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에한 네르딘에 대해(7)
조회 : 1,283 추천 : 0 글자수 : 5,739 자 2022-09-24
과거가 없이는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재는 과거의 잔상일 수 밖에 없다. 디트에한의 초췌한 모습은 그의 후회와 식지 않는 애증으로 이루어졌다. 언제나 자신감 있게 나서고, 스스로를 무엇보다 사랑하던 그가 하루를 술과 자책으로 보내면서 자해하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었다.
셰레샤이데 아스텔.
“셀시는 거짓말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야.”
플라니아는 셰레샤이데를 처음 본 순간부터 어렴풋이 셰레샤이데를 의심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디트에한에게 말해주지 않고 변명처럼 말을 계속 덧붙였다. 플라니아가 사실을 말했을 때 디트에한이 더욱 자책할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련하겠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지금 컨디션 괜찮은 거 누구야.”
싸늘하게 내리꽂힌 말에, 에인헤랴르와 디트에한이 쭈뼛거리면서 손을 들었다. 디트에한이 상대적으로 멀쩡한데 비해, 아인은 팔을 떠는 것이 멀쩡해보이지는 않았다. 셀시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누샨, 넌?”
“나, 아직 숙취가.”
토기를 억누르면서 누샨이 입을 막았다. 셰레샤이데는 있는대로 얼굴을 구기면서 다른 애들로 시선을 옮겼다. 쇼우는 얼굴이 창백했고, 레믈롯은 간신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쇼우와 레믈롯은 원격으로 탐사, 나와 아인은 섬멸, 공주님과 디트에한, 누샨은 회수로.”
평소처럼 디테, 라고 애칭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며 외면하기까지 했다. 눈치 보던 디트에한은 마음이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누샨, 공주님을 잘 부탁해.”
“으응, 그래.”
심지어 플라니아를 부탁할 때마저도 누샨에게만 말을 걸었다.
“셀시, 나도 상태 괜찮은데.”
셰레샤이데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여전히 셰레샤이데는 디트에한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셀시는 대놓고 디트에한을 무시하고 레믈롯에게 말을 걸었다.
“레믈롯, 사전 쓸 정도의 체력은 있지?”
“응....”
“그러면 던전엔 들어가지 말고, 쇼우의 보조를 받아서 그냥 안경 초점을 맞추서 슬쩍 보고 알려줘.”
“그러면 안에 있는 이형의 존재는 파악할 수 없는데?”
“괜찮아. 그런 상태에서 들어가는게 더 말이 안된다고 봐. 그리고 던전 공략 시간은 단축하는 게 좋으니까 빨리 끝내버리자.”
“하지만 아무리 연안 등급에 가까워도 천해 등급은 천해 등급이야. 공략에 필요한 시간도 충분히 주워지는데, 좀 쉬엄쉬엄하는 게 어때?”
“미안한데, 내가 여유가 없어.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약에 문제가 생겨서.”
셰레샤이데의 말투는 굉장히 차가워져 있었다. 반대의 말을 꺼냈다간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인내심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레믈롯도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빨리 끝내는 게 낫겠네.”
“셀시, 나도 멀쩡하다니까?”
재차 말을 해보았지만 셰레샤이데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잘 보여? 직접 들어가야할 정도의 깊이야?”
레믈롯은 무시당한 디트에한을 보면서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안경을 들어올렸다. 평범한 안경은 아니었다. [누누시시의 억과사전]은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쇼우, 초점 조절을 부탁해. 음. 셀시, 전체적으로 던전은 단조로운 편이야. 타입도 물리고. 연안에 가까운 천해등급이야.”
레믈롯은 안경의 부품을 돌리며 초점을 맞추었고, 쇼우는 마법으로 레믈롯을 보조했다.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던전으로 진입 없이 탐색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 아인, 바로 출발할 수 있어?”
“응.”
에인헤랴르는 셰레샤이데의 말에 바로 도끼를 고쳐잡았다.
“그럼 가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셰레샤이데는 앞장섰고, 그 뒤를 에인헤랴르가 따랐다. 디트에한은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와~ 난 보이지도 않는다 이거지?”
“어쩔 수 없지. 먼저 쌩깐 건 너쪽이었잖아. 셀시도 너한테 그런 것 뿐이지, 뭐.”
누샨은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서 플라니아도 거들었다.
“그래, 친구라면서 왜 갑자기 그랬던건데? 셀시는 영문도 모르고 너한테 화풀이 당했잖아.”
“화풀이?”
“그래, 그게 화풀이가 아니면 뭔데? 갑자기 사람 말 무시하고, 사과도 듣지 않고, 왜인지도 알려주지 않는 게 화풀이가 아니면 뭔데?”
“그건....!”
내가 걔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 걔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앞으로도 알릴 수 없을 것이란 걸 알았어. 그 애가 다가올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난다는 걸 알았어. 점점 더 마음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어.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하면 그대로 그 애가 멀어질까봐 무서웠어.
속마음은 놀랍도록 선명했지만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디트에한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러자 플라니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넌 멍청이야, 디트에한. 계속 친구로라도 남아있고 싶으면 사과부터 해. 셀시도 널 용서하고 싶을거야. 그리고 누샨.... 난 분명 다른 애들이라도 데리고 가서 디트에한이랑 깊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을텐데?”
누샨이 딴청을 피웠다. 플라니아의 눈꼬리가 더더 올라갔다.
“누.샨?”
음절을 끊어말하며 플라니아가 누샨에게 다가갔다. 누샨은 콧등을 긁적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나는 말하려고 했지. 깊은 이야기. 그래서 문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들어갔는데에~?”
“디트에한이 엎어져서 찌질거리고 있어서 그냥 다른 애들이랑 술자리 열었지.”
“........”
“........”
“너네 친구 맞냐?”
플라니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듯이 누샨에게 다가섰다. 누샨은 눈을 내리깔면서도 슬쩍씩 뒤로 물러났다. 플라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샨에게 더 다가갔다.
“셀시는 지금 힘들거란 말이야......”
디트에한은 그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플라니아가 크게 상심해하는 모습에 플라니아가 나름대로 셰레샤이데를 아끼고 있는 것을 느끼고 나쁘지 않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디트에한. 셀시가 나오거든, 꼭 사과해. 알겠지? 셀시가 네가 한 말이 실례였고, 너한테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넌 셀시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사이를 끝내고 싶지도 않잖아.”
“맞아.”
디트에한은 짧게 플라니아의 말에 긍정했다. 플라니아의 말이 놀랍도록 전부 사실이라 부정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플라니아 넌 왜 그렇게 우리 사이를 신경쓰는거야?”
“다른 건 몰라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만은 솔직하게 전해야 해. 난 너무 늦게 알았어.”
플라니아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디트에한은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 플라니아도 똑같은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조언하는 것이겠지. 디트에한은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플라니아의 말대로,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와 인연을 끊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여전히 셀시와 친구이고 싶어.”
셰레샤이데가 나오면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사과할지도 어느 정도 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찌질하게 굴었던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셰레샤이데의 화는 누그러질 수 있게 말할 예정이었다.
‘미안해, 셀시. 내가 거지 같이 굴었지? 그건 다 내 잘못이야. 그냥 너무 심란해서 그렇게 굴었어. 네가 잘못한 건 없었어.’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예상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안 나오지?”
던전 초입에 세운 베이스 캠프에서, 디트에한은 초조하게 깜박임으로 땅을 팠다. 평상 시였다면 금방 나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불안함을 느끼면서 들어가려고 하자, 레믈롯이 막았다.
“아직이야. 구조 신호도 오지 않았고 천해 등급인 점도 감안해야해.”
“셀시가 죽기라도 하면 어쩔건데?”
“알잖아. 셀시는 왠만해선 죽지 않아. 즉사 함정에 걸렸더라도 다른 반 애들과는 달리 충분히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어. 구조한답시고 던전에 구하러 들어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역장에 휘말려 다른 애들까지 죽을 수 있으니까.”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나도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야. 셀시는 나와도 친구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네. 탐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들어간거라, 나랑 쇼우가 철야로 번갈아가면서 던전 구조를 파악 중이야. 셀시의 구조신호가 오거나, 던전 구조가 완전히 파악되기 전에는 들어가면 안돼.”
레믈롯은 안경을 들어올리면서 디트에한을 막아섰다. 밤을 샌 레믈롯의 눈에는 짙게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차분한 음성이지만, 드물게도 싸늘했다. 그렇지만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디트에한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나만 들어가면 되잖아.”
“적어도 2인 1조로 활동하는 것이 원칙인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실랑이는 계속 길어졌다. 레믈롯은 빈 틈 없이 디트에한을 경계하며 앞을 막아섰고, 디트에한은 레믈롯을 어떻게 기절시키고 들어갈지 가늠하고 있었다. 둘의 대치를 멈춘 것은 끼어든 쇼우였다.
“그럴 필요 없어.”
디트에한은 침을 삼키면서 쇼우를 보았다. 쇼우는 평소보다 더 짜증이 난 것 같은 얼굴로 종이를 흔들었다. 종이에는 완성된 던전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럼 들어가도 되는거지?”
“아니. 그럴 필요 없다고. 생명신호를 감지했을 때 셰레샤이데랑 에인헤랴르는 이미 거의 다 나왔어. 속도로 보면 1시간 후 정도면 초입으로 나올 걸.”
쇼우의 말대로, 셰레샤이데와 에인헤랴르는 1시간 후에 나왔다.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에게 건네기 위해 많은 말들을 준비했지만 하나도 전달할 수 없었다. 셰레샤이데는 온통 피투성이로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셰레샤이데가 크게 다친 것은 에인헤랴르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인헤랴르가 멀쩡한 것에 비해 셰레샤이데는 평소보다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망하지 않으려고 해도, 말투가 질책하는 것처럼 튀어나왔다. 에인헤랴르는 셰레샤이데의 것임에 분명한 피로 떡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이형의 존재들이 자폭했어. 그걸 막아서려다가. 파편이.”
디트에한은 몸이 무너져 내리려는 셰레샤이데를 받아 바닥에 눕혔다. 셰레샤이데는 회복 능력이 있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파편이 몸에 박힌 상태로 아물어버리면 꺼낼 때까지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럴 때면 디트에한이 살을 갈라내어 몸에 박힌 이물질을 빼내어 주곤 했다.
“안돼!”
플라니아가 가로막았다.
“내가 할게.”
“너 사람 몸에 칼집 내본 적은 있어?”
디트에한은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플라니아를 옆으로 던져버리고 한시 바삐 셰레샤이데의 몸에서 이물질을 빼내어야 했다.
“해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어! 쇼우, 배신자의 창고 열쇠로 셀시의 시간을 멈춰줘.”
“못 하는 거면 비켜!”
플라니아를 옆으로 밀어내고 셰레샤이데에게 달려갔다. 폐에 구멍이 뚫렸는지 쌔액쌔액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숨소리가 들렸다. 재고 말 것도 없이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의 옷을 단검으로 찢고, 상처 부위에도 갖다대었다.
“안돼!”
플라니아가 비명 같이 소리를 질렀다. 가슴께의 상처로 단검을 옮겨가던 디트에한은 그 비명의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이게.... 뭐지?”
멍하니 앉아있는 디트에한의 눈 앞에 있으면 안되는 것이 보였다. 플라니아가 입술을 깨물면서 셰레샤이데의 위로 엎어졌다. 가려졌지만 디트에한은 순간적으로 본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셀시가 왜 여자 가슴을 달고 있어?”
셰레샤이데 아스텔이 말하던 저주의 정체가 드러났다.
셰레샤이데 아스텔.
“셀시는 거짓말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야.”
플라니아는 셰레샤이데를 처음 본 순간부터 어렴풋이 셰레샤이데를 의심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디트에한에게 말해주지 않고 변명처럼 말을 계속 덧붙였다. 플라니아가 사실을 말했을 때 디트에한이 더욱 자책할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련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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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컨디션 괜찮은 거 누구야.”
싸늘하게 내리꽂힌 말에, 에인헤랴르와 디트에한이 쭈뼛거리면서 손을 들었다. 디트에한이 상대적으로 멀쩡한데 비해, 아인은 팔을 떠는 것이 멀쩡해보이지는 않았다. 셀시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누샨, 넌?”
“나, 아직 숙취가.”
토기를 억누르면서 누샨이 입을 막았다. 셰레샤이데는 있는대로 얼굴을 구기면서 다른 애들로 시선을 옮겼다. 쇼우는 얼굴이 창백했고, 레믈롯은 간신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쇼우와 레믈롯은 원격으로 탐사, 나와 아인은 섬멸, 공주님과 디트에한, 누샨은 회수로.”
평소처럼 디테, 라고 애칭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며 외면하기까지 했다. 눈치 보던 디트에한은 마음이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누샨, 공주님을 잘 부탁해.”
“으응, 그래.”
심지어 플라니아를 부탁할 때마저도 누샨에게만 말을 걸었다.
“셀시, 나도 상태 괜찮은데.”
셰레샤이데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여전히 셰레샤이데는 디트에한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셀시는 대놓고 디트에한을 무시하고 레믈롯에게 말을 걸었다.
“레믈롯, 사전 쓸 정도의 체력은 있지?”
“응....”
“그러면 던전엔 들어가지 말고, 쇼우의 보조를 받아서 그냥 안경 초점을 맞추서 슬쩍 보고 알려줘.”
“그러면 안에 있는 이형의 존재는 파악할 수 없는데?”
“괜찮아. 그런 상태에서 들어가는게 더 말이 안된다고 봐. 그리고 던전 공략 시간은 단축하는 게 좋으니까 빨리 끝내버리자.”
“하지만 아무리 연안 등급에 가까워도 천해 등급은 천해 등급이야. 공략에 필요한 시간도 충분히 주워지는데, 좀 쉬엄쉬엄하는 게 어때?”
“미안한데, 내가 여유가 없어.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약에 문제가 생겨서.”
셰레샤이데의 말투는 굉장히 차가워져 있었다. 반대의 말을 꺼냈다간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인내심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레믈롯도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빨리 끝내는 게 낫겠네.”
“셀시, 나도 멀쩡하다니까?”
재차 말을 해보았지만 셰레샤이데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잘 보여? 직접 들어가야할 정도의 깊이야?”
레믈롯은 무시당한 디트에한을 보면서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안경을 들어올렸다. 평범한 안경은 아니었다. [누누시시의 억과사전]은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쇼우, 초점 조절을 부탁해. 음. 셀시, 전체적으로 던전은 단조로운 편이야. 타입도 물리고. 연안에 가까운 천해등급이야.”
레믈롯은 안경의 부품을 돌리며 초점을 맞추었고, 쇼우는 마법으로 레믈롯을 보조했다.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던전으로 진입 없이 탐색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 아인, 바로 출발할 수 있어?”
“응.”
에인헤랴르는 셰레샤이데의 말에 바로 도끼를 고쳐잡았다.
“그럼 가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셰레샤이데는 앞장섰고, 그 뒤를 에인헤랴르가 따랐다. 디트에한은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와~ 난 보이지도 않는다 이거지?”
“어쩔 수 없지. 먼저 쌩깐 건 너쪽이었잖아. 셀시도 너한테 그런 것 뿐이지, 뭐.”
누샨은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서 플라니아도 거들었다.
“그래, 친구라면서 왜 갑자기 그랬던건데? 셀시는 영문도 모르고 너한테 화풀이 당했잖아.”
“화풀이?”
“그래, 그게 화풀이가 아니면 뭔데? 갑자기 사람 말 무시하고, 사과도 듣지 않고, 왜인지도 알려주지 않는 게 화풀이가 아니면 뭔데?”
“그건....!”
내가 걔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 걔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앞으로도 알릴 수 없을 것이란 걸 알았어. 그 애가 다가올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난다는 걸 알았어. 점점 더 마음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어.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하면 그대로 그 애가 멀어질까봐 무서웠어.
속마음은 놀랍도록 선명했지만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디트에한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러자 플라니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넌 멍청이야, 디트에한. 계속 친구로라도 남아있고 싶으면 사과부터 해. 셀시도 널 용서하고 싶을거야. 그리고 누샨.... 난 분명 다른 애들이라도 데리고 가서 디트에한이랑 깊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을텐데?”
누샨이 딴청을 피웠다. 플라니아의 눈꼬리가 더더 올라갔다.
“누.샨?”
음절을 끊어말하며 플라니아가 누샨에게 다가갔다. 누샨은 콧등을 긁적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나는 말하려고 했지. 깊은 이야기. 그래서 문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들어갔는데에~?”
“디트에한이 엎어져서 찌질거리고 있어서 그냥 다른 애들이랑 술자리 열었지.”
“........”
“........”
“너네 친구 맞냐?”
플라니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듯이 누샨에게 다가섰다. 누샨은 눈을 내리깔면서도 슬쩍씩 뒤로 물러났다. 플라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누샨에게 더 다가갔다.
“셀시는 지금 힘들거란 말이야......”
디트에한은 그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플라니아가 크게 상심해하는 모습에 플라니아가 나름대로 셰레샤이데를 아끼고 있는 것을 느끼고 나쁘지 않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디트에한. 셀시가 나오거든, 꼭 사과해. 알겠지? 셀시가 네가 한 말이 실례였고, 너한테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넌 셀시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사이를 끝내고 싶지도 않잖아.”
“맞아.”
디트에한은 짧게 플라니아의 말에 긍정했다. 플라니아의 말이 놀랍도록 전부 사실이라 부정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플라니아 넌 왜 그렇게 우리 사이를 신경쓰는거야?”
“다른 건 몰라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만은 솔직하게 전해야 해. 난 너무 늦게 알았어.”
플라니아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디트에한은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 플라니아도 똑같은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조언하는 것이겠지. 디트에한은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플라니아의 말대로,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와 인연을 끊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여전히 셀시와 친구이고 싶어.”
셰레샤이데가 나오면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사과할지도 어느 정도 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찌질하게 굴었던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셰레샤이데의 화는 누그러질 수 있게 말할 예정이었다.
‘미안해, 셀시. 내가 거지 같이 굴었지? 그건 다 내 잘못이야. 그냥 너무 심란해서 그렇게 굴었어. 네가 잘못한 건 없었어.’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예상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안 나오지?”
던전 초입에 세운 베이스 캠프에서, 디트에한은 초조하게 깜박임으로 땅을 팠다. 평상 시였다면 금방 나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불안함을 느끼면서 들어가려고 하자, 레믈롯이 막았다.
“아직이야. 구조 신호도 오지 않았고 천해 등급인 점도 감안해야해.”
“셀시가 죽기라도 하면 어쩔건데?”
“알잖아. 셀시는 왠만해선 죽지 않아. 즉사 함정에 걸렸더라도 다른 반 애들과는 달리 충분히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어. 구조한답시고 던전에 구하러 들어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역장에 휘말려 다른 애들까지 죽을 수 있으니까.”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나도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야. 셀시는 나와도 친구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네. 탐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들어간거라, 나랑 쇼우가 철야로 번갈아가면서 던전 구조를 파악 중이야. 셀시의 구조신호가 오거나, 던전 구조가 완전히 파악되기 전에는 들어가면 안돼.”
레믈롯은 안경을 들어올리면서 디트에한을 막아섰다. 밤을 샌 레믈롯의 눈에는 짙게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차분한 음성이지만, 드물게도 싸늘했다. 그렇지만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디트에한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나만 들어가면 되잖아.”
“적어도 2인 1조로 활동하는 것이 원칙인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실랑이는 계속 길어졌다. 레믈롯은 빈 틈 없이 디트에한을 경계하며 앞을 막아섰고, 디트에한은 레믈롯을 어떻게 기절시키고 들어갈지 가늠하고 있었다. 둘의 대치를 멈춘 것은 끼어든 쇼우였다.
“그럴 필요 없어.”
디트에한은 침을 삼키면서 쇼우를 보았다. 쇼우는 평소보다 더 짜증이 난 것 같은 얼굴로 종이를 흔들었다. 종이에는 완성된 던전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럼 들어가도 되는거지?”
“아니. 그럴 필요 없다고. 생명신호를 감지했을 때 셰레샤이데랑 에인헤랴르는 이미 거의 다 나왔어. 속도로 보면 1시간 후 정도면 초입으로 나올 걸.”
쇼우의 말대로, 셰레샤이데와 에인헤랴르는 1시간 후에 나왔다.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에게 건네기 위해 많은 말들을 준비했지만 하나도 전달할 수 없었다. 셰레샤이데는 온통 피투성이로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셰레샤이데가 크게 다친 것은 에인헤랴르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인헤랴르가 멀쩡한 것에 비해 셰레샤이데는 평소보다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망하지 않으려고 해도, 말투가 질책하는 것처럼 튀어나왔다. 에인헤랴르는 셰레샤이데의 것임에 분명한 피로 떡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이형의 존재들이 자폭했어. 그걸 막아서려다가. 파편이.”
디트에한은 몸이 무너져 내리려는 셰레샤이데를 받아 바닥에 눕혔다. 셰레샤이데는 회복 능력이 있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파편이 몸에 박힌 상태로 아물어버리면 꺼낼 때까지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럴 때면 디트에한이 살을 갈라내어 몸에 박힌 이물질을 빼내어 주곤 했다.
“안돼!”
플라니아가 가로막았다.
“내가 할게.”
“너 사람 몸에 칼집 내본 적은 있어?”
디트에한은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플라니아를 옆으로 던져버리고 한시 바삐 셰레샤이데의 몸에서 이물질을 빼내어야 했다.
“해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어! 쇼우, 배신자의 창고 열쇠로 셀시의 시간을 멈춰줘.”
“못 하는 거면 비켜!”
플라니아를 옆으로 밀어내고 셰레샤이데에게 달려갔다. 폐에 구멍이 뚫렸는지 쌔액쌔액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숨소리가 들렸다. 재고 말 것도 없이 디트에한은 셰레샤이데의 옷을 단검으로 찢고, 상처 부위에도 갖다대었다.
“안돼!”
플라니아가 비명 같이 소리를 질렀다. 가슴께의 상처로 단검을 옮겨가던 디트에한은 그 비명의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이게.... 뭐지?”
멍하니 앉아있는 디트에한의 눈 앞에 있으면 안되는 것이 보였다. 플라니아가 입술을 깨물면서 셰레샤이데의 위로 엎어졌다. 가려졌지만 디트에한은 순간적으로 본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셀시가 왜 여자 가슴을 달고 있어?”
셰레샤이데 아스텔이 말하던 저주의 정체가 드러났다.
작가의 말
어제 급하게 올리느라 잘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보강해서 다시 재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닫기저주에 걸린 장미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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