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조회 : 1,020 추천 : 1 글자수 : 4,890 자 2022-09-15
탄니아 성벽
성벽 보초 담당자가 성벽 너머에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고, 곧바로 보고에 들어갔다.
“도스만토 백작님 그리고 프레드릭 백작님. 숲에서 살아남은 자가 돌아왔습니다.”
“살아남은 자라니?”
프레드릭 백작이 의심하듯 물었다. 분명 알칸과 로렌이 함께였다. 그들이 데리고 간 군사도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수르만이란 자만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프레드릭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 소식은 왕국에도 곧바로 전해졌다. 왕국에 있던 베라딘 공작이 탄니아 성벽에 도착했다.
“도스만토 백작. 수고가 많소.”
“아닙니다. 다누만 왕국을 위해 희생하겠습니다.”
베라딘 공작은 형식적인 보고를 빠르게 처리하고, 수루만을 불러 세웠다.
“사실이냐?”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프레드릭 백작은 수루만을 신중히 지켜보았다.
‘거짓말이군.’
딱히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오래 살아 온 그의 연륜이었다. 스루만은 두 손을 꼭 잡고, 두 눈알을 계속 굴리고 있었다. 마치 거짓말을 꾸미는 것처럼.
‘알칸 전하는 살아계신다. 구하러 가야 한다.’
하지만 프레드릭 백작은 난감했다. 생존자가 있다면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면 되었다. 하지만 생존자가 없다는 수루만의 말에 지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베라딘 공작은 프레드릭 백작을 잠시 쳐다봤다. 둘이 눈이 마주치자 공작 먼저 눈을 돌렸다. 그리곤 도스만토 백작을 향해 말했다.
“지원군을 보내시오.”
“하지만 지원군을 파병한다면,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의 수가 부족합니다.”
도스만토 백작도 난처했다. 곧 날이 저물텐데,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베라딘 공작의 다음 말에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다누만 왕국 국보인 베르트르 갑옷을 찾으라는 명이오.”
“!!!”
프레드릭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라딘 공작이 그의 표정을 흘겨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여긴 다누만 왕국이요. 그 나라의 법도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프레드릭 백작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그 법도를 따라야지요.”
고개를 숙였다. 알칸을 지켜기 위해서 이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다누만 왕국 법도를 따라 저도 함께 나서겠습니다.”
“좋소. 프레드릭 백작님은 알칸님의 시신을 회수하시고, 저희 약속대로 베르트르 갑옷을 수거하겠소.”
“알겠소.”
프레드릭 백작은 알칸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지금 이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알칸이 살아있어도 위험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어디 있소?”
“무엇을 말입니까?”
“하셀 제국에서 알칸님과 온 한 명이 더 있지 않습니까? 다람쥐도.”
그런데 베라딘 공작인 스피슨까지 찾아 나섰다.
“그들 모두 데리고 가겠소.”
프레드릭 백작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를 회수하면 모두 죽일 계획인 게 분명했다.
‘알칸과 관련된 모든 이를 사살한다는 게 명이란 말인가.’
그들이 갑옷을 회수하고 돌아온다면, 하셀 제국의 군사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테다.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만든 순간, 다누만 왕국은 살아갈 다른 방도를 선택했소.”
“어떤 방도를 말입니까?”
“아주 강한 소수만이 살아남는 것이오. 애초에 미개했던 왕국민은 도움이 되지 않았소. 우린 강한 자들만 살아남게 될 것이요.
인생의 경험이 많은 프레드릭 백작은 베라딘 공작에게 ‘그게 무슨 개소리오?’라고 묻고 싶었다.
“도스만토 백작, 출발 준비를. 프레드릭 백작은 스피슨이라는 자와 다람쥐도 준비하시오.”
하지만 지금 자신과 알칸의 목숨이 베라딘 공작에게 달렸다. 프레드릭 백작은 순순히 고개만 끄덕였다.
*****
오거의 시체가 있는 고타난 지역
알칸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누워있었다. 정신을 놓았다가 잃었다가를 반복했고, 출혈이 심해졌다.
“전하. 제가 엎을 테니 제 등에 기대십시오.”
군사들이 알칸과 로렌을 에워쌌고, 숲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로렌과는 다르게 드래곤 슬래이어들은 분주하게 숲에서 약초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습지 이곳저곳에서 약초를 구했고, 출혈을 멈추는 약을 만들고 있었다.
“멈춰라!”
하지만 로렌은 그들을 믿지 못했다. 이미 한번 탈영을 한 자들이다. 로렌은 이들을 버리고 가야 했다.
“약초만 상처 부위에 놓으시면, 금세 회복됩니다. 저희를 믿으세요.”
“왜 너희를 믿어야 하느냐?”
“알칸님이 저희의 생명을 구하셨잖아요. 저희도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로렌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리고 저희도 이 숲에서 나가고 싶습니다. 정말로요! 그러기 위해선 알칸님이 살아 계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숲 밖으로 도망친 스루만 자식을 잡을 겁니다.”
“우릴 배신한 놈을 잡아 죽여야지, 우리가 왜 알칸님을 죽입니까!”
그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만, 로렌은 믿지 않았다.
“확인시켜봐. 내가 너희를 믿어도 될지.”
드래곤 슬레이어 무리 중 라톤은 자신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보십시오!"
그리고 라톤은 두 눈을 찔끔 감고는, 자신의 팔뚝에 큰 상처를 냈다.
스겅
“으, 으아! 겁나 아프네!”
라톤의 호들갑에, 그가 얼마나 아픈지 다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있는 드래곤 슬래이어들이 팔뚝으로 떨어지는 피를 보며 우왕좌왕거렸다.
“피, 피다.”
“아프겠어. 얼마나 아플까.”
라톤이 그들을 보며 일을 지시했다.
“빨리 약초를 놓으라고. 로렌님이 지켜보잖아.”
“아, 그렇지.”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약초를 상처 부위에 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출혈 부위의 상처가 봉합된 것처럼 출혈이 멈추었다.
“이제 저희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들은 드레곤 슬레이어로서 야생에서 몬스터를 만나 다쳤을 때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 모습에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 셨다.
“왜, 왜 그러십니까? 보고도 못 믿으시는 겁니까?”
“사람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의심이 너무 많네.”
“그러게. 우리도 살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로렌은 높이 든 검을 자신의 팔뚝을 향해 내리쳤다.
스으겅
로렌은 자신의 팔뚝에 큰 상처를 냈고, 바로 피가 쏫구쳤다. 라톤 보다 상처가 깊었다. 하지만 극한 통증에도 차분하게 말했다.
“내 팔에 약초를 놓아라.”
“아, 에, 에.”
라톤이 깜짝 놀라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정신 차렸다. 그리고 약초를 재빨리 로렌의 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로렌의 표정을 살폈다.
‘저기 알칸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 의리가 장난이 아니네.’
라톤은 자신이 약초의 효력을 증명했음에도, 알칸을 위해 희생하는 로렌이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알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스루만이 쓰레기였네. 내가 그런 새끼를 형님으로 모셨다니. 세상엔 이렇게 의리 있는 분들도 계신데 말이야.’
“다 됐습니다. 혀, 형님. 아니 로렌님.”
라톤은 자기 주둥이를 때리며, 말을 정정했다. 로렌은 팔뚝에 출혈이 멈춘 것을 확인하자, 알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하. 제가 약초를 올리겠습니다. 조금만 견디십시오.”
그 순간 모두 알칸의 회복에 집중했다.
숲에는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바람은 알칸의 머릿결을 휘날렸다.
“간지럽네.”
알칸이 두 눈을 떴다.
로렌과 살아남은 군사들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 무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칸은 모든 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뭘 봐?”
모두 눈을 껌뻑이며 시선을 피했다.
“전하. 몸은 어떠십니까?”
로렌의 말에 알칸은 다리에 놓인 약초를 확인했다.
“개운해. 출혈만 멈춘 게 아니야.”
잠을 푹 잔 것처럼 몸이 개운해졌다. 어떤 약초를 사용한지 모르지만, 지금 알칸에겐 상당히 탁월한 약초였다.
로렌이 라톤과 드래곤 슬레이어 무리를 바라봤다. 그들이 뒷머리를 긁적이자 알칸은 이들이 약초를 구한 것을 알아챘다. 알칸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고맙다.”
딱 세 마디.
묵직한 알칸의 음성.
그 말에 라톤의 두 눈이 커졌다. 이런 대우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이거 상남자구만. 로렌님이 이래서 알칸님을 따르는 거구만.'
알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기하게 바로 회복이라도 된 듯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어두워졌군.”
알칸이 출혈이 심해졌고, 이동을 멈추다 보니 금세 어두워졌다. 다행히 이곳은 오거가 지배했던 숲이었다. 다른 몬스터가 침입하지 못했다. 아마 내일이면, 몬스터가 숲을 점령하겠지만, 아직까진 괜찮았다.
“오늘 이곳에서 잠을 잔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어두워졌고, 이동하는 건 무리였다.
“동이 트면, 블랙 드래곤 레어로 이동한다.”
“에, 에?”
모두의 두 눈이 커졌다. 정찰을 나온 군사들도 재수가 없어서 오거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레어로 이동한다는 말에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알칸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지금 나를 구하러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건, 나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베르트르 갑옷을 뺏으러 오겠지.’
알칸은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를 매만졌다.
‘어디 준 걸 다시 뺏어!’
아직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떠나진 않았다. 그렇다면 ‘블랙 드래곤과 싸우러 레어까지 갔으나,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떠났다.’ 이런 상황이라면 바우튼 왕과의 약속을 어긴 건 아니었다.
‘이건 절대 안 뺏긴다!’
알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베라딘 공작과 그의 군사들은 고나탄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죽어있는 오거의 시체를 확인했다.
“오거를 죽였다고?”
“네. 어제 사살당한 거 같습니다.”
베라딘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서 있던 프레드릭 백작은 오거의 시체를 다시 확인했다.
‘마법을 사용하셨군. 그렇다면 아직 살아계신 게 분명하다.’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있습니다.”
마법사들이 오거의 시체를 분석이라도 하듯 달라붙었다.
“알칸님은? 시체를 찾았느냐?”
“없습니다. 군사들의 시신만 있습니다.”
“뭐라고!”
알칸이 살아있다는 말에 베라딘 공작의 뒷덜미가 곤두섰다.
‘성가시게 생겼구만. 찾아내서 죽이든지 해야지.’
알칸이 죽었다면 반지를 깔끔하게 회수했을 테다. 그런데 알칸이 살아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공작님! 여기를 보십시오.”
“이곳에서 취침한 거 같습니다.”
“여기! 이동한 흔적이 있습니다.”
“어느 방향이냐?”
“브, 블랙 드래곤의 레, 레어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레어?”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었다.
분명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남은 군사들과 이동했다는 게 정상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다면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를 회수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으.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베라딘 공작이 뒤를 돌아 프레드릭 백작을 응시했다. 프레드릭 백작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스피슨과 그의 어깨에 올라탄 다람쥐가 보였다.
베라딘 공작이 입매를 올렸다.
‘몬스터가 나온다면. 유인용으로 딱 좋군.’
“레어로 이동한다. 프레드릭 백작님과 스피슨 군은 앞으로 이동하시죠.”
“!”
베라딘 공작의 수작을 알아챈 프레드릭 백작은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은 마법으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스피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알칸의 반려동물인 다람쥐까지도.
“스피슨, 랑쥐님 가시지요.”
“에, 예.”
“찍찍.”
스피슨이 자켓을 열었다.
“랑쥐님 들어가시죠.”
스피슨은 랑쥐를 주머니 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주머니에 들어간 랑쥐는 고개를 빼고 숲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성벽 보초 담당자가 성벽 너머에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고, 곧바로 보고에 들어갔다.
“도스만토 백작님 그리고 프레드릭 백작님. 숲에서 살아남은 자가 돌아왔습니다.”
“살아남은 자라니?”
프레드릭 백작이 의심하듯 물었다. 분명 알칸과 로렌이 함께였다. 그들이 데리고 간 군사도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수르만이란 자만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프레드릭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 소식은 왕국에도 곧바로 전해졌다. 왕국에 있던 베라딘 공작이 탄니아 성벽에 도착했다.
“도스만토 백작. 수고가 많소.”
“아닙니다. 다누만 왕국을 위해 희생하겠습니다.”
베라딘 공작은 형식적인 보고를 빠르게 처리하고, 수루만을 불러 세웠다.
“사실이냐?”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프레드릭 백작은 수루만을 신중히 지켜보았다.
‘거짓말이군.’
딱히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오래 살아 온 그의 연륜이었다. 스루만은 두 손을 꼭 잡고, 두 눈알을 계속 굴리고 있었다. 마치 거짓말을 꾸미는 것처럼.
‘알칸 전하는 살아계신다. 구하러 가야 한다.’
하지만 프레드릭 백작은 난감했다. 생존자가 있다면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면 되었다. 하지만 생존자가 없다는 수루만의 말에 지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베라딘 공작은 프레드릭 백작을 잠시 쳐다봤다. 둘이 눈이 마주치자 공작 먼저 눈을 돌렸다. 그리곤 도스만토 백작을 향해 말했다.
“지원군을 보내시오.”
“하지만 지원군을 파병한다면,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의 수가 부족합니다.”
도스만토 백작도 난처했다. 곧 날이 저물텐데,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베라딘 공작의 다음 말에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다누만 왕국 국보인 베르트르 갑옷을 찾으라는 명이오.”
“!!!”
프레드릭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라딘 공작이 그의 표정을 흘겨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여긴 다누만 왕국이요. 그 나라의 법도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프레드릭 백작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그 법도를 따라야지요.”
고개를 숙였다. 알칸을 지켜기 위해서 이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다누만 왕국 법도를 따라 저도 함께 나서겠습니다.”
“좋소. 프레드릭 백작님은 알칸님의 시신을 회수하시고, 저희 약속대로 베르트르 갑옷을 수거하겠소.”
“알겠소.”
프레드릭 백작은 알칸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지금 이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알칸이 살아있어도 위험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어디 있소?”
“무엇을 말입니까?”
“하셀 제국에서 알칸님과 온 한 명이 더 있지 않습니까? 다람쥐도.”
그런데 베라딘 공작인 스피슨까지 찾아 나섰다.
“그들 모두 데리고 가겠소.”
프레드릭 백작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를 회수하면 모두 죽일 계획인 게 분명했다.
‘알칸과 관련된 모든 이를 사살한다는 게 명이란 말인가.’
그들이 갑옷을 회수하고 돌아온다면, 하셀 제국의 군사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테다.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만든 순간, 다누만 왕국은 살아갈 다른 방도를 선택했소.”
“어떤 방도를 말입니까?”
“아주 강한 소수만이 살아남는 것이오. 애초에 미개했던 왕국민은 도움이 되지 않았소. 우린 강한 자들만 살아남게 될 것이요.
인생의 경험이 많은 프레드릭 백작은 베라딘 공작에게 ‘그게 무슨 개소리오?’라고 묻고 싶었다.
“도스만토 백작, 출발 준비를. 프레드릭 백작은 스피슨이라는 자와 다람쥐도 준비하시오.”
하지만 지금 자신과 알칸의 목숨이 베라딘 공작에게 달렸다. 프레드릭 백작은 순순히 고개만 끄덕였다.
*****
오거의 시체가 있는 고타난 지역
알칸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누워있었다. 정신을 놓았다가 잃었다가를 반복했고, 출혈이 심해졌다.
“전하. 제가 엎을 테니 제 등에 기대십시오.”
군사들이 알칸과 로렌을 에워쌌고, 숲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로렌과는 다르게 드래곤 슬래이어들은 분주하게 숲에서 약초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습지 이곳저곳에서 약초를 구했고, 출혈을 멈추는 약을 만들고 있었다.
“멈춰라!”
하지만 로렌은 그들을 믿지 못했다. 이미 한번 탈영을 한 자들이다. 로렌은 이들을 버리고 가야 했다.
“약초만 상처 부위에 놓으시면, 금세 회복됩니다. 저희를 믿으세요.”
“왜 너희를 믿어야 하느냐?”
“알칸님이 저희의 생명을 구하셨잖아요. 저희도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로렌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리고 저희도 이 숲에서 나가고 싶습니다. 정말로요! 그러기 위해선 알칸님이 살아 계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숲 밖으로 도망친 스루만 자식을 잡을 겁니다.”
“우릴 배신한 놈을 잡아 죽여야지, 우리가 왜 알칸님을 죽입니까!”
그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만, 로렌은 믿지 않았다.
“확인시켜봐. 내가 너희를 믿어도 될지.”
드래곤 슬레이어 무리 중 라톤은 자신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보십시오!"
그리고 라톤은 두 눈을 찔끔 감고는, 자신의 팔뚝에 큰 상처를 냈다.
스겅
“으, 으아! 겁나 아프네!”
라톤의 호들갑에, 그가 얼마나 아픈지 다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있는 드래곤 슬래이어들이 팔뚝으로 떨어지는 피를 보며 우왕좌왕거렸다.
“피, 피다.”
“아프겠어. 얼마나 아플까.”
라톤이 그들을 보며 일을 지시했다.
“빨리 약초를 놓으라고. 로렌님이 지켜보잖아.”
“아, 그렇지.”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약초를 상처 부위에 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출혈 부위의 상처가 봉합된 것처럼 출혈이 멈추었다.
“이제 저희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들은 드레곤 슬레이어로서 야생에서 몬스터를 만나 다쳤을 때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 모습에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 셨다.
“왜, 왜 그러십니까? 보고도 못 믿으시는 겁니까?”
“사람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의심이 너무 많네.”
“그러게. 우리도 살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로렌은 높이 든 검을 자신의 팔뚝을 향해 내리쳤다.
스으겅
로렌은 자신의 팔뚝에 큰 상처를 냈고, 바로 피가 쏫구쳤다. 라톤 보다 상처가 깊었다. 하지만 극한 통증에도 차분하게 말했다.
“내 팔에 약초를 놓아라.”
“아, 에, 에.”
라톤이 깜짝 놀라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정신 차렸다. 그리고 약초를 재빨리 로렌의 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로렌의 표정을 살폈다.
‘저기 알칸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 의리가 장난이 아니네.’
라톤은 자신이 약초의 효력을 증명했음에도, 알칸을 위해 희생하는 로렌이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알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스루만이 쓰레기였네. 내가 그런 새끼를 형님으로 모셨다니. 세상엔 이렇게 의리 있는 분들도 계신데 말이야.’
“다 됐습니다. 혀, 형님. 아니 로렌님.”
라톤은 자기 주둥이를 때리며, 말을 정정했다. 로렌은 팔뚝에 출혈이 멈춘 것을 확인하자, 알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하. 제가 약초를 올리겠습니다. 조금만 견디십시오.”
그 순간 모두 알칸의 회복에 집중했다.
숲에는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바람은 알칸의 머릿결을 휘날렸다.
“간지럽네.”
알칸이 두 눈을 떴다.
로렌과 살아남은 군사들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 무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칸은 모든 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뭘 봐?”
모두 눈을 껌뻑이며 시선을 피했다.
“전하. 몸은 어떠십니까?”
로렌의 말에 알칸은 다리에 놓인 약초를 확인했다.
“개운해. 출혈만 멈춘 게 아니야.”
잠을 푹 잔 것처럼 몸이 개운해졌다. 어떤 약초를 사용한지 모르지만, 지금 알칸에겐 상당히 탁월한 약초였다.
로렌이 라톤과 드래곤 슬레이어 무리를 바라봤다. 그들이 뒷머리를 긁적이자 알칸은 이들이 약초를 구한 것을 알아챘다. 알칸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고맙다.”
딱 세 마디.
묵직한 알칸의 음성.
그 말에 라톤의 두 눈이 커졌다. 이런 대우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이거 상남자구만. 로렌님이 이래서 알칸님을 따르는 거구만.'
알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기하게 바로 회복이라도 된 듯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어두워졌군.”
알칸이 출혈이 심해졌고, 이동을 멈추다 보니 금세 어두워졌다. 다행히 이곳은 오거가 지배했던 숲이었다. 다른 몬스터가 침입하지 못했다. 아마 내일이면, 몬스터가 숲을 점령하겠지만, 아직까진 괜찮았다.
“오늘 이곳에서 잠을 잔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어두워졌고, 이동하는 건 무리였다.
“동이 트면, 블랙 드래곤 레어로 이동한다.”
“에, 에?”
모두의 두 눈이 커졌다. 정찰을 나온 군사들도 재수가 없어서 오거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레어로 이동한다는 말에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알칸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지금 나를 구하러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건, 나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베르트르 갑옷을 뺏으러 오겠지.’
알칸은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를 매만졌다.
‘어디 준 걸 다시 뺏어!’
아직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떠나진 않았다. 그렇다면 ‘블랙 드래곤과 싸우러 레어까지 갔으나,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떠났다.’ 이런 상황이라면 바우튼 왕과의 약속을 어긴 건 아니었다.
‘이건 절대 안 뺏긴다!’
알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베라딘 공작과 그의 군사들은 고나탄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죽어있는 오거의 시체를 확인했다.
“오거를 죽였다고?”
“네. 어제 사살당한 거 같습니다.”
베라딘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서 있던 프레드릭 백작은 오거의 시체를 다시 확인했다.
‘마법을 사용하셨군. 그렇다면 아직 살아계신 게 분명하다.’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있습니다.”
마법사들이 오거의 시체를 분석이라도 하듯 달라붙었다.
“알칸님은? 시체를 찾았느냐?”
“없습니다. 군사들의 시신만 있습니다.”
“뭐라고!”
알칸이 살아있다는 말에 베라딘 공작의 뒷덜미가 곤두섰다.
‘성가시게 생겼구만. 찾아내서 죽이든지 해야지.’
알칸이 죽었다면 반지를 깔끔하게 회수했을 테다. 그런데 알칸이 살아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공작님! 여기를 보십시오.”
“이곳에서 취침한 거 같습니다.”
“여기! 이동한 흔적이 있습니다.”
“어느 방향이냐?”
“브, 블랙 드래곤의 레, 레어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레어?”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었다.
분명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남은 군사들과 이동했다는 게 정상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다면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를 회수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으.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베라딘 공작이 뒤를 돌아 프레드릭 백작을 응시했다. 프레드릭 백작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스피슨과 그의 어깨에 올라탄 다람쥐가 보였다.
베라딘 공작이 입매를 올렸다.
‘몬스터가 나온다면. 유인용으로 딱 좋군.’
“레어로 이동한다. 프레드릭 백작님과 스피슨 군은 앞으로 이동하시죠.”
“!”
베라딘 공작의 수작을 알아챈 프레드릭 백작은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은 마법으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스피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알칸의 반려동물인 다람쥐까지도.
“스피슨, 랑쥐님 가시지요.”
“에, 예.”
“찍찍.”
스피슨이 자켓을 열었다.
“랑쥐님 들어가시죠.”
스피슨은 랑쥐를 주머니 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주머니에 들어간 랑쥐는 고개를 빼고 숲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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