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님은 내 존재 의의가 연을 위해서라고 하셨다. 남을 저주하는 능력을 연을 위해서 쓰라고 하셨다. 박사님은 아실까. 지금 연이 가장 저주하는 사람이 당신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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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연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나는 그 아이가 참 곱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괴로움 한번 느껴보지 않았을 것 같은 미소를 띤 채로 내게 사근사근 말을 걸며 다가오는데, 어쩔줄 몰라서 멍청히 연을 바라보던 내가 계속해서 생각난다.
연의 저택은 박사님의 집과는 확연히 달랐다. 깔끔하게 정리된 물건들과 한눈에 봐도 비싸보이는 가구들. 나는 왜인지 오면 안될 곳에 온 기분이 들어 연의 뒤에서 쭈뼛쭈뼛 걸음을 옮겼다.
내게 방이 주어지긴 했지만, 연은 그냥 자신과 함께 자자고 하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연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두 명이 함께 누워도 공간이 남을 듯한 하얀 침대. 샤워실과 화장실로 연결되는 문. 벽면에는 거실에도 있었던 텔레비전이. 내가 박사님의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낯선 이미지들을 힘겹게 소화하고 있었을 때, 연은 자신이 먼저 씻겠다고 말하며 익숙하게 옷을 벗었다. 내가 당황하여 급하게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연이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침대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연에 대해 생각했다. 박사님은 내게 연의 저주를 들어달라 하셨다. 그렇다면 연의 저주는 무엇일까. 머릿속에서 연에 대한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연이 젖은 머리를 수건에 두른 채 샤워실에서 나왔다. 나는 연에게 받은 잠옷을 챙기고선 조심스레 샤워실로 들어갔다.
모든 불필요한 감정과 잡생각들은 물에 흘려 보낸다. 박사님의 말만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앞으로 연의 말만을 들어야 할 것임을, 오직 그것만을 마음 속에 담아 두면 된다.
수건으로 물기를 꼼꼼히 닦은 후 연에게 받은 잠옷을 입었다. 일부러 내게 맞는 사이즈의 옷을 준비해두었는 지 잠옷은 내 몸에 딱 맞았다. 문을 열고 샤워실에서 나왔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추위에 몸이 으스스 떨렸다. 연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샤워실에서 나오자, 그 애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드라이기가 있는 위치를 친절히 알려주었다. 덕분에 빠르게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엔 곧바로 침대에 올랐다. 연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위치에 자리 잡아 몸을 눕혔다. 연은 내가 꾸물꾸물 이불을 덮는 모습을 슬쩍 보더니, 읽던 책을 덮고 침대 옆 스위치를 눌러 방의 불을 껐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서서히 긴장을 풀어주었다. 뻣뻣하던 몸이 이완되기 시작했고, 시끄럽던 머릿속도 고요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서서히 눈이 감겼다. 그렇게 내가 깊은 잠에 들기 전에, 연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번째 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