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조회 : 1,211 추천 : 1 글자수 : 4,659 자 2022-09-22
“아빠?”
똥그란 눈의 다람쥐가 순식간에 빨간 머리의 소녀로 변신했다. 그 모습에 진샬은 흐뭇하게 랑쥐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눈빛의 진샬과는 다르게 랑쥐의 똥그란 두 눈이 일그러졌다.
“일어났느냐? 내 아가.”
“아빠. 여기 왜 왔어?”
진샬은 랑쥐의 일그러진 눈썹마저 귀여웠다. 그가 랑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레어로 가자꾸나.”
“싫어! 나 여기 더 있을 거야.”
“우리 랑쥐가 신나게 놀았나 보구나. 하지만 이젠 레어로 돌아가야 한단다.”
인간 세계를 접한 랑쥐가 습득한 게 많은 거 같았다. 인간처럼 떼를 쓰고, 귀여운 표정까지 진샬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약속한 한 달이 되었단다. 약속은 지켜야지?”
“하, 하지만.”
“아빠가 네 방을 다시 예쁘게 꾸몄단다. 분홍색 침대에 분홍색 쇼파-”
“…나 분홍색 싫어하는데?”
진샬이 깜짝 놀란 눈으로 버벅거렸다.
“그, 그래. 아! 새로운 몬스터 장난감을 가져왔단다. 네 말을 잘 들을 거란다.”
“나는 저 버러지가 제일 재미있는데?”
랑쥐의 손가락이 알칸을 지목했다. 진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버러지를 장난감으로 데리고 가자구나.”
알칸은 주먹을 말았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했다. 손에 땀이 묻어났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드래곤은 레어에서 살아야 한단다. 어서 가자구나.”
“…아빠.”
진샬의 단호함에 랑쥐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진샬은 랑쥐의 모습에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어는 외로워.”
“레어가 외롭다니?”
랑쥐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망울로 진샬을 올려다보았다.
“아빤 매일 바쁘잖아. 나는 혼자 놀고. 저 버러지를 장난감으로 데려가도 외롭단 말이야.”
“랑쥐야.”
“여긴 버러지들이 가득해. 그들만의 규칙도 있어서 좀 까다롭지만, 나도 그들처럼 지냈어. 여기 있으면 외롭지 않아.”
“이곳에 있으면 아빠가 보고 싶지 않겠니?”
“응. 그런데 그건 레어에 있을 때도 그랬어.”
“뭐라고?”
“아빤 며칠을 나갔다 돌아왔잖아. 나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고, 레어가 재미도 없고. 그래서 레어를 나갔다가 납치된 거고.”
진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두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큰 충격에 빠진 듯 그의 턱이 떨려왔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깊은 한탄을 내뱉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진샬도 아빠는 처음이었다.
“아빠.”
랑쥐가 눈물을 닦으며 진샬을 응시했다.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은 레어에 있든 여기에 있든 어디에 있든 똑같아. 나는 아빠 딸이야.”
“랑쥐야.”
랑쥐가 진샬을 꼬옥 안아주었다.
“아빠가 일이 바빠서 미안하구나. 몇천 년을 살아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괜찮아. 나도 아빠처럼 멋있는 드래곤이 되고 싶어. 그런데 당분간만 인간들 세상을 더 경험해 보고 싶어.”
“그래. 내가 더 신경을 쓸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레어로 돌아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응.”
알칸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더 있는 다고?’
알칸은 두 손을 말았다 폈다 반복했다. 손에는 이미 땀이 찼고, 정수리부터 시작해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분간이면 얼마지? 설마 1년?’
진샬이 랑쥐의 여린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아빠가 이곳 황제를 만날 테다. 그리고 우리 랑쥐를 건들지 못하도록 할 테니-”
“큭, 아빠도. 푸핫.”
랑쥐는 진샬을 보며 활짝 웃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딸이 웃자 흐뭇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빠. 나 이제 500살이에요. 그렇게 안 해도 돼. 그냥 다람쥐로 돌아다니고 버러지들 구경하는 게 좋아.”
“아, 그러니? 하하하하하.”
알칸이 그들을 향해 눈을 좁혔다.
‘대체 뭔 개소리야!’
둘의 행복한 모습에 알칸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랑쥐가 웃으며 알칸을 응시했다. 알칸은 몸이 굳은 것처럼 서 있었다.
“알칸? 왜 머리카락이 젖었어? 더운가?”
알칸의 식은땀에 머리가 흥건하게 젖었다. 알칸이 두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곧 진샬이 가슴을 펴며 알칸을 향해 다가섰다.
“당분간 랑쥐와 함께 있거라.”
“…….”
알칸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진샬이 매섭게 눈썹을 치켜들었다. 알칸은 겨우 입을 열었다.
“당분간이라는 건 대체 얼마란 말입니까?”
알칸의 말투가 딱딱했지만, 진샬은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당분간이라면 당분간이지.”
“그럼 한… 일 년 정도면 됩니까?”
진샬이 혀를 찼다.
“일 년이면 눈 깜짝할 시간이지.”
“…그렇다면?”
알칸은 긴장을 풀려는 듯 어깨를 돌리며 이완시켰지만, 호흡은 가빠왔다.
“흠, 백 년? 이 백 년 정도?”
“네? 그때면 저는 죽을 텐데요?”
“그건 그때 생각하고.”
알칸은 심정지라도 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죽을 때까지 진샬을 본다는 거잖아!’
생각도 정지된 듯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말을 뱉는다는 것이 그만.
“저, 저도 바쁩니다. 검술도 배워야 하고, 마법도 배워야 하고.”
진샬이 알칸을 쳐다보았다. 핑계가 될 수 없는 알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대륙에 존재하는 드래곤의 질서를 잡는다. 그것보다 더 바쁜 건가?”
“……”
알칸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바쁜 거나 위험한 것으로 따지기엔 드래곤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검술과 마법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
“실전해야 하는 것이지.”
알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날 연습하는 것보다 단 한 번의 실습이 도움이 되었다.
진샬이 알칸을 위아래로 흩었다.
“대체 이 버러지는 언제 강해지는 것인가? 쯧!”
“네?”
진샬은 처음 알칸을 만난 날보다 그가 강해진 걸 느꼈다. 하지만 알칸의 개인적인 성장이었고, 드래곤에 비하면 진짜 버러지만 한 수준에 벗어나지 못했다.
“랑쥐가 이곳에서 당분간 있는다면…. 너는 더 강한 버러지가 되어야 한다.”
“…강한 버러지?”
진샬의 턱이 밑으로 바짝 당겨졌고, 눈을 가늘게 뜨며 알칸을 주시했다.
알칸은 진샬이 쏘아보는 눈빛을 피했다. 알칸은 진샬이 수상했다. 무슨 짓을 할 거 같았다. 알칸은 입술 안쪽을 깨물며 지금 상황을 견뎠다.
진샬이 한 손을 허공에 올렸다.
알칸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파지직
순간, 허공에 붉은 열장이 열렸다.
방안에는 거센 바람이 몰아졌지만, 주변 물건은 가만히 놓여있었다.
“내가 친히 너에게 자비를 베푸노라. 저곳에서 몬스터를 모두 처리하기 전까진 나오지 못한다.”
“제가 사라지면 모두 저를 찾으려고-”
“아니. 이곳의 시간은 단 1분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건 아-”
“버러지가 말이 많아서야.”
진샬은 자기 할 만만하고 알칸을 열장으로 밀어 넣었다.
팟
열장이 닫혔다.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이 잔잔해졌다. 랑쥐가 진샬에게 다가 셨다.
“어디로 보냈어, 아빠?”
“다누만 왕국 고타난 숲. 내가 그대로 재현해두었단다. 그곳에서 몬스터만 해치우면 된단다.”
랑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려요?”
“금방. 죽지만 않으면.”
랑쥐가 어깨를 들었다 올렸다.
“그래도 죽으면 아쉬울 거 같아.”
“그거 하나 못하고 죽는다면, 너를 맡길 이유가 없지.”
랑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
붉은 허공을 둥 둥 떠다니던 알칸은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다. 끝도 보이지 않고, 몸이 허공에 떴다.
“지난번은 초원이었어. 지금도?”
하지만 끝도 없이 흘러간 곳은.
“탄니아 성벽?”
다누만 왕국에서의 탄니아 성벽이 보였고, 고타난 숲이 보였다.
열장에 열린 공간은, 고나탄 숲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렇다면, 또 오거를?”
콰직
붉은 허공이 산산이 조각나듯 빠직 깨졌다. 알칸은 순식간에 고타난 숲으로 추락했다.
“아, 아악! 진샬, 이놈의 자식!”
추락하면서도 알칸은 진샬 욕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열장으로 들어온 것이 어이없고, 이해할 수 없고, 화나고, 분노했다.
알칸은 추락하면서 숲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뜨드득
추락하는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나뭇가지들이 알칸의 손에 꺾여졌다. 알칸은 겨우 나무에 매달릴 수 있었다.
“하. 왜 허공에서 떨어트리는 거야. 아주 죽이려고 작정했어.”
생각해보면 지난번 랑쥐와 열장에 들어갔을 땐, 아주 예쁜 초원이었다. 허공에 떨어지지도 않았다. 알칸은 진샬이 자신을 죽이려고 이곳에 보낸 게 맞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알칸은 땅을 내려보았다.
“아, 씨. 떨어지면 진짜 죽을 뻔했잖아.”
그의 팔이 나뭇가지에 스쳐 상처가 났다. 따끔거리는 게 현실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는 거구나.”
드디어 실감했다. 이 숲에서 벗어나려면 끝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눈 깜작할 시간. 열장 밖은 1분도 지나지 않는다고 했어. 그렇다면 나를 구하려고 올 사람이 없다는 건데.”
알칸은 나무를 타고 더 높이 올라갔다. 나뭇가지에 올라타서 하늘을 주시했다. 하늘은 맑고 고요했으나, 드문드문 붉은 허공이 보였다. 진샬의 열장이라는 흔적이었다.
“블랙 드래곤이 이곳에 있을 리 없고.”
고타난 숲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이 있을 린 없었다. 알칸은 숲 주변을 보았다. 다행히 그가 서 있는 나무가 제일 높았는지 그 지역이 훤히 보였다.
“12구역이군.”
다누만 왕국 지도에서처럼 12구역으로 나눠진 곳엔 몬스터의 종류도 달랐다.
“설마 12구역에 몬스터와 마물을 다 해치워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이곳을 나갈 수 있는 거지?”
알칸은 두 눈이 컴컴해졌다. 12구역의 몬스터와 마물을 없애는 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10년? 20년? 아니 30년?”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길이 없다.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이건 실전이 아니야. 감옥이지.”
진샬의 감옥에 갇힌 알칸.
두 눈이 시려왔다.
알칸은 말없이 나뭇가지에 서서 숲을 응시했다. 숲의 모든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했다.
“어쩌면.”
알칸의 콧방울이 시큰거렸다.
“이곳에서 나간다면, 나도 강해져 있다는 거다.”
알칸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코가 붉어졌다.
“10년이든 20년이든 30년이든 견뎌야 한다. 이건 나와의 싸움이야.”
숲의 바람이 알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알칸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시원하네. 싸우기 딱 좋은 시간이고.”
알칸의 눈빛이 밝게 반짝거렸다. 손깍지를 끼고 들어 올렸다.
알칸은 달라졌다.
“진샬. 기다려라.”
알칸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 두렵다고, 억울하다고 주저앉을 수 없었다. 살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알칸은 본격적으로 땅을 주시했다. 무언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저건!”
다누만 왕국에서 처리했던 그 오거였다.
“처음 시작치곤 좋네.”
알칸은 오거의 움직임을 따라 땅으로 내려왔다. 오거가 인간의 냄새를 맡자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야! 나 찾아?”
땅에 내려온 알칸이 오거를 불러세웠다. 오거가 뒤를 돌아봤고, 알칸이 서 있자 입매를 다셨다.
“으거?”
“어. 너 잡으러 왔어.”
알칸은 오거를 보며 입매를 올렸다.
똥그란 눈의 다람쥐가 순식간에 빨간 머리의 소녀로 변신했다. 그 모습에 진샬은 흐뭇하게 랑쥐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눈빛의 진샬과는 다르게 랑쥐의 똥그란 두 눈이 일그러졌다.
“일어났느냐? 내 아가.”
“아빠. 여기 왜 왔어?”
진샬은 랑쥐의 일그러진 눈썹마저 귀여웠다. 그가 랑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레어로 가자꾸나.”
“싫어! 나 여기 더 있을 거야.”
“우리 랑쥐가 신나게 놀았나 보구나. 하지만 이젠 레어로 돌아가야 한단다.”
인간 세계를 접한 랑쥐가 습득한 게 많은 거 같았다. 인간처럼 떼를 쓰고, 귀여운 표정까지 진샬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약속한 한 달이 되었단다. 약속은 지켜야지?”
“하, 하지만.”
“아빠가 네 방을 다시 예쁘게 꾸몄단다. 분홍색 침대에 분홍색 쇼파-”
“…나 분홍색 싫어하는데?”
진샬이 깜짝 놀란 눈으로 버벅거렸다.
“그, 그래. 아! 새로운 몬스터 장난감을 가져왔단다. 네 말을 잘 들을 거란다.”
“나는 저 버러지가 제일 재미있는데?”
랑쥐의 손가락이 알칸을 지목했다. 진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버러지를 장난감으로 데리고 가자구나.”
알칸은 주먹을 말았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했다. 손에 땀이 묻어났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드래곤은 레어에서 살아야 한단다. 어서 가자구나.”
“…아빠.”
진샬의 단호함에 랑쥐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진샬은 랑쥐의 모습에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어는 외로워.”
“레어가 외롭다니?”
랑쥐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망울로 진샬을 올려다보았다.
“아빤 매일 바쁘잖아. 나는 혼자 놀고. 저 버러지를 장난감으로 데려가도 외롭단 말이야.”
“랑쥐야.”
“여긴 버러지들이 가득해. 그들만의 규칙도 있어서 좀 까다롭지만, 나도 그들처럼 지냈어. 여기 있으면 외롭지 않아.”
“이곳에 있으면 아빠가 보고 싶지 않겠니?”
“응. 그런데 그건 레어에 있을 때도 그랬어.”
“뭐라고?”
“아빤 며칠을 나갔다 돌아왔잖아. 나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고, 레어가 재미도 없고. 그래서 레어를 나갔다가 납치된 거고.”
진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두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큰 충격에 빠진 듯 그의 턱이 떨려왔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깊은 한탄을 내뱉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진샬도 아빠는 처음이었다.
“아빠.”
랑쥐가 눈물을 닦으며 진샬을 응시했다.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은 레어에 있든 여기에 있든 어디에 있든 똑같아. 나는 아빠 딸이야.”
“랑쥐야.”
랑쥐가 진샬을 꼬옥 안아주었다.
“아빠가 일이 바빠서 미안하구나. 몇천 년을 살아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괜찮아. 나도 아빠처럼 멋있는 드래곤이 되고 싶어. 그런데 당분간만 인간들 세상을 더 경험해 보고 싶어.”
“그래. 내가 더 신경을 쓸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레어로 돌아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응.”
알칸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더 있는 다고?’
알칸은 두 손을 말았다 폈다 반복했다. 손에는 이미 땀이 찼고, 정수리부터 시작해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당분간이면 얼마지? 설마 1년?’
진샬이 랑쥐의 여린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아빠가 이곳 황제를 만날 테다. 그리고 우리 랑쥐를 건들지 못하도록 할 테니-”
“큭, 아빠도. 푸핫.”
랑쥐는 진샬을 보며 활짝 웃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딸이 웃자 흐뭇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빠. 나 이제 500살이에요. 그렇게 안 해도 돼. 그냥 다람쥐로 돌아다니고 버러지들 구경하는 게 좋아.”
“아, 그러니? 하하하하하.”
알칸이 그들을 향해 눈을 좁혔다.
‘대체 뭔 개소리야!’
둘의 행복한 모습에 알칸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랑쥐가 웃으며 알칸을 응시했다. 알칸은 몸이 굳은 것처럼 서 있었다.
“알칸? 왜 머리카락이 젖었어? 더운가?”
알칸의 식은땀에 머리가 흥건하게 젖었다. 알칸이 두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곧 진샬이 가슴을 펴며 알칸을 향해 다가섰다.
“당분간 랑쥐와 함께 있거라.”
“…….”
알칸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진샬이 매섭게 눈썹을 치켜들었다. 알칸은 겨우 입을 열었다.
“당분간이라는 건 대체 얼마란 말입니까?”
알칸의 말투가 딱딱했지만, 진샬은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당분간이라면 당분간이지.”
“그럼 한… 일 년 정도면 됩니까?”
진샬이 혀를 찼다.
“일 년이면 눈 깜짝할 시간이지.”
“…그렇다면?”
알칸은 긴장을 풀려는 듯 어깨를 돌리며 이완시켰지만, 호흡은 가빠왔다.
“흠, 백 년? 이 백 년 정도?”
“네? 그때면 저는 죽을 텐데요?”
“그건 그때 생각하고.”
알칸은 심정지라도 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죽을 때까지 진샬을 본다는 거잖아!’
생각도 정지된 듯 받아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말을 뱉는다는 것이 그만.
“저, 저도 바쁩니다. 검술도 배워야 하고, 마법도 배워야 하고.”
진샬이 알칸을 쳐다보았다. 핑계가 될 수 없는 알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대륙에 존재하는 드래곤의 질서를 잡는다. 그것보다 더 바쁜 건가?”
“……”
알칸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바쁜 거나 위험한 것으로 따지기엔 드래곤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검술과 마법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
“실전해야 하는 것이지.”
알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날 연습하는 것보다 단 한 번의 실습이 도움이 되었다.
진샬이 알칸을 위아래로 흩었다.
“대체 이 버러지는 언제 강해지는 것인가? 쯧!”
“네?”
진샬은 처음 알칸을 만난 날보다 그가 강해진 걸 느꼈다. 하지만 알칸의 개인적인 성장이었고, 드래곤에 비하면 진짜 버러지만 한 수준에 벗어나지 못했다.
“랑쥐가 이곳에서 당분간 있는다면…. 너는 더 강한 버러지가 되어야 한다.”
“…강한 버러지?”
진샬의 턱이 밑으로 바짝 당겨졌고, 눈을 가늘게 뜨며 알칸을 주시했다.
알칸은 진샬이 쏘아보는 눈빛을 피했다. 알칸은 진샬이 수상했다. 무슨 짓을 할 거 같았다. 알칸은 입술 안쪽을 깨물며 지금 상황을 견뎠다.
진샬이 한 손을 허공에 올렸다.
알칸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파지직
순간, 허공에 붉은 열장이 열렸다.
방안에는 거센 바람이 몰아졌지만, 주변 물건은 가만히 놓여있었다.
“내가 친히 너에게 자비를 베푸노라. 저곳에서 몬스터를 모두 처리하기 전까진 나오지 못한다.”
“제가 사라지면 모두 저를 찾으려고-”
“아니. 이곳의 시간은 단 1분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건 아-”
“버러지가 말이 많아서야.”
진샬은 자기 할 만만하고 알칸을 열장으로 밀어 넣었다.
팟
열장이 닫혔다.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이 잔잔해졌다. 랑쥐가 진샬에게 다가 셨다.
“어디로 보냈어, 아빠?”
“다누만 왕국 고타난 숲. 내가 그대로 재현해두었단다. 그곳에서 몬스터만 해치우면 된단다.”
랑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려요?”
“금방. 죽지만 않으면.”
랑쥐가 어깨를 들었다 올렸다.
“그래도 죽으면 아쉬울 거 같아.”
“그거 하나 못하고 죽는다면, 너를 맡길 이유가 없지.”
랑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
붉은 허공을 둥 둥 떠다니던 알칸은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다. 끝도 보이지 않고, 몸이 허공에 떴다.
“지난번은 초원이었어. 지금도?”
하지만 끝도 없이 흘러간 곳은.
“탄니아 성벽?”
다누만 왕국에서의 탄니아 성벽이 보였고, 고타난 숲이 보였다.
열장에 열린 공간은, 고나탄 숲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렇다면, 또 오거를?”
콰직
붉은 허공이 산산이 조각나듯 빠직 깨졌다. 알칸은 순식간에 고타난 숲으로 추락했다.
“아, 아악! 진샬, 이놈의 자식!”
추락하면서도 알칸은 진샬 욕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열장으로 들어온 것이 어이없고, 이해할 수 없고, 화나고, 분노했다.
알칸은 추락하면서 숲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뜨드득
추락하는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나뭇가지들이 알칸의 손에 꺾여졌다. 알칸은 겨우 나무에 매달릴 수 있었다.
“하. 왜 허공에서 떨어트리는 거야. 아주 죽이려고 작정했어.”
생각해보면 지난번 랑쥐와 열장에 들어갔을 땐, 아주 예쁜 초원이었다. 허공에 떨어지지도 않았다. 알칸은 진샬이 자신을 죽이려고 이곳에 보낸 게 맞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알칸은 땅을 내려보았다.
“아, 씨. 떨어지면 진짜 죽을 뻔했잖아.”
그의 팔이 나뭇가지에 스쳐 상처가 났다. 따끔거리는 게 현실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는 거구나.”
드디어 실감했다. 이 숲에서 벗어나려면 끝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눈 깜작할 시간. 열장 밖은 1분도 지나지 않는다고 했어. 그렇다면 나를 구하려고 올 사람이 없다는 건데.”
알칸은 나무를 타고 더 높이 올라갔다. 나뭇가지에 올라타서 하늘을 주시했다. 하늘은 맑고 고요했으나, 드문드문 붉은 허공이 보였다. 진샬의 열장이라는 흔적이었다.
“블랙 드래곤이 이곳에 있을 리 없고.”
고타난 숲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이 있을 린 없었다. 알칸은 숲 주변을 보았다. 다행히 그가 서 있는 나무가 제일 높았는지 그 지역이 훤히 보였다.
“12구역이군.”
다누만 왕국 지도에서처럼 12구역으로 나눠진 곳엔 몬스터의 종류도 달랐다.
“설마 12구역에 몬스터와 마물을 다 해치워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이곳을 나갈 수 있는 거지?”
알칸은 두 눈이 컴컴해졌다. 12구역의 몬스터와 마물을 없애는 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10년? 20년? 아니 30년?”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길이 없다.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이건 실전이 아니야. 감옥이지.”
진샬의 감옥에 갇힌 알칸.
두 눈이 시려왔다.
알칸은 말없이 나뭇가지에 서서 숲을 응시했다. 숲의 모든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했다.
“어쩌면.”
알칸의 콧방울이 시큰거렸다.
“이곳에서 나간다면, 나도 강해져 있다는 거다.”
알칸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코가 붉어졌다.
“10년이든 20년이든 30년이든 견뎌야 한다. 이건 나와의 싸움이야.”
숲의 바람이 알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알칸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시원하네. 싸우기 딱 좋은 시간이고.”
알칸의 눈빛이 밝게 반짝거렸다. 손깍지를 끼고 들어 올렸다.
알칸은 달라졌다.
“진샬. 기다려라.”
알칸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 두렵다고, 억울하다고 주저앉을 수 없었다. 살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알칸은 본격적으로 땅을 주시했다. 무언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저건!”
다누만 왕국에서 처리했던 그 오거였다.
“처음 시작치곤 좋네.”
알칸은 오거의 움직임을 따라 땅으로 내려왔다. 오거가 인간의 냄새를 맡자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야! 나 찾아?”
땅에 내려온 알칸이 오거를 불러세웠다. 오거가 뒤를 돌아봤고, 알칸이 서 있자 입매를 다셨다.
“으거?”
“어. 너 잡으러 왔어.”
알칸은 오거를 보며 입매를 올렸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독자님!!
매일 찾아와주시는 독자님 덕분에 힘이 납니다. 그래서 독자님께 더 재미있는 글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리메이크를 결정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머리 숙여 죄송합니다.
내일 25화를 마지막으로, 리메이크에 들어가겠습니다.
더 재미있는 스토리로 찾아뵙겠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저의 이야기를 읽어주신 독자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꼭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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