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에한 네르딘에 대해(5)
조회 : 909 추천 : 0 글자수 : 5,480 자 2022-09-22
“그러면 셀시가 도착할 때까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단 말이야?”
“응. 셀시가 나중에 말해주기로는 그 때의 나는 꽤나 정신을 놓고 있긴 했나봐. 셀시가 하던 말도 못 듣고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싫어하지 말아달라고 빌고 있었다는데.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네.”
“환상 속 내가 꽤나 약올렸나보다.”
“말도 마.”
디트에한은 고개를 저으며 야식으로 나온 꼬치를 집어들었다. 종업원도 다 퇴근한 시간, 디트에한과 플라니아가 앉은 자리만 촛불로 밝혀지고 있었다.
“그래서 셀시는 어떻게 널 깨웠는데?”
“주먹으로 얼굴을 뭉개놨어. 한 동안 부어올라서 감자 같은 얼굴로 다녔잖아.”
“그래? 날 깨울 땐 그냥 물만 끼얹던데.”
“젠장. 셀시 걔 은근 남녀차별 심하다니까.”
ㅡㅡㅡㅡㅡㅡ
“정신 차려!”
환상 속에서 셰레샤이데의 매도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볼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셰레샤이데는 잔뜩 화난 상태였다.
“정신 차리라고, 디트에한 네르딘!”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왔다. 아찔하게 귀 한쪽이 먹먹해졌다. 셰레샤이데는 붉어진 눈으로 디트에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셀시, 난......”
“네가 어쩌든 난 널 혐오하지 않는다고, 멍청아!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
셰레샤이데가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올렸다. 세 번째 맞기는 싫었기에, 디트에한은 깜박임을 뽑아들고 점멸했다. 그러자 셰레샤이데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다행이다. 널 언제까지 때려야하나 고민했어.”
“셀시? 진짜 셀시야?”
“그래, 진짜 나야. 악몽에선 좀 깼어?”
디트에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셰레샤이데는 걱정된다는 듯이 얼굴을 들이댔지만 디트에한은 좀처럼 그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아까 봤던 환상이 적나라하기도 했고, 다시 셰레샤이데가 다정하게 다가온다면 당장이라도 껴안고 입 맞추고 싶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셰레샤이데 아스텔.”
거리를 두고서 오랜만에 셰레샤이데의 이름을 불렀다. 셰레샤이데는 당황하지 않고 그저 다정하게 대답했다.
“응. 나 여기있어.”
“그 말 진짜야?”
“어떤 말?”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날 혐오하지 않겠다는 말.”
디트에한은 명확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환상 속에서 봤던 표정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이더라도 셰레샤이데가 대답만 해준다면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
“내가 혐오할 수 있긴 할까?”
셰레샤이데의 대답은 애매했다. 디트에한은 뒤돌아서는 셰레샤이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대답해줘.”
“디테.”
셰레샤이데는 뭔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어. 나도 있고. 내 비밀을 알게 되면 너도 나를 미워할지도 몰라.”
“미워 안해. 안 미워해. 그러니까 너도 날 미워하지 마.”
“그래.”
디트에한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안도에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짐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 깜박임을 고쳐잡았다.
“내가 앞장 설테니 따라와.”
“그래, 그래. 난 공주님 깨워서 가도 돼?”
“그러던가.”
공주님이란 말에 잠깐 멈칫 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사실을 깨닫고 디트에한은 미소지었다. 플라니아보다 디트에한 자신이 먼저였다는 것에, 이상한 우월감이 들었다. 흐느끼다가 셰레샤이데를 붙잡고 오열하는 플라니아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앞만 보고 걷자, 어렵지 않게 쇼우를 찾을 수 있었다.
“개새끼들아, 내가 마탑주가 되면 너네들 멀쩡하게 죽일 줄 알아? 다 반쯤 말려서 실험 재료로 써주지!”
눈이 벌게진 채로 허공을 노려보는 쇼우는 살벌했다. 독기가 가득 어린 그 눈에는 엄청난 증오가 있었다. 분명 디트에한이 겪은 환상처럼 끔찍한 악몽 속을 헤메고 있을 것이었다. 쇼우가 주머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내들었다. 걸리면 곤란한 능력을 가진 달 베흐, 배신자의 창고열쇠였다.
‘내가 저런 모습이었단 말이야?’
디트에한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깜박임을 자루에서 뽑아들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짧은 틈에 쇼우의 뒤로 이동한 디트에한은 바로 검집채로 쇼우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기절시킬 요량이었다.
“가만 안둬어....!”
핏줄이 터진 눈알로 노려보는 쇼우를 보며, 디트에한은 기겁하면서 한 대 더 내리쳤다.
“미안하다, 좀 기절해 있어라.”
다른 달 베흐라면 몰라도, 배신자의 창고열쇠는 걸리면 위험했다. 디트에한은 짧게 사과하며 다시 깜박임을 꺼냈다가 집어넣었다. 이번에 이동한 곳은 쇼우의 앞이었다. 이동하자마자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마법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는 쇼우였지만 근접전은 약했으므로 거리와 시간을 주면 안된다는 판단 아래였다.
“커헉....!”
기절한 쇼우를 둘러메고, 디트에한은 플라니아와 셰레샤이데를 기다렸다. 진정된 것으로 보이는 플라니아와 셰레샤이데가 긴장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플라니아, 괜찮아?”
질투 없이 본 플라니아는 여우 같은 계집도 멍청한 계집도 아니었다. 미운 감정을 걷어내고 본 플라니아는 그저 평범한 여자애였다. 결혼이 싫어서 도망 온 것은 그만큼 결혼을 괴롭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디트에한에게 디트에한만의 괴로움이 있다면, 플라니아 역시 그랬을 것이다. 오히려 플라니아는 자신이 방해가 될까봐 노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디트에한은 순수하게 플라니아를 걱정할 수 있었다.
“괜찮, 괜찮아. 내가, 뭘 하면 될까?”
히끅이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으려는 플라니아는 대단해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플라니아. 쇼우를 돌봐줄 수 있어? 쇼우가 깨어나면, 함께 다른 애들을 찾아서 깨워줘. 배신자의 창고열쇠가 있다면 위험하진 않을테니까.”
“응, 응.”
“셀시, 너는 나랑 함께 가자.”
“그래, 공주님은 잘 할거야. 공주님, 저랑 디테가 다 공략하고 올테니 걱정 마세요.”
“걱정 마, 셀시. 나도 잘 하지는 못했지만 수업도 열심히 들었어!”
애써 미소지으면서 플라니아는 손을 흔들었다. 지친 플라니아와 기절한 쇼우를 뒤에 두고, 셰레샤이데와 디트에한은 양 옆을 경계하면서 던전의 심부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디트에한은 후회했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 셀시.”
“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혐오하지 않는다니까.”
“그, 그, 그게 아냐.”
“그럼 뭔데?”
시선은 여전히 앞에 고정한 채로, 셰레샤이데가 어깨를 으쓱였다.
“넌 어떻게 그 환상에서 빠져나왔어?”
“알잖아. 몽환 던전은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빠져나올 수 있는거.”
“말은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앞에 봤던 게 환상인 걸 알면서도 네가 내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을 때까지 못 빠져 나왔는데. 비결이 있는지 궁금해서.”
“그건 좀 말하기 부끄러운데.”
셰레샤이데가 불편한 듯 입을 삐죽였다.
“미안. 그러면 안 물어볼게.”
“아냐, 말해줄게. 다시 네가 함정에 걸리면 곤란하니까. 대신 듣고 놀리면 안된다?”
던전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길은 좁고 어두워졌다. 속삭임과 숨소리조차 크게 의식되는 정도였다. 그 길 사이에서 셰레샤이데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므슈슈를 생각했어.”
“카므슈슈라면, 얼마 전에 먹었던 그 디저트?”
셰레샤이데의 볼이 발그스레해진 것이 야광석에 비춰지는 빛인지, 아니면 얼굴에 열이 몰려 일어난 빛인지 헷갈렸다. 디트에한은 고개를 내려 셰레샤이데의 대답을 들었다. 셰레샤이데는 여전히 정면을 경계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쩐지, 정면을 주시하는 눈에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응. 내 악몽 속에서, 카므슈슈를 생각했어. 다시 한 번 너희랑 그 가게에 가서 즐겁게 카므슈슈를 먹는 기억을 떠올렸어. 그러니까 악몽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
“푸흐....”
악몽에서 깨어난 것이 고작 그런 보잘 것 없는 순간이라니. 너무나도 셰레샤이데다웠다. 웃음이 새어나가자, 셰레샤이데가 새침하게 디트에한을 노려보았다.
“안 놀린다며.”
“안 웃는다고는 안했는데?”
디트에한은 마저 웃었다. 셰레샤이데가 뾰로통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트에한은 시원하게 웃어제꼈다. 유쾌한 기분이었다.
“하하하하하.....”
“아, 웃지 마! 뭐가 웃겨!”
디트에한은 유쾌한 기분으로 셰레샤이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친 머릿결이 디트에한의 손 아래에서 이지러져 부스스해졌다. 셰레샤이데는 얼굴을 있는 힘껏 찡그리며 디트에한의 손을 쳐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셰레샤이데의 동그란 얼굴 위에는 새둥지가 하나 얹힌 상태였다.
“야, 던전 공략이나 제대로 해.”
새의 보금자리를 이고, 셰레샤이데는 불퉁한 상태로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디트에한도 그에 속도를 맞추어 달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던전의 심부에 도착했다. 연안이라는 등급에 맞게 던전은 깊지도 않았고, 더 이상의 함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돌려줘. 돌려줘.]
피눈물을 흘리는 쌍둥이 석상이 말을 개어내고 있었다. 빠르게 시선 교환을 마친 셰레샤이데와 디트에한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달 베흐를 들어올렸다.
셰레샤이데의 피를 먹는 뱀은 무거운 검풍을 일으키고, 디트에한의 깜박임은 예리하고 신속하게 바람 사이를 스쳤다. 그 다음 순간, 쌍둥이 석상이 꿰뚫리며 동시에 부서졌다. 붉고 푸른 구슬이 또그락 소리를 내며 굴러나왔다.
“가자, 악몽이 끝났네.”
셰레샤이데가 디트에한이 내민 손바닥에 맞 손뼉을 쳤다. 디트에한은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카므슈슈를 먹으러 가야지.”
“너....! 놀리지 말라고 했지!”
화가 나서 달려드는 셰레샤이데를 깜박임의 점멸로 피하며, 디트에한은 악몽에서 막 깨어난 다른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깨어난 쇼우가 배신자의 창고열쇠를 활용해서 모두 깨운 상태였다. 그렇게 플라니아와 함께하는 첫 던전 공략은 나쁘지 않게 성공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 먹은 양꼬치 접시 옆, 먹다 만 카므슈슈를 보며 디트에한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 때 생각했어. 내가 셀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뭐든,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디트에한......"
"들키지 않는다면, 셀시가 카므슈슈를 먹던 작은 기억에 행복을 떠올리는 것처럼, 나도 그 애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행복을 떠올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식어버린 카므슈슈는 처음처럼 달콤하지 않다. 자각하지도 못했던 오랜 첫사랑도 그랬다. 깨달았을 때엔 이미 씁쓸하게 변해있었다.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쓰기만 해서, 괴로워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디트에한은 기꺼이 그 괴로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래도록 놓지 못했다.
"셀시, 이 자리에 올까? 다시 한 번 나를 만나러 올까?"
디트에한은 눈을 가리면서 목을 뒤로 젖혔다. 플라니아는 디트에한의 손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것 같아서, 대답 대신 술을 따라주었다.
“응. 셀시가 나중에 말해주기로는 그 때의 나는 꽤나 정신을 놓고 있긴 했나봐. 셀시가 하던 말도 못 듣고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싫어하지 말아달라고 빌고 있었다는데.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네.”
“환상 속 내가 꽤나 약올렸나보다.”
“말도 마.”
디트에한은 고개를 저으며 야식으로 나온 꼬치를 집어들었다. 종업원도 다 퇴근한 시간, 디트에한과 플라니아가 앉은 자리만 촛불로 밝혀지고 있었다.
“그래서 셀시는 어떻게 널 깨웠는데?”
“주먹으로 얼굴을 뭉개놨어. 한 동안 부어올라서 감자 같은 얼굴로 다녔잖아.”
“그래? 날 깨울 땐 그냥 물만 끼얹던데.”
“젠장. 셀시 걔 은근 남녀차별 심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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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환상 속에서 셰레샤이데의 매도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볼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셰레샤이데는 잔뜩 화난 상태였다.
“정신 차리라고, 디트에한 네르딘!”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왔다. 아찔하게 귀 한쪽이 먹먹해졌다. 셰레샤이데는 붉어진 눈으로 디트에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셀시, 난......”
“네가 어쩌든 난 널 혐오하지 않는다고, 멍청아!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
셰레샤이데가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올렸다. 세 번째 맞기는 싫었기에, 디트에한은 깜박임을 뽑아들고 점멸했다. 그러자 셰레샤이데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다행이다. 널 언제까지 때려야하나 고민했어.”
“셀시? 진짜 셀시야?”
“그래, 진짜 나야. 악몽에선 좀 깼어?”
디트에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셰레샤이데는 걱정된다는 듯이 얼굴을 들이댔지만 디트에한은 좀처럼 그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아까 봤던 환상이 적나라하기도 했고, 다시 셰레샤이데가 다정하게 다가온다면 당장이라도 껴안고 입 맞추고 싶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셰레샤이데 아스텔.”
거리를 두고서 오랜만에 셰레샤이데의 이름을 불렀다. 셰레샤이데는 당황하지 않고 그저 다정하게 대답했다.
“응. 나 여기있어.”
“그 말 진짜야?”
“어떤 말?”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날 혐오하지 않겠다는 말.”
디트에한은 명확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환상 속에서 봤던 표정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이더라도 셰레샤이데가 대답만 해준다면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
“내가 혐오할 수 있긴 할까?”
셰레샤이데의 대답은 애매했다. 디트에한은 뒤돌아서는 셰레샤이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대답해줘.”
“디테.”
셰레샤이데는 뭔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어. 나도 있고. 내 비밀을 알게 되면 너도 나를 미워할지도 몰라.”
“미워 안해. 안 미워해. 그러니까 너도 날 미워하지 마.”
“그래.”
디트에한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안도에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짐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 깜박임을 고쳐잡았다.
“내가 앞장 설테니 따라와.”
“그래, 그래. 난 공주님 깨워서 가도 돼?”
“그러던가.”
공주님이란 말에 잠깐 멈칫 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사실을 깨닫고 디트에한은 미소지었다. 플라니아보다 디트에한 자신이 먼저였다는 것에, 이상한 우월감이 들었다. 흐느끼다가 셰레샤이데를 붙잡고 오열하는 플라니아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앞만 보고 걷자, 어렵지 않게 쇼우를 찾을 수 있었다.
“개새끼들아, 내가 마탑주가 되면 너네들 멀쩡하게 죽일 줄 알아? 다 반쯤 말려서 실험 재료로 써주지!”
눈이 벌게진 채로 허공을 노려보는 쇼우는 살벌했다. 독기가 가득 어린 그 눈에는 엄청난 증오가 있었다. 분명 디트에한이 겪은 환상처럼 끔찍한 악몽 속을 헤메고 있을 것이었다. 쇼우가 주머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내들었다. 걸리면 곤란한 능력을 가진 달 베흐, 배신자의 창고열쇠였다.
‘내가 저런 모습이었단 말이야?’
디트에한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깜박임을 자루에서 뽑아들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짧은 틈에 쇼우의 뒤로 이동한 디트에한은 바로 검집채로 쇼우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기절시킬 요량이었다.
“가만 안둬어....!”
핏줄이 터진 눈알로 노려보는 쇼우를 보며, 디트에한은 기겁하면서 한 대 더 내리쳤다.
“미안하다, 좀 기절해 있어라.”
다른 달 베흐라면 몰라도, 배신자의 창고열쇠는 걸리면 위험했다. 디트에한은 짧게 사과하며 다시 깜박임을 꺼냈다가 집어넣었다. 이번에 이동한 곳은 쇼우의 앞이었다. 이동하자마자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마법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는 쇼우였지만 근접전은 약했으므로 거리와 시간을 주면 안된다는 판단 아래였다.
“커헉....!”
기절한 쇼우를 둘러메고, 디트에한은 플라니아와 셰레샤이데를 기다렸다. 진정된 것으로 보이는 플라니아와 셰레샤이데가 긴장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플라니아, 괜찮아?”
질투 없이 본 플라니아는 여우 같은 계집도 멍청한 계집도 아니었다. 미운 감정을 걷어내고 본 플라니아는 그저 평범한 여자애였다. 결혼이 싫어서 도망 온 것은 그만큼 결혼을 괴롭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디트에한에게 디트에한만의 괴로움이 있다면, 플라니아 역시 그랬을 것이다. 오히려 플라니아는 자신이 방해가 될까봐 노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디트에한은 순수하게 플라니아를 걱정할 수 있었다.
“괜찮, 괜찮아. 내가, 뭘 하면 될까?”
히끅이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으려는 플라니아는 대단해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플라니아. 쇼우를 돌봐줄 수 있어? 쇼우가 깨어나면, 함께 다른 애들을 찾아서 깨워줘. 배신자의 창고열쇠가 있다면 위험하진 않을테니까.”
“응, 응.”
“셀시, 너는 나랑 함께 가자.”
“그래, 공주님은 잘 할거야. 공주님, 저랑 디테가 다 공략하고 올테니 걱정 마세요.”
“걱정 마, 셀시. 나도 잘 하지는 못했지만 수업도 열심히 들었어!”
애써 미소지으면서 플라니아는 손을 흔들었다. 지친 플라니아와 기절한 쇼우를 뒤에 두고, 셰레샤이데와 디트에한은 양 옆을 경계하면서 던전의 심부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디트에한은 후회했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 셀시.”
“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혐오하지 않는다니까.”
“그, 그, 그게 아냐.”
“그럼 뭔데?”
시선은 여전히 앞에 고정한 채로, 셰레샤이데가 어깨를 으쓱였다.
“넌 어떻게 그 환상에서 빠져나왔어?”
“알잖아. 몽환 던전은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빠져나올 수 있는거.”
“말은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앞에 봤던 게 환상인 걸 알면서도 네가 내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을 때까지 못 빠져 나왔는데. 비결이 있는지 궁금해서.”
“그건 좀 말하기 부끄러운데.”
셰레샤이데가 불편한 듯 입을 삐죽였다.
“미안. 그러면 안 물어볼게.”
“아냐, 말해줄게. 다시 네가 함정에 걸리면 곤란하니까. 대신 듣고 놀리면 안된다?”
던전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길은 좁고 어두워졌다. 속삭임과 숨소리조차 크게 의식되는 정도였다. 그 길 사이에서 셰레샤이데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므슈슈를 생각했어.”
“카므슈슈라면, 얼마 전에 먹었던 그 디저트?”
셰레샤이데의 볼이 발그스레해진 것이 야광석에 비춰지는 빛인지, 아니면 얼굴에 열이 몰려 일어난 빛인지 헷갈렸다. 디트에한은 고개를 내려 셰레샤이데의 대답을 들었다. 셰레샤이데는 여전히 정면을 경계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쩐지, 정면을 주시하는 눈에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응. 내 악몽 속에서, 카므슈슈를 생각했어. 다시 한 번 너희랑 그 가게에 가서 즐겁게 카므슈슈를 먹는 기억을 떠올렸어. 그러니까 악몽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
“푸흐....”
악몽에서 깨어난 것이 고작 그런 보잘 것 없는 순간이라니. 너무나도 셰레샤이데다웠다. 웃음이 새어나가자, 셰레샤이데가 새침하게 디트에한을 노려보았다.
“안 놀린다며.”
“안 웃는다고는 안했는데?”
디트에한은 마저 웃었다. 셰레샤이데가 뾰로통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트에한은 시원하게 웃어제꼈다. 유쾌한 기분이었다.
“하하하하하.....”
“아, 웃지 마! 뭐가 웃겨!”
디트에한은 유쾌한 기분으로 셰레샤이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친 머릿결이 디트에한의 손 아래에서 이지러져 부스스해졌다. 셰레샤이데는 얼굴을 있는 힘껏 찡그리며 디트에한의 손을 쳐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셰레샤이데의 동그란 얼굴 위에는 새둥지가 하나 얹힌 상태였다.
“야, 던전 공략이나 제대로 해.”
새의 보금자리를 이고, 셰레샤이데는 불퉁한 상태로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디트에한도 그에 속도를 맞추어 달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던전의 심부에 도착했다. 연안이라는 등급에 맞게 던전은 깊지도 않았고, 더 이상의 함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돌려줘. 돌려줘.]
피눈물을 흘리는 쌍둥이 석상이 말을 개어내고 있었다. 빠르게 시선 교환을 마친 셰레샤이데와 디트에한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달 베흐를 들어올렸다.
셰레샤이데의 피를 먹는 뱀은 무거운 검풍을 일으키고, 디트에한의 깜박임은 예리하고 신속하게 바람 사이를 스쳤다. 그 다음 순간, 쌍둥이 석상이 꿰뚫리며 동시에 부서졌다. 붉고 푸른 구슬이 또그락 소리를 내며 굴러나왔다.
“가자, 악몽이 끝났네.”
셰레샤이데가 디트에한이 내민 손바닥에 맞 손뼉을 쳤다. 디트에한은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카므슈슈를 먹으러 가야지.”
“너....! 놀리지 말라고 했지!”
화가 나서 달려드는 셰레샤이데를 깜박임의 점멸로 피하며, 디트에한은 악몽에서 막 깨어난 다른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깨어난 쇼우가 배신자의 창고열쇠를 활용해서 모두 깨운 상태였다. 그렇게 플라니아와 함께하는 첫 던전 공략은 나쁘지 않게 성공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 먹은 양꼬치 접시 옆, 먹다 만 카므슈슈를 보며 디트에한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 때 생각했어. 내가 셀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뭐든,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디트에한......"
"들키지 않는다면, 셀시가 카므슈슈를 먹던 작은 기억에 행복을 떠올리는 것처럼, 나도 그 애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행복을 떠올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식어버린 카므슈슈는 처음처럼 달콤하지 않다. 자각하지도 못했던 오랜 첫사랑도 그랬다. 깨달았을 때엔 이미 씁쓸하게 변해있었다.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쓰기만 해서, 괴로워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디트에한은 기꺼이 그 괴로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래도록 놓지 못했다.
"셀시, 이 자리에 올까? 다시 한 번 나를 만나러 올까?"
디트에한은 눈을 가리면서 목을 뒤로 젖혔다. 플라니아는 디트에한의 손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것 같아서, 대답 대신 술을 따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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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저주에 걸린 장미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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