 머리채를 잡아 전하의 발치에 꿇리겠나이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지막으로 던졌다.
“두려운가? 대제학이자 영의정을 지낸 자를 역적으로 모는 것이.”
백동수는 짧게 실소했다. 그리고 칼자루 위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소신은 오직 전하의 검일 뿐.
검은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사옵니다.”
그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맹세했다.
“소신의 미천한 목숨을 걸고, 기필코 완수하겠나이다.”
“아니, 목숨은 필요 없다.”
백동수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의 앞에 서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짐에게 필요한 것은 죽은 시체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며 적의 목을 베어올 ‘살아있는 검’이다.
너를 버릴 생각 따위는 없다.
그러니 반드시 살아서 그자를 데려오라.”
백동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어린 왕이 자신을 소모품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동반자로 선택했음을.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지금 당장 가라.”
나의 일갈과 함께 백동수가 용수철처럼 일어났다.그
의 움직임에는 단 1인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를 돌려 문으로 향했다.
차가운 갑옷 소리가 챙강거리며 침전을 울렸다.
문턱을 넘기 직전, 백동수가 멈춰 섰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신음하듯 물었다.
“...전하. 이 피바람이 멈춘 뒤에, 진정 조선이 바뀌겠사옵니까?”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조용히,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이미 바뀌었다. 짐... 이 육신으로 눈을 뜬 순간부터.”
백동수의 넓은 어깨가 굳건하게 펴졌다.
“…그러하옵니다. 소신, 길을 열겠나이다.”
그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밤의 서늘한 냉기가 방 안으로 들이쳤다.
등불이 위태롭게 흔들렸고,
왕의 검은 그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방 안.
나는 내 작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은 아직 누구의 피도 묻지 않았으나,
나의 혀는 이미 거대한 거물을 죽음의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다.
‘도망쳐 보아라, 심환지.’
‘네가 쌓아 올린 그 가증스러운 권력의 탑 아래서,
너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순간, 멀리 창덕궁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검이 뽑혔다.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