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조회 : 935 추천 : 1 글자수 : 4,998 자 2022-09-16
키에엑
블랙 드래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늪지에 울렸다. 순간 늪지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키으에엑
땅이 출렁거렸다.
블랙 드래곤의 거친 숨소리가 모든 생물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소리는 알칸이 서 있는 곳까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드래곤 슬레이어가 겁을 먹고 도망가려는 듯 몸을 뒤로 뺐다.
“멈춰.”
하지만 알칸의 말에 뒤로 빼던 몸을 바로 멈췄다.
“안 죽어. 기다려 봐.”
죽을 거 같은데 안 죽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알칸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군사들과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몸을 낮추고 블랙 드래곤의 소름 끼치는 소리를 견디고 있을 때.
피이슝
시커먼 형체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분명 쨍쨍하게 밝은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다.
“브, 블랙 드, 드래곤-”
“쉿!”
블랙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높이 떠올랐다. 드래곤의 날개짓에 습지의 먹색 진흙이 숲으로 떨어졌다.
‘하. 이제 가는구나.’
알칸은 이전 삶처럼 반복된 일에 안심했다.
블랙 드래곤은 다누만 왕국 습지에 딱 삼 일을 살았다. 습지의 온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블랙 드래곤이 저 멀리 날아가는 모습에 알칸은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를 매만졌다.
‘내 거다!’
이제 숲을 빠져나가 성벽으로 가면 됐다.
“사, 살았다!”
“블랙 드래곤이 도망갔어!”
블랙 드래곤이 늪지에서 사라지자, 제일 좋아한 것은 드래곤 슬레이어었다.
“블랙 드래곤 이거 말야, 알칸님이 잡으러 온 줄 알았던 거지.”
“그러게. 우리가 알칸님을 지키는데, 어디서 싸우러 들어.”
“우리가 올 줄 알고 겁먹은 거지. 흐흐흐.”
역시나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자신들의 경험담을 만들어대기 시작했다. 아주 기발하고 창의적으로.
블랙 드래곤이 알칸님을 무서워해서 도망갔다는 둥. 그런 알칸님을 우리가 약초로 치료했다는 둥. 서로 으싸으싸 하며 경험담을 만들기 시작했다.
알칸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로렌은 그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됐다. 성벽으로 돌아가자.”
“와!”
그들은 블랙 드래곤과 싸워 승리한 듯 기분이 좋았다.
그 시각.
알칸을 빠짝 쫓아온 베라딘 공작과 그의 군사들.
스피슨 주머니에 들어간 랑쥐가 고개를 쭉 뺐다.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비식 웃었다.
-이제 됐다. 성벽으로 돌아가자.-
-와!-
저 멀리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떠나서 환호하는 소리인 걸 단번에 알았다. 그리고 베라딘 공작도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떠난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그만큼 바우튼 국왕의 명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다누만 왕국의 국보를 지키겠다. 지금 알칸을 죽인다면,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베라딘과 군사들과 알칸의 무리를 찾았다. 곧 알칸 무리를 향해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알칸님! 살아계셨군요!”
베라딘은 알칸이 살아있다는 게 기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프레드릭 백작이 소리쳤다.
“피하십시오. 전하!”
순간, 베라딘 공작의 군사들과 알칸의 군사들이 대치되었다. 대치된 상황에서도, 알칸은 생각했다.
‘베라딘 공작의 검술은 대륙에서도 손꼽힌다. 내가 상대할 수 없어. 그렇다면…’
어떤 수를 써야 할지 파악할 때, 알칸의 눈에 스피슨이 들어왔다. 그리고 스피슨의 주머니에 있는 다람쥐가 보였다.
그 모습에 알칸이 질색했다.
“네가 왜 여길 와?”
“찍찍?”
못 올 곳을 왔냐는 듯 어깨를 들어 올리는 다람쥐.
그런 다람쥐를 베라딘 공작이 낚아챘다.
“겨우 다람쥐한테 마음을 뺏겨?”
그리고 다람쥐의 목살을 들고 허공에 띄웠다. 다람쥐가 목살이 잡힌 체 발버둥 쳤다. 알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혹여라도 진샬이 나타난다면 골치 아파질 테다.
“공작, 지금 멈추시오. 후회하지 말고.”
“다람쥐 한 마리에 목숨을 건단 말인가?”
“그냥 다람쥐가 아니오.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시오.”
초조해진 알칸을 본 베라딘 백작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는 알칸이 다람쥐를 극도로 애지중지한다 생각했다.
베라딘 공작이 단도를 들어 다람쥐의 목에 대었다.
“그렇다면. 베르트르 갑옷과 다람쥐를 교환하겠소?”
“미쳤냐?”
“찍!”
‘미쳤냐?’라는 말에 다람쥐가 매섭게 알칸을 노려봤다. 다람쥐의 표정에서 진샬의 분노하는 눈매가 연상됐다. 알칸은 아차 싶어 바로 말을 바꾸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 반려동물을 어떻게 베르트르 갑옷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이오!”
알칸은 책 읽듯 딱딱한 리듬으로 말을 뱉었다.
“찍.”
다람쥐가 목살이 잡힌채 허공에서 앞발을 올렸다. 알칸이 그것을 보며 안도했다.
베라딘 공작은 분명 다람쥐에게 무언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다람쥐가 인질이 되기엔 충분했다.
‘일이 쉽겠군. 멍청한 알칸.’
“다누만 왕국의 국보를 내어놓아라!”
“싫다!”
“그렇지 않으면 이 다람쥐는 죽는다!”
“그건 더 싫다!”
알칸은 결정하지 못하고 두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진샬을 보고 싶지 않다.’
알칸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베르트르 갑옷을 포기하느냐 진샬이 찾아와 그의 폭풍 잔소리를 들어야하느냐.
알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둘 다 싫다!”
알칸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 척하며 미리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베라딘 공작을 향해 외쳤다.
“아쿠아 볼.”
“뭐?”
알칸의 두 손에 물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검으로 베라딘 공작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마법을 써야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군사 뒤쪽에 배치된 마법사들이 두 눈을 치켜들었다.
“마법이라니!”
검사라고 알고 있던 알칸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비벼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런데 마법사들이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물의 구체가 베라딘의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윽, 허, 헉.”
베라딘의 얼굴에 아주 큰 물방울이 덮였다. 심해 바닷속에 빠진 듯한 그의 표정이 얼마나 겁을 먹은지 알 수 있었다.
베라딘 공작이 알칸을 노려보았다. 그가 자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으려고 손을 움직였다.
‘마법을 해체시키는 아티팩트?’
검술가들은 마법에 취약했다. 그래서 마법을 풀 수 있는 아티팩트 하나 정도는 들고 다녔다.
‘아티팩트와 마법사들이 모인다면, 내 마법을 풀 수 있을 거야. 젠장!’
베라딘 공작이 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해방된 다람쥐가 알칸을 향해 달려갔다. 알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다람쥐가 베라딘을 보며 털을 세웠다.
베라딘 공작이 목걸이를 풀었으나, 마법이 해체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달려들어 물의 구체를 해체하려 했지만 해체되지 않았다.
“마법의 힘이 너무 강력하오.”
“더 힘을 보태시오.”
“마나를 모두 사용하시오.”
베라딘이 분노하듯 알칸을 노려봤지만, 마법사들은 알칸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은 처음이었다.
랑쥐가 마법사들 모르게 알칸에게 힘을 보탠 터라 마법이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알칸은 자기의 어깨 위에 올라탄 랑쥐를 보며 씨익 웃었다. 다람쥐가 두 앞발을 쓱 올렸다.
“모든 마법사는 베라딘 공작의 물의 구체를 깨라!”
마법사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베라딘에게 다닥다닥 붙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알칸을 공격하고, 마법을 멈춰라!”
베라딘 공작이 데려온 군사들이 알칸을 향해 돌아섰다. 알칸이 마법 주문을 계속 유지한다면, 베라딘 공작의 생명이 위험했다. 군사들이 알칸을 향해 돌격했다.
로렌 또한 알칸을 수호하기 시작했다.
“전하를 수호하라!”
로렌과 군사들이 주문을 걸고 있는 알칸을 수호하기 시작했고, 베라딘의 군사들이 알칸의 군사를 향해 돌격했다.
챙
채엥
베라딘 공작의 군사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파찍
순간.
알칸이 서 있는 곳에 그레이트 쉴드가 펼쳐졌다.
“전하!”
프레드릭 백작은 알칸의 주위에 안전하고 단단한 쉴드를 펼쳤다. 6써클이 되어야 만들 수 있는 그레이트 쉴드는 기존에 쉴드보다 아주 강력한 방어막이었다. 투명한 막이 알칸을 보호하기 시작하자 프레드릭 백작이 로렌을 향해 외쳤다.
“어서 공격을!”
프레드릭 백작이 그레이트 쉴드를 치자 로렌과 군사들은 베라딘 공작의 군사들을 향해 돌격했다.
“읏, 아.”
알칸은 온 힘을 다해 물의 구체를 유지했다.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을 다람쥐가 닦아주었다. 그리고 다람쥐 손에 묻은 땀을 알칸의 옷에 다시 닦았다.
“으, 으 으!”
물의 구체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한 베라딘 공작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베라딘 공작은 숨을 쉬지 못한 극한의 공포 속에… 목숨이 끊어졌다.
“어, 어떻게!”
“마법을 깨지 못했소.”
마법사들은 숨이 끊어진 베라딘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그중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서 몸을 피하시게.”
“이곳을 탈출-”
“말을 하, 할-”
알칸이 마법을 멈추자, 프레드릭 백작도 그레이트 쉴드를 멈추었다. 그리고 베라딘 공작의 마법사들에게 걸어갔다.
“내가 그리했네. 성벽으로 갈 동안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네.”
프레드릭 백작은 마법사들이 이동 마법을 사용하여 도망치지 못하도록 마법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법 주문을 외우지 못하는 마법사는 일반인과 다를 게 없었다.
마법사는 포박하였지만, 로렌과 군사들은 계속 싸우고 있었다.
수적으로 밀리다 보니 드래곤 슬레이어 무리도 숨지 않고, 군사에게 힘을 보태었다. 바닥에 떨어진 창이나 검을 들고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알칸은 곧 테우스만테 검을 들었다.
유독 알칸의 검이 더 돋보였다. 베라딘의 군사들이 알칸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 덤벼봐.”
알칸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베라딘의 군사들은 마검사라는 알칸이 두려울 뿐이었다. 처음 만나본 존재가 드래곤 보다 무서울 지경이다.
“누구부터? 너?”
알칸이 한 명에게 다가가자 그가 검을 떨어트렸다. 베라딘 공작이 죽은 마당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가 없었다.
“하, 항복합니다.”
“하, 항복.”
“저, 저도요. 항복.”
싸우지도 않았는데 적군들은 검을 바닥에 놓았다. 알칸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아닌데. 쩝.”
알칸은 아쉬웠다.
베라딘 공작의 군사들과 마법사들이 알칸 앞에 무릎을 조아렸다. 그리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내 말 잘 들어. 이거 어길 시에 내가 대륙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 거야. 너희 가족까지 모두.”
“헉!”
알칸이 지금 사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마법을 사용한 거 본 사람?”
“……”
질문이 이상했지만, 눈치껏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래, 여기서 어찌어찌하다 보니까 베라딘 공작이 재수 없게 죽은 거야. 나한테.”
“네. 맞습니다.”
알칸이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오늘 싸움에서 마법을 쓴 사람은 누구?”
“마법사들입니다!”
“그렇지!”
알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검사? 마법사?”
“마검사 아니, 아니, 검사입니다!”
“그렇지!”
알칸이 두 손을 ‘짝’ 쳤다. 만족스럽다.
당분간 자신이 마검사라는 소문이 나지 않을 거 같았다. 언젠간 밝혀지겠지만 당분간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알칸도 모르게 소문은 금세 퍼져나갈 것이다. 마검사라는 부분만 빼고, 모두 기발한 소문 말이다. 라톤이 알칸을 우러러보았다.
‘나도 마검사 알칸님을 모시는 사람이 될 테다!’
라톤은 처음으로 닮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사람이 볼수록 믿음직스러워.’
다누만 왕국에는 전설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존재했지만, 형편없었다. 전설 일뿐 현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칸을 만나고 그 짧은 순간 모든 게 달라졌다.
‘사람이 이렇게 강할 수 있구나!’
알칸을 닮는다면 자신도 강해질 수 있을 거 같다.
‘어떻게 하면 그분이 더 유명해질까?’
라톤은 그런 알칸을 대륙에 널리 널리 알리고 싶어졌다. 그의 입이 근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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