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에한 네르딘에 대해(10)
조회 : 959 추천 : 0 글자수 : 4,603 자 2022-09-30
역장의 영향이 줄어드는 던전의 초입 부분에서 회수조를 마주했다. 디트에한과 레믈롯은 초입이 끝나는 경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플라니아, 셀시는 많이 다친거야? 어떻게 됐길래 저렇게 옷이 피로 젖은 거야? 많이 다친 거 맞지, 그렇지?”
회수조로 들어온 디트에한은 굳은 얼굴로 플라니아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 셰레샤이데에 대한 걸 물었다.
“응.... 그렇지만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얼마나 다쳤는데?”
“배랑 발목이.....”
디트에한은 안절부절하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저 멀리 레믈롯과 함께 이야기하던 셰레샤이데가 불쑥 다가와 얼굴을 내밀었다.
“공주님, 디테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디트에한은 플라니아에게만 보일 정도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냥. 너 예쁘다고 했어.”
“아이 참, 공주님도.”
셰레샤이데는 의심도 하지 않고 볼을 긁으며 쑥스러워했다. 여자가 된 이후로, 셰레샤이데는 예쁘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어했다. 여자애들이 하는 것은 전부 하고 싶어했고, 새 예쁜 옷을 사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해왔던 일에 소홀함은 없었다.
“디테, 섬멸하면서 몇몇 유물 위치는 봐뒀어. 레믈롯에게 말해뒀으니 순조롭게 찾을 수 있을거야.”
입학하고 난 뒤 4달. 셰레샤이데가 여자임이 밝혀진지 2달. 셰레샤이데의 머리카락은 어느 새 어깨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디트에한을 제외한 모두가 그런 셰레샤이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디트에한은 좋아하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평소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 일이 일어났다.
“너지?”
던전 공략이 끝나고 모두 모여서 뒤풀이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플라니아는 모두가 평소 모인다던 장소, 돼지의 여물통으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눈꼬리가 올라가고 드세 보이는 인상의 아가씨가 플라니아의 팔을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힘에 놀란 플라니아는 눈만 깜박거리면서 아가씨를 보았다.
“네가 디트에한을 꼬셨지?”
순간적으로 플라니아는 웃어버렸다.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을 땐 마냥 웃기기만 했는데, 막상 그 대상이 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건 내가 아닌데.”
“네가 아니면 누구야! 너네 학교 애들이 분명 학교에 진짜 여자는 너 밖에 없다고 했는데!”
“어쨌든 그건 내가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말할게. 그러니까 불쾌한 손 좀 치워줄래? 난 디트에한에게 관심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네 말을 어떻게 믿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걔가 아니라 걔 친구야.”
“그러면 믿을게.”
아가씨는 새침하게 손을 놓아주고 등을 돌려 발을 한 발자국씩 내려 찍으면서 어딘가로 향했다. 플라니아는 아가씨를 순순히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잠깐!”
“왜?”
“사과는 하고 가야지. 어디서 남 팔 잡아 놓고는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내 빼.”
“그건... 내가 물어봤을 때 다들 너 밖에 없다고....”
“네 사정 따윈 안 궁금하고,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라고.”
아가씨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플라니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유리궁전에 살았을 때는 더한 눈빛도 받아봤다. 이럴 때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됐다. 더 강하게 나갈 수록, 더 잔악하게 보일 수록, 플라니아의 입지가 생겼다.
“하지만 난.....”
“안 물어봤고, 사과나 해.”
점점 매섭게 뜨는 눈에 질린 아가씨는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지만 그것 역시 플라니아가 신경 써주어야 할 것은 아니었다. 플라니아는 자신을 무시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것을 돌려주어야 속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나중에 더 큰 후환이 되어 돌아왔다.
“다들 여자라면 빨간 머리 여자 밖에 없다고 그랬단 말이야...!”
“또 변명한다. 네 아가리는 예의랑 함께 바느질했니? 입으로 볼일을 볼 거면 변소가서 보렴. 냄새 풍기지 말고.”
“그래도...!”
“사과 안할거면 똥내나는 아가리나 닫고 있던가. 왜 계속 열어제끼는지 모르겠다!”
거친 말과는 상반되게 몸을 비비 꼬면서 사랑스럽게 말하자, 아가씨의 얼굴이 금방 새빨개졌다. 수치를 당했다는 부끄러움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났다. 마침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미안..미안합니다....”
반말로 하는 것을 눈썹을 까닥이자 급히 존댓말로 바꾸었다. 이 정도로 사과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플라니아는 말투를 누그러트렸다.
“알면 됐고, 할 말이 있으면 디트에한 본인에게 하던가. 만만하다고 다른 사람한테 시비걸고 다니지 말고.”
그리고 돼지의 여물통으로 왔다. 돼지의 여물통은 그 이름에 맞게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다. 그 시끄러움의 대부분은 기사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불쾌한 데반부터 셈리흐까지 모조리 모여 있었다. 정말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플라니아는 제일 안쪽 테이블에서 누샨이 흔드는 손을 보고 자리에 앉았다.
“돼지의 여물통 같네, 정말.”
“그렇지? 그래서 좋은거야.”
“누샨, 너도 정말 취향 특이하다.”
지난 4개월 간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셰레샤이데를 만나고, 반을 옮겨오고, 훈련도 받았다. 던전에서 제 몫을 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만 나쁘지 않게 해냈다. 다른 애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플리 잔은 내가 따라줄게.”
애칭으로 부를 정도, 술집에 다 같이 뒤풀이를 갈 정도는 된 것 같았다. 플라니아는 씨익 웃으면서 자신의 잔을 들었다. 거품이 올라오는 맥주를 보자,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의무실에서 부어먹던 술과 유리온실에서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는 술의 맛은 달랐다. 지금의 술도 그랬다. 술은 즐겁게 마셔야 맞았다.
“누샨. 나 뭐 물어바도 되니?”
“아, 응. 물론이지, 공주님. 뭐가 궁금한데?”
“나, 사실 입학하기 전부터 너희에 대해 알았어.”
“우리가 그렇게 유명했나?”
“아니, 난 너희의 친구를 알고 있었거든.”
“셀시?”
“그림. 그림 데쥬! 그 애는 내 편지상대였어. 그래서 학교도 들어온거야. 어쩌면 한 번 더 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시끄럽게 떠들던 주변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데반과 셈리흐의 테이블 마저도 말을 멈추고 플라니아를 바라보았다. 플라니아가 정지한 듯한 공기에 말을 멈추고 눈치를 살피자,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왜 이러지? 내가 못 물어볼 거 물어봤어?”
언제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띄고 있던 누샨도, 다정한 눈빛으로 플라니아를 지켜보던 레믈롯마저도 굳어졌다. 누샨이 다급하게 주제를 맺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야.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아인, 셀시는 언제 오지?”
“아까 플라니아 찾는다고 나갔는데.”
“그걸 이제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냐.”
누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디트에한이 막았다.
“내가 찾으러 갈게.”
“.....나도 갈게.”
에인헤랴르도 따라 일어섰다.
“그럼 너희 둘이 다녀오던가.”
플라니아는 문득, 아까 자신의 손목을 잡고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사과한 아가씨를 떠올렸다. 괜스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간다.”
아니나 다를까, 돼지의 여물통을 나선 셋이 발견한 것은, 뺨을 맞아 머리가 돌아간 셰레샤이데의 모습이었다.
“감히....!”
디트에한이 이를 갈면서 소매 단추를 풀었다. 디트에한의 팔목에 힘줄이 서는 것을 본 플라니아는 다급하게 디트에한을 붙잡았다.
“저 정도는 셀시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일단 지켜보자. 위험한 상황일 때 나서는거야. 그리고 디테.... 네가 화낼 일이 아니기도 하고.”
플라니아는 셰레샤이데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플라니아가 알려준 대로 하길 바랐다. 강하게 나가서 짓밟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셰레샤이데가 알아줬으면 했다. 다른 애들이 셰레샤이데를 함부로 대하면 돌려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아무도 셰레샤이데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셰레샤이데는, 뺨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평소처럼 웃었다.
“아가씨, 예쁜 아가씨. 제 뺨을 치면 화가 풀리나요?”
아가씨가 악에 받혀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이번엔 반대쪽 뺨이었다.
“어, 풀려. 풀려서 좋다. 왜!”
셰레샤이데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맞아주었다. 아가씨는 셰레샤이데의 뺨을 때린 자신의 손을 멍하니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셰레샤이데는 아가씨의 손을 감싸 쥐고 그저 다정하게 말했다.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데요. 정말 저를 때려서 분이 풀렸다면, 그렇게 울어선 안되는 거잖아요. 왜 그렇게 슬퍼하고 있어요? 사실 절 때리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닌가요?”
마침내 아가씨는 울음을 터트렸다. 셰레샤이데는 말 없이 아가씨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셰레샤이데의 뺨을 때린 아가씨는 디트에한이 이전에 잠깐 사귄 적 있었던 아가씨였다. 누구였는지 디트에한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아가씨에겐 그렇지 않았다.
순진하게 하루 데이트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아가씨는 디트에한이 평생의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깊은 산골, 인적조차 드물고 알려지지도 않은 기사학교 주변을 돌면서 디트에한을 찾았다. 그 결과 마주한 것은, 디트에한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플라니아, 셀시는 많이 다친거야? 어떻게 됐길래 저렇게 옷이 피로 젖은 거야? 많이 다친 거 맞지, 그렇지?”
회수조로 들어온 디트에한은 굳은 얼굴로 플라니아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 셰레샤이데에 대한 걸 물었다.
“응.... 그렇지만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얼마나 다쳤는데?”
“배랑 발목이.....”
디트에한은 안절부절하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저 멀리 레믈롯과 함께 이야기하던 셰레샤이데가 불쑥 다가와 얼굴을 내밀었다.
“공주님, 디테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디트에한은 플라니아에게만 보일 정도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냥. 너 예쁘다고 했어.”
“아이 참, 공주님도.”
셰레샤이데는 의심도 하지 않고 볼을 긁으며 쑥스러워했다. 여자가 된 이후로, 셰레샤이데는 예쁘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어했다. 여자애들이 하는 것은 전부 하고 싶어했고, 새 예쁜 옷을 사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해왔던 일에 소홀함은 없었다.
“디테, 섬멸하면서 몇몇 유물 위치는 봐뒀어. 레믈롯에게 말해뒀으니 순조롭게 찾을 수 있을거야.”
입학하고 난 뒤 4달. 셰레샤이데가 여자임이 밝혀진지 2달. 셰레샤이데의 머리카락은 어느 새 어깨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디트에한을 제외한 모두가 그런 셰레샤이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디트에한은 좋아하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평소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 일이 일어났다.
“너지?”
던전 공략이 끝나고 모두 모여서 뒤풀이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플라니아는 모두가 평소 모인다던 장소, 돼지의 여물통으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눈꼬리가 올라가고 드세 보이는 인상의 아가씨가 플라니아의 팔을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힘에 놀란 플라니아는 눈만 깜박거리면서 아가씨를 보았다.
“네가 디트에한을 꼬셨지?”
순간적으로 플라니아는 웃어버렸다.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을 땐 마냥 웃기기만 했는데, 막상 그 대상이 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건 내가 아닌데.”
“네가 아니면 누구야! 너네 학교 애들이 분명 학교에 진짜 여자는 너 밖에 없다고 했는데!”
“어쨌든 그건 내가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말할게. 그러니까 불쾌한 손 좀 치워줄래? 난 디트에한에게 관심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네 말을 어떻게 믿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걔가 아니라 걔 친구야.”
“그러면 믿을게.”
아가씨는 새침하게 손을 놓아주고 등을 돌려 발을 한 발자국씩 내려 찍으면서 어딘가로 향했다. 플라니아는 아가씨를 순순히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잠깐!”
“왜?”
“사과는 하고 가야지. 어디서 남 팔 잡아 놓고는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내 빼.”
“그건... 내가 물어봤을 때 다들 너 밖에 없다고....”
“네 사정 따윈 안 궁금하고,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라고.”
아가씨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플라니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유리궁전에 살았을 때는 더한 눈빛도 받아봤다. 이럴 때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됐다. 더 강하게 나갈 수록, 더 잔악하게 보일 수록, 플라니아의 입지가 생겼다.
“하지만 난.....”
“안 물어봤고, 사과나 해.”
점점 매섭게 뜨는 눈에 질린 아가씨는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지만 그것 역시 플라니아가 신경 써주어야 할 것은 아니었다. 플라니아는 자신을 무시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것을 돌려주어야 속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나중에 더 큰 후환이 되어 돌아왔다.
“다들 여자라면 빨간 머리 여자 밖에 없다고 그랬단 말이야...!”
“또 변명한다. 네 아가리는 예의랑 함께 바느질했니? 입으로 볼일을 볼 거면 변소가서 보렴. 냄새 풍기지 말고.”
“그래도...!”
“사과 안할거면 똥내나는 아가리나 닫고 있던가. 왜 계속 열어제끼는지 모르겠다!”
거친 말과는 상반되게 몸을 비비 꼬면서 사랑스럽게 말하자, 아가씨의 얼굴이 금방 새빨개졌다. 수치를 당했다는 부끄러움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났다. 마침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미안..미안합니다....”
반말로 하는 것을 눈썹을 까닥이자 급히 존댓말로 바꾸었다. 이 정도로 사과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플라니아는 말투를 누그러트렸다.
“알면 됐고, 할 말이 있으면 디트에한 본인에게 하던가. 만만하다고 다른 사람한테 시비걸고 다니지 말고.”
그리고 돼지의 여물통으로 왔다. 돼지의 여물통은 그 이름에 맞게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다. 그 시끄러움의 대부분은 기사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불쾌한 데반부터 셈리흐까지 모조리 모여 있었다. 정말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플라니아는 제일 안쪽 테이블에서 누샨이 흔드는 손을 보고 자리에 앉았다.
“돼지의 여물통 같네, 정말.”
“그렇지? 그래서 좋은거야.”
“누샨, 너도 정말 취향 특이하다.”
지난 4개월 간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셰레샤이데를 만나고, 반을 옮겨오고, 훈련도 받았다. 던전에서 제 몫을 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만 나쁘지 않게 해냈다. 다른 애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플리 잔은 내가 따라줄게.”
애칭으로 부를 정도, 술집에 다 같이 뒤풀이를 갈 정도는 된 것 같았다. 플라니아는 씨익 웃으면서 자신의 잔을 들었다. 거품이 올라오는 맥주를 보자,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의무실에서 부어먹던 술과 유리온실에서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는 술의 맛은 달랐다. 지금의 술도 그랬다. 술은 즐겁게 마셔야 맞았다.
“누샨. 나 뭐 물어바도 되니?”
“아, 응. 물론이지, 공주님. 뭐가 궁금한데?”
“나, 사실 입학하기 전부터 너희에 대해 알았어.”
“우리가 그렇게 유명했나?”
“아니, 난 너희의 친구를 알고 있었거든.”
“셀시?”
“그림. 그림 데쥬! 그 애는 내 편지상대였어. 그래서 학교도 들어온거야. 어쩌면 한 번 더 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시끄럽게 떠들던 주변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데반과 셈리흐의 테이블 마저도 말을 멈추고 플라니아를 바라보았다. 플라니아가 정지한 듯한 공기에 말을 멈추고 눈치를 살피자,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왜 이러지? 내가 못 물어볼 거 물어봤어?”
언제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띄고 있던 누샨도, 다정한 눈빛으로 플라니아를 지켜보던 레믈롯마저도 굳어졌다. 누샨이 다급하게 주제를 맺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야.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아인, 셀시는 언제 오지?”
“아까 플라니아 찾는다고 나갔는데.”
“그걸 이제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냐.”
누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디트에한이 막았다.
“내가 찾으러 갈게.”
“.....나도 갈게.”
에인헤랴르도 따라 일어섰다.
“그럼 너희 둘이 다녀오던가.”
플라니아는 문득, 아까 자신의 손목을 잡고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사과한 아가씨를 떠올렸다. 괜스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간다.”
아니나 다를까, 돼지의 여물통을 나선 셋이 발견한 것은, 뺨을 맞아 머리가 돌아간 셰레샤이데의 모습이었다.
“감히....!”
디트에한이 이를 갈면서 소매 단추를 풀었다. 디트에한의 팔목에 힘줄이 서는 것을 본 플라니아는 다급하게 디트에한을 붙잡았다.
“저 정도는 셀시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일단 지켜보자. 위험한 상황일 때 나서는거야. 그리고 디테.... 네가 화낼 일이 아니기도 하고.”
플라니아는 셰레샤이데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플라니아가 알려준 대로 하길 바랐다. 강하게 나가서 짓밟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셰레샤이데가 알아줬으면 했다. 다른 애들이 셰레샤이데를 함부로 대하면 돌려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아무도 셰레샤이데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셰레샤이데는, 뺨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평소처럼 웃었다.
“아가씨, 예쁜 아가씨. 제 뺨을 치면 화가 풀리나요?”
아가씨가 악에 받혀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이번엔 반대쪽 뺨이었다.
“어, 풀려. 풀려서 좋다. 왜!”
셰레샤이데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맞아주었다. 아가씨는 셰레샤이데의 뺨을 때린 자신의 손을 멍하니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셰레샤이데는 아가씨의 손을 감싸 쥐고 그저 다정하게 말했다.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데요. 정말 저를 때려서 분이 풀렸다면, 그렇게 울어선 안되는 거잖아요. 왜 그렇게 슬퍼하고 있어요? 사실 절 때리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닌가요?”
마침내 아가씨는 울음을 터트렸다. 셰레샤이데는 말 없이 아가씨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셰레샤이데의 뺨을 때린 아가씨는 디트에한이 이전에 잠깐 사귄 적 있었던 아가씨였다. 누구였는지 디트에한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아가씨에겐 그렇지 않았다.
순진하게 하루 데이트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아가씨는 디트에한이 평생의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깊은 산골, 인적조차 드물고 알려지지도 않은 기사학교 주변을 돌면서 디트에한을 찾았다. 그 결과 마주한 것은, 디트에한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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