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샨 르 레이에 대해
조회 : 1,081 추천 : 0 글자수 : 6,729 자 2022-10-28
다시 술집, 돼지의 여물통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잔에 술이 채워졌다. 이야기도 도란도란 시작되었다. 에인헤랴르와 누샨은 앞에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레믈롯과 디트에한은 적당량만, 쇼우와 셰레샤이데는 조금만 먹었다. 플라니아는 눈치를 보다가 적당과 소식 사이의 양을 덜어 접시로 가져왔다.
“너희 방학 때 뭘 할거야? 집으로 돌아갈거야?”
화두를 뗀 것은 누샨이었다. 누샨은 붉은 색 눈으로 날카롭게 살피면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셰레샤이데였다.
“난 언제나처럼 집 갔다올 것 같아. 용을 잡아야지 빨리 저주를 끝낼 수 있지 않겠어?”
“그렇네. 너도 참.....”
누샨이 말 끝을 흐리면서 조용히 셰레샤이데의 잔에 벌꿀주를 부었다. 플라니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꼈다. 플라니아의 눈에, 누샨은 셰레샤이데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셰레샤이데는 느끼지 못한 듯 어깨를 들썩이고는 그대로 잔을 들어 입에 벌꿀주를 털어넣었다.
“에인헤랴르, 넌 뭐하는데?”
“앙 아교에 나아어 우영.”
입에 고기를 가득 문 채로, 에인헤랴르가 대답했다. 잿빛의 머리칼에는 군데군데 고기기름이 튀어있었다. 아무래도 깔끔하게 먹는 편은 아니었다.
“뭐라는거야.”
결벽증이 있는 쇼우가 그런 에인헤랴르를 혐오스럽게 보면서 까칠하게 말했다. 사실 플라니아도 쇼우와 같은 의견이었다. 에인헤랴르는 평소에 말 수도 없는데, 입을 열 때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편은 아니었다. 에인헤랴르의 말을 번역해준 것은 셰레샤이데였다.
“학교에 남아서 수련한다네.”
“그걸 알아듣냐.”
“10년지기 친구라 이거지.”
씨익 웃으면서 셰레샤이데가 잔을 들어올렸다. 에인헤랴르와 셰레샤이데의 잔이 맞부딪치면서 벌꿀주의 거품이 살짝 흘렀다. 거품은 셰레샤이데의 손등에 쏟아져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셰레샤이데는 그 손을 입으로 가져가 핥으려고 했지만 막혔다.
“칠칠 맞기는. 그건 왜 핥는데.”
디트에한이 그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꺼내들어 닦아주었다. 셰레샤이데의 손을 닦아주던 디트에한은 속 없이 히히 웃어대는 셰레샤이데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셰레샤이데는 속 없이 웃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히....안 핥으면 끈적해지잖아. 그런데 그 손수건 비싼 것 같은데 그런 걸로 닦아도 괜찮아? 더러워질텐데....”
“빨면 되지, 뭐. 넌 또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
대수롭지 않게 젖은 손수건을 흔들면서 디트에한이 키득대었다. 다른 친구들도 함께 낄낄대면서 웃었다. 다시 잔을 든 것은 누샨이었다.
“야, 그런데 왜 우리 빼고 너희 둘만 짠 하냐? 우리랑도 짠 해야지!”
“짜안~!”
7개의 잔이 동시에 맞부딪혔다. 소란스럽던 술집에 약간의 소란을 더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시껄렁한 농담이 날아다니고, 웃음소리가 악사의 연주처럼 끊이질 않는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과음해서 구역질 소리가 나면, 술집의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야유질을 한다.
“우웨에엑.”
“우우~”
“머저리!”
청결과는 거리가 있고, 고상과는 더더욱 거리가 있었지만 플라니아는 그 모든 것이 편하게만 느껴졌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훈련은 힘들었고, 던전에 들어갈 때는 며칠 간 씻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플라니아는 지금이 훨씬 살아있는 것 같았다. 세 번째로 구역질을 한 셈리흐의 친구에게 야유가 쏟아질 때쯤, 누샨이 입을 열었다.
“디트에한, 넌 방학 때 뭐할거야?”
누샨의 말라붙어가는 피 같은 붉은 색 눈동자가 고요히 디트에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입가엔 분명 장난기를 남겨두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아니었다. 유쾌한 척하던 왕의 눈에 가까웠다. 플라니아는 누샨을 경계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글쎄, 뭐하지. 할 건 딱히 없는데. 아마 작년처럼 그냥 집에 박혀있지 않을까?”
“그럼 나랑 아인 밖에 안 남아있는거야? 너희들 다 집으로 가? 플라니아, 너는?”
“아니, 나도 남아있을건데.”
플라니아는 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그런 집구석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곳은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친해지지 얼마 되지 않은, 왕과 비슷한 누샨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누샨은 친구를 소중히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남아있을 예정. 체스터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연구 보조를 하지 않을까 싶어.”
쇼우가 입 주변 기름을 닦으면서 손을 들었다. 학교에 남아있기로 한 것은 쇼우, 누샨, 에인헤랴르, 플라니아로 총 4명이었다.
“그러면 셀시, 편지할게!”
“편지?”
흔쾌하게 알았다고 할 줄 알았던 셰레샤이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떻게 할지 몰라 굴렸다. 친해진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플라니아는 조심스럽게 셰레샤이데에게 확인했다.
“편지하는 건 좀 그런가?”
“아니요!”
무안할 정도로의 엄청난 속도로 셰레샤이데가 외쳤다.
“꼭, 꼭 해야해요! 방학 때, 저랑 편지해요!”
호박빛의 눈동자가 꿀 같이 반짝거렸다. 셰레샤이데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방학이 되었다.
“공주님, 저한테 꼭 편지하는 거 잊으시면 안돼요!”
학교를 떠나는 날, 셰레샤이데는 몇 번이고 다시 말하면서 편지를 해달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플라니아는 알았다고 하면서 셰레샤이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셰레샤이데는 고양이처럼 플라니아의 손에 머리를 부비적대었다.
“잘 지내야 해.”
“당연하죠.”
플라니아는 종종 셰레샤이데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였다. 방학 동안 플라니아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렸다. 주로 어울렸던 건 누샨이었다. 누샨은 보통 플라니아를 부를 때 이상하게 부르고는 했는데,
“야, 공주님! 검술 수련해야지!”
존중과 건방짐이 동시에 들어있었다. 고귀함을 뜻하는 검은색 피부와 곧게 올라간 코, 벌어진 어깨, 붉은색 눈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오만하면서도 소탈한 누샨은 친근하고도 쾌활했다. 홀로 할 것 없이 기숙사 방에 누워있는 플라니아를 불러 검술을 가르쳐주었다.
“야, 공주님. 검을 쥘 때 엉덩이를 그렇게 뒤로 빼면 안돼. 균형이 무너져.”
“그런데 누샨, 내가 왜 검술을 배워야 하는데?”
“빈 틈!”
누샨이 손에 쥔 장검으로 찔러들어왔다. 눈으로 보이는 큰 동작으로, 속도를 줄여서 들어오는 누샨의 검은 딱 플라니아가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거나 쳐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번은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플라니아가 쥐고 있던 목검이 날아가 대련장에 꽂혔다.
“헛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되는거야, 공주님. 검을 쥔 상대가 있다면 다른 것에 정신 팔지 말고 눈 앞의 상대에게만 집중해.”
플라니아는 방학이 시작한 이후 일주일 간 누샨이 하자는대로 맞춰주었지만, 슬슬 지치고 있었다. 누샨은 플라니아가 초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플라니아는 드러누워 투덜대었다.
“난 왜 내가 이렇게 검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어.”
누샨은 짧게 대꾸했다.
“난 네가 쉽게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차피 셀시가 지켜준다고 했으니까 괜찮은거 아니야? 난 셀시를 믿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대답하자, 누샨이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건 믿는다는게 아냐, 공주님. 미룬다고 하는거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고, 이미 셀시는 공주님 대신 많은 대가를 치렀어. 설마, 우리가 쓰는 달 베흐가 아무런 조건 없이 기적을 이뤄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몰랐어.”
“이젠 알았으니까 더는 도망갈 핑계 못대겠네? 그리고, 셀시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거야.”
플라니아는 더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으로 내뱉는 대신, 목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서 다시 한 번 누샨의 검을 막았다. 누샨의 얼굴에 희열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좋아, 그래야지.....!”
누샨과 검을 주고 받는 동안, 플라니아는 빠른 속도로 실력을 올릴 수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방학이 끝나고 돌아온 셰레샤이데가 지켜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정도였다. 셰레샤이데는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 모습을 보자 오히려 플라니아는 강해지기를 잘했다고 느꼈다.
“그나저나, 편지엔 왜 답장을 안해준거야! 편지 한다면서!”
“편지를.... 했었어요?”
“거기에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도 적었거든? 한 10통은 보냈을거야. 정말로 단 한 통도 못 받았어?”
“편지.... 받았다면 보냈을거에요. 답장..... 미안해요.”
시무룩한 셰레샤이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플라니아는 그냥 웃어넘겼다.
“강해진 내가 봐주지.”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음. 걔네 집은 원래 좀 그래. 편지를 해도 어디선가 빼돌리나봐. 나도 방학 때 몇 번 부친 적 있는데 답장이 온 적은 한 번 빼고 없었어.”
디트에한이 턱을 긁으면서 한숨쉬었다. 술 대신 주스를 마시면서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플라니아는 답장이 왔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답장이 온 적이 한 번은 있었어?”
“응. 걔네 집으로 혼담 넣었을 때. 셀시 어머님은 기뻐하시더라고.”
“세상에. 비열한 자식.”
플라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보니 디트에한은 오랜 짝사랑을 한 것 치고는 꽤나 적극적이었다. 셰레샤이데에게 정식으로 혼담을 넣은 것이었다. 그 혼담은 심지어 거의 성사되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셀시를 독차지 하려고 했단 말이야?”
“......진심이었으니까. 그런 비겁한 수라도 쓸만큼, 셀시는 나에게 소중했어.”
디트에한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약혼도 이제는 옛 이야기다. 갑자기 약혼 관계가 된 디트에한과 셰레샤이데는 어느 날 기별도 없이 약혼을 파기해버렸다. 그 일의 전말을, 플라니아는 한 번도 알지 못했다. 플라니아는 그 때, 셰레샤이데와 디트에한 양쪽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너희 약혼은 왜 깨졌던거야? 기왕 그렇게 된 거, 난 너희들이 잘 살았으면 했는데.”
하지만 지금이라면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놓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 셰레샤이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디트에한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입을 닫았다. 플라니아는 놓치지 않고 마저 추궁했다. 디트에한은 마른 세수를 거듭하면서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갑자기 별빛 정원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불청객만 아니었다면 디트에한은 틀림 없이 입을 떼었을 것이다.
“뭐야, 공주님. 디트에한도 있었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
다부졌던 몸은 한층 더 단련되어 단단해보였다. 고귀함을 뜻하는 검은색 피부와 붉은색 눈에는 타고난 위엄이란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위엄과는 반대로, 가벼운 말투로 말을 던져왔다. 플라니아는 그를 잘 알았다.
“누샨.”
이름을 부르자 그의 얼굴이 펴졌다.
“오랜만이야, 공주님. 보고 싶었어.”
과한 친밀감에 부담스러워진 플라니아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어서 와, 누샨. 우린 셀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래? 디테 저 겁쟁이가 드디어 용기를 낸 모양이네?”
쾌활하게 웃는 누샨과는 반대로, 디트에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플라니아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떠보았다.
“그치, 곧 있으면 들을 수 있을텐데. 네가 와버려서 입을 닫아버렸잖아.”
“그래? 그럼 내가 말하지 뭐. 괜찮지, 디테?”
누샨은 히죽 웃으면서 디트에한 쪽을 보았다. 디트에한은 창백해진 얼굴 그대로 손을 깍지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손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뭔데, 뭔데 그러는데?”
“공주님, 너 말이야. 그림이랑 친구였다고 했지. 편지도 주고 받고 했었던 거, 그거 공주님 너였지.”
“응.”
“행방불명되었다고 했던 그림이, 실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어?”
새로운 사실도 아니었다. 이미 전 날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알게 되었던 사실이었던 것이다. 플라니아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디테가 말해줬지. 그런데 너 셀시에 대해서 말해준다며.”
“말하고 있잖아, 지금.”
“그림이랑 셀시랑 무슨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 있지. 그림을 죽인 게 바로 셀시였으니까.”
플라니아는 디트에한 쪽을 바라보았다. 피하는 시선이 누샨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누샨은 태연한 얼굴 그대로 플라니아를 바라보면서, 마저 말을 내뱉었다.
“셀시가 그림을 살해했어.”
셀시와 살해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 사이에 그림이라는 이름이 들어간다면 한층 더 이상해졌다. 플라니아는 누샨이 끔찍한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샨의 얼굴에 장난기는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플라니아는 작은 목소리로 가장 납득할 수 있는 질문을 꺼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어?”
“그야, 모르지. 나도.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뭘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림이 죽던 날, 가장 먼저 현장을 발견한 게 나였어.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지. 그림은 이미 절벽 아래 강에 떠내려가고 있었어. 그 때 내가 본 걸, 아직도 기억해.”
누샨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진저리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셀시, 걘, 그림을 죽여놓고도 웃고 있었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석류석 산 호의 선장, 플라니아 플레타와 주정뱅이 디트에한 네르딘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평선의 지배자 누샨 르 레이가 도착했다.
감춰졌던 추악한 비밀 한 개가 드러났다.
아직 비밀은 6개가 더 남았다.
“너희 방학 때 뭘 할거야? 집으로 돌아갈거야?”
화두를 뗀 것은 누샨이었다. 누샨은 붉은 색 눈으로 날카롭게 살피면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셰레샤이데였다.
“난 언제나처럼 집 갔다올 것 같아. 용을 잡아야지 빨리 저주를 끝낼 수 있지 않겠어?”
“그렇네. 너도 참.....”
누샨이 말 끝을 흐리면서 조용히 셰레샤이데의 잔에 벌꿀주를 부었다. 플라니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꼈다. 플라니아의 눈에, 누샨은 셰레샤이데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셰레샤이데는 느끼지 못한 듯 어깨를 들썩이고는 그대로 잔을 들어 입에 벌꿀주를 털어넣었다.
“에인헤랴르, 넌 뭐하는데?”
“앙 아교에 나아어 우영.”
입에 고기를 가득 문 채로, 에인헤랴르가 대답했다. 잿빛의 머리칼에는 군데군데 고기기름이 튀어있었다. 아무래도 깔끔하게 먹는 편은 아니었다.
“뭐라는거야.”
결벽증이 있는 쇼우가 그런 에인헤랴르를 혐오스럽게 보면서 까칠하게 말했다. 사실 플라니아도 쇼우와 같은 의견이었다. 에인헤랴르는 평소에 말 수도 없는데, 입을 열 때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편은 아니었다. 에인헤랴르의 말을 번역해준 것은 셰레샤이데였다.
“학교에 남아서 수련한다네.”
“그걸 알아듣냐.”
“10년지기 친구라 이거지.”
씨익 웃으면서 셰레샤이데가 잔을 들어올렸다. 에인헤랴르와 셰레샤이데의 잔이 맞부딪치면서 벌꿀주의 거품이 살짝 흘렀다. 거품은 셰레샤이데의 손등에 쏟아져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셰레샤이데는 그 손을 입으로 가져가 핥으려고 했지만 막혔다.
“칠칠 맞기는. 그건 왜 핥는데.”
디트에한이 그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꺼내들어 닦아주었다. 셰레샤이데의 손을 닦아주던 디트에한은 속 없이 히히 웃어대는 셰레샤이데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셰레샤이데는 속 없이 웃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히....안 핥으면 끈적해지잖아. 그런데 그 손수건 비싼 것 같은데 그런 걸로 닦아도 괜찮아? 더러워질텐데....”
“빨면 되지, 뭐. 넌 또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
대수롭지 않게 젖은 손수건을 흔들면서 디트에한이 키득대었다. 다른 친구들도 함께 낄낄대면서 웃었다. 다시 잔을 든 것은 누샨이었다.
“야, 그런데 왜 우리 빼고 너희 둘만 짠 하냐? 우리랑도 짠 해야지!”
“짜안~!”
7개의 잔이 동시에 맞부딪혔다. 소란스럽던 술집에 약간의 소란을 더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시껄렁한 농담이 날아다니고, 웃음소리가 악사의 연주처럼 끊이질 않는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과음해서 구역질 소리가 나면, 술집의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야유질을 한다.
“우웨에엑.”
“우우~”
“머저리!”
청결과는 거리가 있고, 고상과는 더더욱 거리가 있었지만 플라니아는 그 모든 것이 편하게만 느껴졌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훈련은 힘들었고, 던전에 들어갈 때는 며칠 간 씻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플라니아는 지금이 훨씬 살아있는 것 같았다. 세 번째로 구역질을 한 셈리흐의 친구에게 야유가 쏟아질 때쯤, 누샨이 입을 열었다.
“디트에한, 넌 방학 때 뭐할거야?”
누샨의 말라붙어가는 피 같은 붉은 색 눈동자가 고요히 디트에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입가엔 분명 장난기를 남겨두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아니었다. 유쾌한 척하던 왕의 눈에 가까웠다. 플라니아는 누샨을 경계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글쎄, 뭐하지. 할 건 딱히 없는데. 아마 작년처럼 그냥 집에 박혀있지 않을까?”
“그럼 나랑 아인 밖에 안 남아있는거야? 너희들 다 집으로 가? 플라니아, 너는?”
“아니, 나도 남아있을건데.”
플라니아는 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그런 집구석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곳은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었다. 친해지지 얼마 되지 않은, 왕과 비슷한 누샨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누샨은 친구를 소중히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남아있을 예정. 체스터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연구 보조를 하지 않을까 싶어.”
쇼우가 입 주변 기름을 닦으면서 손을 들었다. 학교에 남아있기로 한 것은 쇼우, 누샨, 에인헤랴르, 플라니아로 총 4명이었다.
“그러면 셀시, 편지할게!”
“편지?”
흔쾌하게 알았다고 할 줄 알았던 셰레샤이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떻게 할지 몰라 굴렸다. 친해진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플라니아는 조심스럽게 셰레샤이데에게 확인했다.
“편지하는 건 좀 그런가?”
“아니요!”
무안할 정도로의 엄청난 속도로 셰레샤이데가 외쳤다.
“꼭, 꼭 해야해요! 방학 때, 저랑 편지해요!”
호박빛의 눈동자가 꿀 같이 반짝거렸다. 셰레샤이데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방학이 되었다.
“공주님, 저한테 꼭 편지하는 거 잊으시면 안돼요!”
학교를 떠나는 날, 셰레샤이데는 몇 번이고 다시 말하면서 편지를 해달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플라니아는 알았다고 하면서 셰레샤이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셰레샤이데는 고양이처럼 플라니아의 손에 머리를 부비적대었다.
“잘 지내야 해.”
“당연하죠.”
플라니아는 종종 셰레샤이데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였다. 방학 동안 플라니아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렸다. 주로 어울렸던 건 누샨이었다. 누샨은 보통 플라니아를 부를 때 이상하게 부르고는 했는데,
“야, 공주님! 검술 수련해야지!”
존중과 건방짐이 동시에 들어있었다. 고귀함을 뜻하는 검은색 피부와 곧게 올라간 코, 벌어진 어깨, 붉은색 눈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오만하면서도 소탈한 누샨은 친근하고도 쾌활했다. 홀로 할 것 없이 기숙사 방에 누워있는 플라니아를 불러 검술을 가르쳐주었다.
“야, 공주님. 검을 쥘 때 엉덩이를 그렇게 뒤로 빼면 안돼. 균형이 무너져.”
“그런데 누샨, 내가 왜 검술을 배워야 하는데?”
“빈 틈!”
누샨이 손에 쥔 장검으로 찔러들어왔다. 눈으로 보이는 큰 동작으로, 속도를 줄여서 들어오는 누샨의 검은 딱 플라니아가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거나 쳐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번은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플라니아가 쥐고 있던 목검이 날아가 대련장에 꽂혔다.
“헛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되는거야, 공주님. 검을 쥔 상대가 있다면 다른 것에 정신 팔지 말고 눈 앞의 상대에게만 집중해.”
플라니아는 방학이 시작한 이후 일주일 간 누샨이 하자는대로 맞춰주었지만, 슬슬 지치고 있었다. 누샨은 플라니아가 초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플라니아는 드러누워 투덜대었다.
“난 왜 내가 이렇게 검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어.”
누샨은 짧게 대꾸했다.
“난 네가 쉽게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차피 셀시가 지켜준다고 했으니까 괜찮은거 아니야? 난 셀시를 믿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대답하자, 누샨이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건 믿는다는게 아냐, 공주님. 미룬다고 하는거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고, 이미 셀시는 공주님 대신 많은 대가를 치렀어. 설마, 우리가 쓰는 달 베흐가 아무런 조건 없이 기적을 이뤄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몰랐어.”
“이젠 알았으니까 더는 도망갈 핑계 못대겠네? 그리고, 셀시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거야.”
플라니아는 더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으로 내뱉는 대신, 목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서 다시 한 번 누샨의 검을 막았다. 누샨의 얼굴에 희열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좋아, 그래야지.....!”
누샨과 검을 주고 받는 동안, 플라니아는 빠른 속도로 실력을 올릴 수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방학이 끝나고 돌아온 셰레샤이데가 지켜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정도였다. 셰레샤이데는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 모습을 보자 오히려 플라니아는 강해지기를 잘했다고 느꼈다.
“그나저나, 편지엔 왜 답장을 안해준거야! 편지 한다면서!”
“편지를.... 했었어요?”
“거기에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도 적었거든? 한 10통은 보냈을거야. 정말로 단 한 통도 못 받았어?”
“편지.... 받았다면 보냈을거에요. 답장..... 미안해요.”
시무룩한 셰레샤이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플라니아는 그냥 웃어넘겼다.
“강해진 내가 봐주지.”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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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걔네 집은 원래 좀 그래. 편지를 해도 어디선가 빼돌리나봐. 나도 방학 때 몇 번 부친 적 있는데 답장이 온 적은 한 번 빼고 없었어.”
디트에한이 턱을 긁으면서 한숨쉬었다. 술 대신 주스를 마시면서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플라니아는 답장이 왔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답장이 온 적이 한 번은 있었어?”
“응. 걔네 집으로 혼담 넣었을 때. 셀시 어머님은 기뻐하시더라고.”
“세상에. 비열한 자식.”
플라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보니 디트에한은 오랜 짝사랑을 한 것 치고는 꽤나 적극적이었다. 셰레샤이데에게 정식으로 혼담을 넣은 것이었다. 그 혼담은 심지어 거의 성사되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셀시를 독차지 하려고 했단 말이야?”
“......진심이었으니까. 그런 비겁한 수라도 쓸만큼, 셀시는 나에게 소중했어.”
디트에한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약혼도 이제는 옛 이야기다. 갑자기 약혼 관계가 된 디트에한과 셰레샤이데는 어느 날 기별도 없이 약혼을 파기해버렸다. 그 일의 전말을, 플라니아는 한 번도 알지 못했다. 플라니아는 그 때, 셰레샤이데와 디트에한 양쪽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너희 약혼은 왜 깨졌던거야? 기왕 그렇게 된 거, 난 너희들이 잘 살았으면 했는데.”
하지만 지금이라면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놓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 셰레샤이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디트에한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입을 닫았다. 플라니아는 놓치지 않고 마저 추궁했다. 디트에한은 마른 세수를 거듭하면서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갑자기 별빛 정원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불청객만 아니었다면 디트에한은 틀림 없이 입을 떼었을 것이다.
“뭐야, 공주님. 디트에한도 있었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
다부졌던 몸은 한층 더 단련되어 단단해보였다. 고귀함을 뜻하는 검은색 피부와 붉은색 눈에는 타고난 위엄이란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위엄과는 반대로, 가벼운 말투로 말을 던져왔다. 플라니아는 그를 잘 알았다.
“누샨.”
이름을 부르자 그의 얼굴이 펴졌다.
“오랜만이야, 공주님. 보고 싶었어.”
과한 친밀감에 부담스러워진 플라니아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어서 와, 누샨. 우린 셀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래? 디테 저 겁쟁이가 드디어 용기를 낸 모양이네?”
쾌활하게 웃는 누샨과는 반대로, 디트에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플라니아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떠보았다.
“그치, 곧 있으면 들을 수 있을텐데. 네가 와버려서 입을 닫아버렸잖아.”
“그래? 그럼 내가 말하지 뭐. 괜찮지, 디테?”
누샨은 히죽 웃으면서 디트에한 쪽을 보았다. 디트에한은 창백해진 얼굴 그대로 손을 깍지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손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뭔데, 뭔데 그러는데?”
“공주님, 너 말이야. 그림이랑 친구였다고 했지. 편지도 주고 받고 했었던 거, 그거 공주님 너였지.”
“응.”
“행방불명되었다고 했던 그림이, 실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어?”
새로운 사실도 아니었다. 이미 전 날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알게 되었던 사실이었던 것이다. 플라니아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디테가 말해줬지. 그런데 너 셀시에 대해서 말해준다며.”
“말하고 있잖아, 지금.”
“그림이랑 셀시랑 무슨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 있지. 그림을 죽인 게 바로 셀시였으니까.”
플라니아는 디트에한 쪽을 바라보았다. 피하는 시선이 누샨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누샨은 태연한 얼굴 그대로 플라니아를 바라보면서, 마저 말을 내뱉었다.
“셀시가 그림을 살해했어.”
셀시와 살해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 사이에 그림이라는 이름이 들어간다면 한층 더 이상해졌다. 플라니아는 누샨이 끔찍한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샨의 얼굴에 장난기는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플라니아는 작은 목소리로 가장 납득할 수 있는 질문을 꺼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어?”
“그야, 모르지. 나도.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뭘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림이 죽던 날, 가장 먼저 현장을 발견한 게 나였어.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지. 그림은 이미 절벽 아래 강에 떠내려가고 있었어. 그 때 내가 본 걸, 아직도 기억해.”
누샨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진저리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셀시, 걘, 그림을 죽여놓고도 웃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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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석 산 호의 선장, 플라니아 플레타와 주정뱅이 디트에한 네르딘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평선의 지배자 누샨 르 레이가 도착했다.
감춰졌던 추악한 비밀 한 개가 드러났다.
아직 비밀은 6개가 더 남았다.
작가의 말
여기서 끊어버리기!
원래 감질맛 나는데서 끊어야 맛있죠.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남자가 시작부터 죽어있고, 그 남자를 살해한 게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판이다(?)
여기까지 드러나게 해놓고, 저는 한 동안 쉬러갑니당....
많이는 아니고, 조만간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닫기저주에 걸린 장미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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