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에한 네르딘에 대해(6)
조회 : 1,121 추천 : 0 글자수 : 4,437 자 2022-09-23
좋아하는 마음은 억누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결론 내렸지만, 갈 수록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가 거북해지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예쁘장한 얼굴이 점점 여자로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디테. 너 요즘 이상하다. 혹시 나한테 잘못한 거 있어?”
“없어. 없거든?”
“그럼 왜 이렇게 피해다니실까아?”
“그건 네 착각 아닐까?”
“그래? 나 카페 갈건데, 나랑 같이 나갈래?”
“아니?”
“공주님이랑, 누샨도 같이 갈 건데.”
“그럼 갈래.”
“이것 봐. 나 피하는 것 맞으면서.”
“아니거든. 플라니아에게 관심있어서 그런거야.”
“흐음. 내가 공주님에게 들은 것과는 다른데?”
“플라니아가 뭐라고 했는데?”
“공주님이 그러길,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어. 그런데 그게 공주님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셰레샤이데가 훌쩍 다가와 얼굴을 들이대었다. 고양이처럼 입꼬리가 올라가 웃는 셰레샤이데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디트에한의 등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플라니아가 어떻게 디트에한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도 이상하고, 어디까지 알고 셰레샤이데에게 말을 흘린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디트에한은 긴장하며 몸을 딱딱히 굳혔다.
“누구야?”
졸지에 시야에 셰레샤이데의 노을색 눈이 가득 찬 디트에한은 기겁하면서 물러났다.
“악!”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진짜 누굴 좋아하게 됐어? 나한테만 슬쩍 말해주면 안돼?”
여전히 고양이처럼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꾹꾹 찔러왔다.
“절대 그럴 일 없을거다! 좀 떨어져.”
장난스럽게 추궁하는 셰레샤이데의 얼굴을 미는 디트에한의 속이 울렁거렸다. 셰레샤이데의 속눈썹이 깜박일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났다. 감정을 자각하면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자꾸 셰레샤이데가 여자처럼 보였다. 스스로도 미친 놈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궁금하니까 그렇지. 알려주면 안돼?”
“맞아, 좋아하는 애가 생겼어. 그런데 알려주지는 않을거니까 좀 떨어져.”
“그래그래.”
셰레샤이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디트에한에게 멀어져줬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는 디트에한에게, 셰레샤이데는 마지막으로 무거운 말을 날렸다.
“디테, 난 그 사랑 응원한다!”
엄지를 척 치켜올리면서, 눈을 빛내는 셰레샤이데는 무심하게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가장 마음 아픈 점은 셰레샤이데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그 애는 분명 좋은 애겠지? 나랑 애들은 빠져줄테니까 꼭 데이트도 하고 그래! 우리 던전 배정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데이트 하려면 지금 해야할거야. 애들한테는 내가 말해놓을게!”
“어, 그래. 고맙다.”
“그럼 난 공주님이랑 카페 가러 갈게!”
“그런데 셀시, 난 네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어.”
“응?”
“네 도움 따위 없어도 되니까 함부러 나서지 말란 소리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찌질하고 보기 힘겨운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쓸데 없는 자존심은, 가시 돋친 말로 바뀌어 튀어나왔다. 셰레샤이데가 디트에한을 생각해서 해준 말임을 알고, 디트에한도 좋아하는 것이 셰레샤이데라는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니 친구를 좋아하는 셰레샤이데로서는 이런 반응이 당연할텐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아, 그게 기분 나쁠 줄은 몰랐네. 미안하다. 내 도움 없어도 너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사과하는 셰레샤이데가 자리를 뜨는데도, 디트에한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온갖 생각이 밀려나왔다. 디트에한은 결국 며칠 뒤 던전이 배정되어 떠날 때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누워있기로 했다. 셰레샤이데는 몇 번인가 기숙사 문 앞에 서성거렸지만, 디트에한은 노크를 못 들은 척하고 그대로 이불 속에 박혀서 나가질 않았다.
“아, 디트에한 병신아. 실연 당했냐?”
기숙사의 문이 부서졌다. 망가진 문의 잔해 너머에서 누샨이 낄낄대었다. 그 옆에서 레믈롯이 부서진 문에서 나온 톱밥 먼지를 손바닥으로 날려보내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게 디테, 다들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니들이 뭘 알아, 시발.....”
디트에한은 눈물을 쏟아내며 이불 속으로 더 파고 들었지만 녹록치는 않았다.
“여기 이불 빨래는 하고 사냐.”
불쑥 나타난 에인헤랴르가 이불채로 디트에한을 들어올려 이불을 탈탈 털었다. 졸지에 이불에서 털려 나온 디트에한은 공중에서 세 바퀴정도 돈 다음에 형편 없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디트에한은 그대로 엎어졌다.
“우냐?”
“아, 그러면 우린 디테 빼고 마시자.”
“그럴까?”
“그러자.”
쇼우가 에인헤랴르가 털어낸 디트에한의 이불을 돗자리 피듯이 섬세하게 디트에한의 옆자리에 폈다. 적당한 물건은 발로 밀어내면서 자리를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앉았다. 울고 있었던 디트에한 따위는 정말로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어이가 없어진 디트에한은 엎드린 상태로 다른 놈들이 뭘하는지 살피기로 했다.
“난 식당에서 고기 좀 빼돌려 왔어. 아인, 넌 뭘 가지고 왔냐?”
“과일 치즈.”
“난 빵 챙겨오고 식기도 빌려왔어.”
“좋아좋아. 적당히 배 채우기에는 좋겠네. 레믈롯 너는 뭘 챙겨왔어?”
레믈롯이 후후 웃음을 흘렸다. 안경을 들어올리는 레믈롯의 안광이 희번득했다. 레믈롯은 평소 가지고 다니던 가방에서 길다란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경배하라.”
“역시 레믈롯. 기숙사 규정은 어기라고 있는거지. 아무렴.”
“믿었다!”
“크어어어!”
다른 놈들의 탄성과 함께 레믈롯이 묵직한 것을 내려놓았다. 레믈롯은 다시 한 번 안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무게를 잡았다.
“움브라 베노이 27년 산.”
디트에한을 제외한 방 안의 모두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레믈롯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리미티드 에디션!”
쏟아지는 박수와 함께 레믈롯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레믈롯, 우리는 믿고 있었어. 레믈롯, 이 침착하게 미친 새끼! 레믈롯, 내 사랑을 받아욧! 그 모든 찬사를 받은 레믈롯은 겸손하게도, 짧은 대꾸로 술자리를 열었다.
“그럼 모두 들자.”
디트에한이 아직도 바닥에 엎드려 있는 동안, 레믈롯은 모두의 잔을 천천히 채워주었다.
“건배사는 뭘하지?”
“그러게.”
“디트에한이 정하라고 해.”
“야, 디테. 건배사 하나 뽑아봐라.”
자신만 빼놓고 술자리를 여는 놈들에게 질린 디트에한은 여전히 엎드린 채로 짧게 대꾸했다.
“꺼져.”
“좋아, 우리 건배사는 ‘꺼져’다. 하나, 둘, 셋.”
“꺼져!”
청량하게 은 술잔이 부딪혔고, 디트에한은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디트에한은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네 내 방에서 뭐하는 건데.”
“야, 디테. 일어났어? 우리 지금 네 방에서 술자리 벌이는데 너도 같이 마실래?”
“꺼져.”
“꺼져?”
얼굴이 발개진 에인헤랴르가 피식피식 웃으며 허공에 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시 건배사를 외쳤다. 다른 친구들도 그에 호응해 모두가 잔을 들어올렸다.
“꺼져!”
다시 청량한 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귀를 막던 디트에한은 두 시간 쯤 지나자,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야!”
기분 좋게 취한 에인헤랴르, 누샨, 레믈롯, 쇼우의 대화가 뚝 멈추고, 디트에한에게 시선이 옮겨갔다. 굉장히 화난 것처럼 보인 디트에한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잔 따라봐라.”
술이 잔에 차오르고 저물어 갈 때마다 슬픔도 목구멍 너머로 밀려가는 것 같았다. 과일치즈를 좍좍 찢어 입에 넣던 디트에한은 문득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문짝이 거덜난 디트에한의 방은 곧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어찌나 즐거웠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문제는 일어났을 때에 있었다.
디트에한이 눈을 떴을 때, 디트에한은 굉장히 무거운 것에 깔려 있었다. 치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몸통을 조여들었다. 관절이 꺾이는 기분에 눈을 뜨자, 누샨이 코를 골며 다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간신히 누샨의 다리를 치우자, 디트에한은 더 한 어려움과 맞닥뜨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셰레샤이데의 생글생글한 얼굴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눈에는 빛이 없었다.
“던전 배정이 완료되었는데, 정비는 커녕 술판을 벌여? 내일 당장 가야하는데? 너네 던전 공략을 구토로 할 건 아니지? 게다가, 나를 빼고 마셨어?”
그건 배신 당한 사람의 눈이었다. 셰레샤이데는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배정된 던전의 공략을 마칠 때까지 말도 걸지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정작 더한 배신은 셰레샤이데가 저질렀다. 그래서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를 사랑하면서도 한 편으론 애증을 느꼈다.
“플라니아, 넌 셀시의 거짓말을 언제부터 알았어?”
“나야 여자니까, 너보단 빨리 알아챘지.”
“디테. 너 요즘 이상하다. 혹시 나한테 잘못한 거 있어?”
“없어. 없거든?”
“그럼 왜 이렇게 피해다니실까아?”
“그건 네 착각 아닐까?”
“그래? 나 카페 갈건데, 나랑 같이 나갈래?”
“아니?”
“공주님이랑, 누샨도 같이 갈 건데.”
“그럼 갈래.”
“이것 봐. 나 피하는 것 맞으면서.”
“아니거든. 플라니아에게 관심있어서 그런거야.”
“흐음. 내가 공주님에게 들은 것과는 다른데?”
“플라니아가 뭐라고 했는데?”
“공주님이 그러길,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어. 그런데 그게 공주님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셰레샤이데가 훌쩍 다가와 얼굴을 들이대었다. 고양이처럼 입꼬리가 올라가 웃는 셰레샤이데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디트에한의 등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플라니아가 어떻게 디트에한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도 이상하고, 어디까지 알고 셰레샤이데에게 말을 흘린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디트에한은 긴장하며 몸을 딱딱히 굳혔다.
“누구야?”
졸지에 시야에 셰레샤이데의 노을색 눈이 가득 찬 디트에한은 기겁하면서 물러났다.
“악!”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진짜 누굴 좋아하게 됐어? 나한테만 슬쩍 말해주면 안돼?”
여전히 고양이처럼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꾹꾹 찔러왔다.
“절대 그럴 일 없을거다! 좀 떨어져.”
장난스럽게 추궁하는 셰레샤이데의 얼굴을 미는 디트에한의 속이 울렁거렸다. 셰레샤이데의 속눈썹이 깜박일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났다. 감정을 자각하면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자꾸 셰레샤이데가 여자처럼 보였다. 스스로도 미친 놈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궁금하니까 그렇지. 알려주면 안돼?”
“맞아, 좋아하는 애가 생겼어. 그런데 알려주지는 않을거니까 좀 떨어져.”
“그래그래.”
셰레샤이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디트에한에게 멀어져줬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는 디트에한에게, 셰레샤이데는 마지막으로 무거운 말을 날렸다.
“디테, 난 그 사랑 응원한다!”
엄지를 척 치켜올리면서, 눈을 빛내는 셰레샤이데는 무심하게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가장 마음 아픈 점은 셰레샤이데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그 애는 분명 좋은 애겠지? 나랑 애들은 빠져줄테니까 꼭 데이트도 하고 그래! 우리 던전 배정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데이트 하려면 지금 해야할거야. 애들한테는 내가 말해놓을게!”
“어, 그래. 고맙다.”
“그럼 난 공주님이랑 카페 가러 갈게!”
“그런데 셀시, 난 네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어.”
“응?”
“네 도움 따위 없어도 되니까 함부러 나서지 말란 소리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찌질하고 보기 힘겨운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쓸데 없는 자존심은, 가시 돋친 말로 바뀌어 튀어나왔다. 셰레샤이데가 디트에한을 생각해서 해준 말임을 알고, 디트에한도 좋아하는 것이 셰레샤이데라는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니 친구를 좋아하는 셰레샤이데로서는 이런 반응이 당연할텐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아, 그게 기분 나쁠 줄은 몰랐네. 미안하다. 내 도움 없어도 너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사과하는 셰레샤이데가 자리를 뜨는데도, 디트에한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온갖 생각이 밀려나왔다. 디트에한은 결국 며칠 뒤 던전이 배정되어 떠날 때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누워있기로 했다. 셰레샤이데는 몇 번인가 기숙사 문 앞에 서성거렸지만, 디트에한은 노크를 못 들은 척하고 그대로 이불 속에 박혀서 나가질 않았다.
“아, 디트에한 병신아. 실연 당했냐?”
기숙사의 문이 부서졌다. 망가진 문의 잔해 너머에서 누샨이 낄낄대었다. 그 옆에서 레믈롯이 부서진 문에서 나온 톱밥 먼지를 손바닥으로 날려보내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게 디테, 다들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니들이 뭘 알아, 시발.....”
디트에한은 눈물을 쏟아내며 이불 속으로 더 파고 들었지만 녹록치는 않았다.
“여기 이불 빨래는 하고 사냐.”
불쑥 나타난 에인헤랴르가 이불채로 디트에한을 들어올려 이불을 탈탈 털었다. 졸지에 이불에서 털려 나온 디트에한은 공중에서 세 바퀴정도 돈 다음에 형편 없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디트에한은 그대로 엎어졌다.
“우냐?”
“아, 그러면 우린 디테 빼고 마시자.”
“그럴까?”
“그러자.”
쇼우가 에인헤랴르가 털어낸 디트에한의 이불을 돗자리 피듯이 섬세하게 디트에한의 옆자리에 폈다. 적당한 물건은 발로 밀어내면서 자리를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앉았다. 울고 있었던 디트에한 따위는 정말로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어이가 없어진 디트에한은 엎드린 상태로 다른 놈들이 뭘하는지 살피기로 했다.
“난 식당에서 고기 좀 빼돌려 왔어. 아인, 넌 뭘 가지고 왔냐?”
“과일 치즈.”
“난 빵 챙겨오고 식기도 빌려왔어.”
“좋아좋아. 적당히 배 채우기에는 좋겠네. 레믈롯 너는 뭘 챙겨왔어?”
레믈롯이 후후 웃음을 흘렸다. 안경을 들어올리는 레믈롯의 안광이 희번득했다. 레믈롯은 평소 가지고 다니던 가방에서 길다란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경배하라.”
“역시 레믈롯. 기숙사 규정은 어기라고 있는거지. 아무렴.”
“믿었다!”
“크어어어!”
다른 놈들의 탄성과 함께 레믈롯이 묵직한 것을 내려놓았다. 레믈롯은 다시 한 번 안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무게를 잡았다.
“움브라 베노이 27년 산.”
디트에한을 제외한 방 안의 모두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레믈롯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리미티드 에디션!”
쏟아지는 박수와 함께 레믈롯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레믈롯, 우리는 믿고 있었어. 레믈롯, 이 침착하게 미친 새끼! 레믈롯, 내 사랑을 받아욧! 그 모든 찬사를 받은 레믈롯은 겸손하게도, 짧은 대꾸로 술자리를 열었다.
“그럼 모두 들자.”
디트에한이 아직도 바닥에 엎드려 있는 동안, 레믈롯은 모두의 잔을 천천히 채워주었다.
“건배사는 뭘하지?”
“그러게.”
“디트에한이 정하라고 해.”
“야, 디테. 건배사 하나 뽑아봐라.”
자신만 빼놓고 술자리를 여는 놈들에게 질린 디트에한은 여전히 엎드린 채로 짧게 대꾸했다.
“꺼져.”
“좋아, 우리 건배사는 ‘꺼져’다. 하나, 둘, 셋.”
“꺼져!”
청량하게 은 술잔이 부딪혔고, 디트에한은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디트에한은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네 내 방에서 뭐하는 건데.”
“야, 디테. 일어났어? 우리 지금 네 방에서 술자리 벌이는데 너도 같이 마실래?”
“꺼져.”
“꺼져?”
얼굴이 발개진 에인헤랴르가 피식피식 웃으며 허공에 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시 건배사를 외쳤다. 다른 친구들도 그에 호응해 모두가 잔을 들어올렸다.
“꺼져!”
다시 청량한 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귀를 막던 디트에한은 두 시간 쯤 지나자,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야!”
기분 좋게 취한 에인헤랴르, 누샨, 레믈롯, 쇼우의 대화가 뚝 멈추고, 디트에한에게 시선이 옮겨갔다. 굉장히 화난 것처럼 보인 디트에한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잔 따라봐라.”
술이 잔에 차오르고 저물어 갈 때마다 슬픔도 목구멍 너머로 밀려가는 것 같았다. 과일치즈를 좍좍 찢어 입에 넣던 디트에한은 문득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문짝이 거덜난 디트에한의 방은 곧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어찌나 즐거웠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문제는 일어났을 때에 있었다.
디트에한이 눈을 떴을 때, 디트에한은 굉장히 무거운 것에 깔려 있었다. 치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몸통을 조여들었다. 관절이 꺾이는 기분에 눈을 뜨자, 누샨이 코를 골며 다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간신히 누샨의 다리를 치우자, 디트에한은 더 한 어려움과 맞닥뜨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셰레샤이데의 생글생글한 얼굴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눈에는 빛이 없었다.
“던전 배정이 완료되었는데, 정비는 커녕 술판을 벌여? 내일 당장 가야하는데? 너네 던전 공략을 구토로 할 건 아니지? 게다가, 나를 빼고 마셨어?”
그건 배신 당한 사람의 눈이었다. 셰레샤이데는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배정된 던전의 공략을 마칠 때까지 말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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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정작 더한 배신은 셰레샤이데가 저질렀다. 그래서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를 사랑하면서도 한 편으론 애증을 느꼈다.
“플라니아, 넌 셀시의 거짓말을 언제부터 알았어?”
“나야 여자니까, 너보단 빨리 알아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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