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조회 : 1,141 추천 : 2 글자수 : 4,541 자 2022-09-19
"블랙 드래곤, 레어를 떠났다!”
“살았다! 살았어!!”
다누만 왕국에 왕국민의 환호 소리 울려 퍼졌다. 그리고 라톤이 퍼트린 소문이 다누만 왕국에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이야기꾼은 전쟁에 있었던 소문을 모아 이야기로 만들었고, 소문이 퍼져 민담이 되고 전설이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구만. 알칸님이 이렇게 확 확 획 획 검을 내리치며, 오거를 죽였다는구만!”
“와! 진짜인가!”
“그리고 알칸님이 블랙 드레곤을 죽이러 레어까지 갔다는 건 다 알고 있지?”
“그거 거짓말 아닌가?
“아닐세. 내가 아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한 둘이 아니야. 모두 목격담일세. 글쎄 알칸님이 레어에 다가가는 순간, 블랙 드래곤이 도망갔다는군.”
이야기꾼의 말재주에 사람들의 두 눈이 똥그래졌다. 방금 오거와 블랙 드래곤을 마주친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는지 두 손에 땀도 찼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두기 시작했다.
“그럼 베르트르 갑옷은?”
“국보라지만, 다누만 왕국을 살렸네. 폐하께서 약속을 지켜야지 않겠는가.”
“그래도 아깝군.”
“자네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따지나. 허허허.”
왕국민은 블랙 드래곤이 떠난 것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
왕국에 있는 바우튼 국왕은 근심이 깊어갔다. 그는 당시 상황을 보고 받기 시작했다. 도스만토 백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입니다. 알칸님이 블랙 드래곤 레어까지 진입했고, 어찌 된 영문인지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유가?”
“마법사들의 추측이지만, 레어의 습도가 맞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으로 더 조사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으.”
아까웠다. 삼일만 견디면 될 일을.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넋 놓고 베르트르 갑옷만 뺏겼다.
“으. 베르딘 공작은 뭘 하고 있던 게냐? 사망 원인은?”
“그것이. 마법 흔적이 있었습니다.”
“프레드릭 백작이 마법사니 당연한 거 아닌가?”
“오거도 물의 구체를 활용한 마법으로 사망했습니다. 베라딘 공작과 같은 수법입니다.”
“뭐라?”
오거를 죽인 후 베라딘 공작이 도착했었다. 그런데 오거와 같은 방식으로 사망한 건 시간이 맞지 않았다.
“알칸님 군사 중에 마법사는 없었습니다.”
“이상하군.”
오거를 죽일만한 마법사라면 적어도 4써클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검사들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했지만, 사망 원인과 누가 그랬는지 따질 시간이 없었다. 바우튼 국왕은 알칸의 조력자가 있다고 넘겼다. 바우튼 국왕은 국보를 찾는 것이 시급했다.
“곧 성대한 축제가 열릴 것이다. 꼭 되찾아야 한다!”
바우튼 국왕의 눈에 핏줄이 섰다. 두 주먹을 쥐었다.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빠져나간 마당에, 눈 뜨고 국보를 뺏길 순 없다. 알칸은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수단을 가리지 말고. 다누만 왕국의 국보를 지켜라.”
“명 받들겠습니다.”
바우튼 국왕의 눈매가 매섭게 돌변했다. 급한 마음에 베르트르 갑옷을 줬었다. 그렇다고 다시 뺏는다면 다누만 왕국의 위상이 낮아질 게 뻔했다.
‘그렇다면 알칸을 죽여서라도.’
국보를 지켜야겠다는 바우튼 국왕이 자신의 욕망을 숨겼다.
*****
하셀 제국.
엘리제 황비는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그녀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뭐라?”
호흡이 빨라지며, 성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게 안 죽고, 살았다니?”
알칸이 살아있다는 것이 분했다. 그리고 그가 다누만 왕국으로 떠나던 날 했던 약조가 떠올랐다.
-알칸, 네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 검은 너의 것이란다-
목덜미가 당겼다. 그녀가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내 테우스라만테 검! 내 아들에게 줄 검을!!”
분명 알칸도 그녀의 아들이지만, 진짜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알칸도 그녀를 진짜 어머니라 생각하지 않듯이.
그녀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목덜미를 주물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검을 뺏어올 궁리를 했다.
“살아 돌아온다면. 살아 돌아온다면?”
회심의 미소가 비쳤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목덜미에 대었던 손을 놓았다.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비쳤다.
“살아 돌아오지 않으면 될 것을.”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서신을 태워버리고, 시녀장을 불렀다.
“아바마마가 보고 싶구나. 당장.”
“네. 황비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엘리젤 황비의 친아비, 베베른 후작. 고위 귀족 집안으로 제국에 큰 힘을 행사했다. 그런 베베른 후작가의 가보였던, 테우스라만데 검이 알칸에게 넘어가게 생겼다.
‘아바마마가 당연히 참지 않겠지.’
엘리젤 황비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승리의 축제는 한 달 동안 진행될 테지만, 알칸은 축제 하루만 머물기로 했다.
‘이전 삶에서도 하루 있다 갔으니까. 그리고 너와도 작별이구나!’
알칸은 작은 상자에 들어가 잠을 자는 다람쥐를 보고 환하게 웃어댔다.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는 축제를 마치고, 하셀 제국으로 가면 랑쥐도 레어로 돌아 갈 테다.
‘후련하군.’
진샬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신 볼 일 없다는 생각에 미소 지어졌다.
“전하. 그렇게 좋으십니까?”
만찬 전 준비를 하던 로렌의 알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그럼.”
알칸의 대답에 로렌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찬이 끝나고, 내일 떠날 채비는 다 마쳤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수루만이라는 자는 탈영과 거짓을 고한 죄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라톤과 그 일당은?”
“탈영에 관한 죗값을 받는다고 합니다.”
탈영은 죄다.
누가 전쟁에서 도망을 간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베라딘 공작의 군사들과 마주했을 때,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들도 싸웠었다. 어려운 상황에선 항상 도피만 해왔던 그들의 손에 창과 검이 들렸다는 건 아주 큰 용기를 내었단 것이다.
“다신 볼 일 없겠네. 그리고 이젠 정신 차리고 살면 좋겠어.”
알칸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바람처럼 드래곤 슬레이어 라톤은 정신 차린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하셀 제국으로 떠날 것이다.
*****
다누만 왕국 만찬장.
작정하고 준비한 듯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번쩍이는 샹들리에 반짝이는 보석 장식들. 벽면에는 고가의 액자들이 보였다.
귀족들은 와인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만찬장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우린 드래곤 슬레이어의 왕국입니다! 살아있음을 즐깁시다!”
“마셔라, 마셔라!”
아주 옛날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존재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존심이 강했고, 축제와 파티를 거창하게 열며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정작 현재 제대로 된 드래곤 슬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죽음의 기운이 깃든 곳이었다. 왕국민을 버리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겠다고 했던 다누만 왕국이었다. 그런 귀족들이 이곳에 모두 모였다.
알칸은 만찬장을 쭉 둘러보았다. 별 필요 없는 귀족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저들과 할 얘기도 없고, 일찍 들어가야겠네.’
알칸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를 알아본 가단니안 왕국에서 온 타리노 사신이 그를 잡아 세웠다.
“하셀 제국 알칸님. 이제 오셨군요. 제가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목도 없어 보일 정도로 살이 찐 남성이 알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다니안 왕국 사신 타리노였다. 그를 처음 본 알칸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저를 왜요?”
“저쪽 조용한 곳으로.”
알칸의 표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의 팔을 잡아 구석으로 이끌었다.
‘뭐야, 이 자식.’
알칸이 타리노의 팔을 거칠게 쳐내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로렌이 그를 경계하며 알칸 앞에 섰다.
“뭐 하는 게냐!”
그제야 타리노가 주눅이 들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셀 제국의 1황자님이시다. 감히 그런 행동을!”
“송구합니다. 그것이.”
타리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알칸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굳이, 애써 말을 꺼냈다.
“저희 왕국에서 구매할 생각입니다. 가격 협상을 하려고 한 것인데. 제 행동이 지나쳤다면 죄송합니다.”
“뭐를 구매해?”
로렌의 질문에 타니노의 눈빛이 반짝였다. 주변 눈치를 보며 알칸을 향해 속삭였다.
“테우스라만테 검과 베르트르 갑옷. 가격을 제시하시면 구매하겠습니다.”
알칸이 목숨을 걸고 얻어낸 검과 갑옷.
가단니안 왕국에선 이렇게 생각했다.
-하셀 제국 베베른 후작가의 가보인 테우스라만테 검은 살 수 없다. 하지만 알칸의 것이라면 가능하다.-
-다누만 왕국의 국보인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알칸의 것이라면 가능하다.-
베베른 후작가와 다누만 왕국에선 구매할 수 없었던 값진 물건이다. 그것이 알칸의 것이라면 세상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알칸이 입매를 올리며 타리노에게 다가섰다.
“자네?”
“네에. 말씀하십시오. 얼마면 되겠습니까?”
타리노가 두 손을 비벼댔다.
“죽을까?”
“에, 에?”
“지금 나한테 죽으려고 기를 쓰는 거 아닌가?”
타리노의 두 눈을 똥그래졌다. 비벼대던 손을 공손히 앞으로 두었다. 일칸이 테우스라만테 검을 손에 들었다.
“어디를 먼저 썰어줄까? 목에 접힌 목살부터 썰어줄까? 여기 뱃살부터 썰어줄가?”
테우스라만테 검이 타니노의 살결을 건드렸다. 매우 차가웠다.
“에, 에에?”
타리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알칸이 눈빛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알칸도 테우스라만테 검과 베르트르 갑옷을 공짜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가 실언했습니다.”
“내 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자에게 전해.”
알칸이 타리노를 내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남의 것을 함부로 탐하지 마라. 정 갖고 싶으면 직접 와서 가져가라고.”
“에, 에. 에. 알아들었습니다.”
타리노의 목살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타리노는 알칸이 힘을 숨겼다 확신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처음 알칸에게 접근할 때와는 다르게 바닥에 기다시피 몸을 숙이며 알칸을 떠나갔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알칸이 말에 로렌이 주변을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곳엔 그런 날파리가 잔뜩 모여있는 거 같습니다.”
이전 삶에선 이런 자들이 많이 꼬였다. 한심하게 이런 얘기를 끝까지 들었고, 뒤늦게 온 로렌이 해결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로렌이 없어도 혼자 상황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래. 들어가자. 내일 본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일찍 들어가지, 뭐.”
“예. 전하.”
알칸이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 국왕이 만찬장에 들어섰다. 순식간에 파도가 갈라지듯 귀족들이 국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들은 경배하듯 허리를 숙였다.
“다누만 왕국의 국왕 폐하를 뵈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왕국에 존경을!”
국왕이 왕좌에 앉으며 알칸을 응시했다. 알칸을 보자 그의 눈밑이 바르르 떨렸고, 애써 감추려는 듯 두 주먹을 쥐었다.
“살았다! 살았어!!”
다누만 왕국에 왕국민의 환호 소리 울려 퍼졌다. 그리고 라톤이 퍼트린 소문이 다누만 왕국에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이야기꾼은 전쟁에 있었던 소문을 모아 이야기로 만들었고, 소문이 퍼져 민담이 되고 전설이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구만. 알칸님이 이렇게 확 확 획 획 검을 내리치며, 오거를 죽였다는구만!”
“와! 진짜인가!”
“그리고 알칸님이 블랙 드레곤을 죽이러 레어까지 갔다는 건 다 알고 있지?”
“그거 거짓말 아닌가?
“아닐세. 내가 아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한 둘이 아니야. 모두 목격담일세. 글쎄 알칸님이 레어에 다가가는 순간, 블랙 드래곤이 도망갔다는군.”
이야기꾼의 말재주에 사람들의 두 눈이 똥그래졌다. 방금 오거와 블랙 드래곤을 마주친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는지 두 손에 땀도 찼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두기 시작했다.
“그럼 베르트르 갑옷은?”
“국보라지만, 다누만 왕국을 살렸네. 폐하께서 약속을 지켜야지 않겠는가.”
“그래도 아깝군.”
“자네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따지나. 허허허.”
왕국민은 블랙 드래곤이 떠난 것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
왕국에 있는 바우튼 국왕은 근심이 깊어갔다. 그는 당시 상황을 보고 받기 시작했다. 도스만토 백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입니다. 알칸님이 블랙 드래곤 레어까지 진입했고, 어찌 된 영문인지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유가?”
“마법사들의 추측이지만, 레어의 습도가 맞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으로 더 조사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으.”
아까웠다. 삼일만 견디면 될 일을.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넋 놓고 베르트르 갑옷만 뺏겼다.
“으. 베르딘 공작은 뭘 하고 있던 게냐? 사망 원인은?”
“그것이. 마법 흔적이 있었습니다.”
“프레드릭 백작이 마법사니 당연한 거 아닌가?”
“오거도 물의 구체를 활용한 마법으로 사망했습니다. 베라딘 공작과 같은 수법입니다.”
“뭐라?”
오거를 죽인 후 베라딘 공작이 도착했었다. 그런데 오거와 같은 방식으로 사망한 건 시간이 맞지 않았다.
“알칸님 군사 중에 마법사는 없었습니다.”
“이상하군.”
오거를 죽일만한 마법사라면 적어도 4써클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검사들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했지만, 사망 원인과 누가 그랬는지 따질 시간이 없었다. 바우튼 국왕은 알칸의 조력자가 있다고 넘겼다. 바우튼 국왕은 국보를 찾는 것이 시급했다.
“곧 성대한 축제가 열릴 것이다. 꼭 되찾아야 한다!”
바우튼 국왕의 눈에 핏줄이 섰다. 두 주먹을 쥐었다.
블랙 드래곤이 레어를 빠져나간 마당에, 눈 뜨고 국보를 뺏길 순 없다. 알칸은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수단을 가리지 말고. 다누만 왕국의 국보를 지켜라.”
“명 받들겠습니다.”
바우튼 국왕의 눈매가 매섭게 돌변했다. 급한 마음에 베르트르 갑옷을 줬었다. 그렇다고 다시 뺏는다면 다누만 왕국의 위상이 낮아질 게 뻔했다.
‘그렇다면 알칸을 죽여서라도.’
국보를 지켜야겠다는 바우튼 국왕이 자신의 욕망을 숨겼다.
*****
하셀 제국.
엘리제 황비는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그녀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뭐라?”
호흡이 빨라지며, 성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게 안 죽고, 살았다니?”
알칸이 살아있다는 것이 분했다. 그리고 그가 다누만 왕국으로 떠나던 날 했던 약조가 떠올랐다.
-알칸, 네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 검은 너의 것이란다-
목덜미가 당겼다. 그녀가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내 테우스라만테 검! 내 아들에게 줄 검을!!”
분명 알칸도 그녀의 아들이지만, 진짜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알칸도 그녀를 진짜 어머니라 생각하지 않듯이.
그녀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목덜미를 주물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검을 뺏어올 궁리를 했다.
“살아 돌아온다면. 살아 돌아온다면?”
회심의 미소가 비쳤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목덜미에 대었던 손을 놓았다.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비쳤다.
“살아 돌아오지 않으면 될 것을.”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서신을 태워버리고, 시녀장을 불렀다.
“아바마마가 보고 싶구나. 당장.”
“네. 황비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엘리젤 황비의 친아비, 베베른 후작. 고위 귀족 집안으로 제국에 큰 힘을 행사했다. 그런 베베른 후작가의 가보였던, 테우스라만데 검이 알칸에게 넘어가게 생겼다.
‘아바마마가 당연히 참지 않겠지.’
엘리젤 황비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승리의 축제는 한 달 동안 진행될 테지만, 알칸은 축제 하루만 머물기로 했다.
‘이전 삶에서도 하루 있다 갔으니까. 그리고 너와도 작별이구나!’
알칸은 작은 상자에 들어가 잠을 자는 다람쥐를 보고 환하게 웃어댔다.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는 축제를 마치고, 하셀 제국으로 가면 랑쥐도 레어로 돌아 갈 테다.
‘후련하군.’
진샬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신 볼 일 없다는 생각에 미소 지어졌다.
“전하. 그렇게 좋으십니까?”
만찬 전 준비를 하던 로렌의 알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그럼.”
알칸의 대답에 로렌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찬이 끝나고, 내일 떠날 채비는 다 마쳤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수루만이라는 자는 탈영과 거짓을 고한 죄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라톤과 그 일당은?”
“탈영에 관한 죗값을 받는다고 합니다.”
탈영은 죄다.
누가 전쟁에서 도망을 간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베라딘 공작의 군사들과 마주했을 때,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들도 싸웠었다. 어려운 상황에선 항상 도피만 해왔던 그들의 손에 창과 검이 들렸다는 건 아주 큰 용기를 내었단 것이다.
“다신 볼 일 없겠네. 그리고 이젠 정신 차리고 살면 좋겠어.”
알칸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바람처럼 드래곤 슬레이어 라톤은 정신 차린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하셀 제국으로 떠날 것이다.
*****
다누만 왕국 만찬장.
작정하고 준비한 듯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번쩍이는 샹들리에 반짝이는 보석 장식들. 벽면에는 고가의 액자들이 보였다.
귀족들은 와인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만찬장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우린 드래곤 슬레이어의 왕국입니다! 살아있음을 즐깁시다!”
“마셔라, 마셔라!”
아주 옛날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존재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존심이 강했고, 축제와 파티를 거창하게 열며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정작 현재 제대로 된 드래곤 슬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죽음의 기운이 깃든 곳이었다. 왕국민을 버리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겠다고 했던 다누만 왕국이었다. 그런 귀족들이 이곳에 모두 모였다.
알칸은 만찬장을 쭉 둘러보았다. 별 필요 없는 귀족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저들과 할 얘기도 없고, 일찍 들어가야겠네.’
알칸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를 알아본 가단니안 왕국에서 온 타리노 사신이 그를 잡아 세웠다.
“하셀 제국 알칸님. 이제 오셨군요. 제가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목도 없어 보일 정도로 살이 찐 남성이 알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다니안 왕국 사신 타리노였다. 그를 처음 본 알칸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저를 왜요?”
“저쪽 조용한 곳으로.”
알칸의 표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의 팔을 잡아 구석으로 이끌었다.
‘뭐야, 이 자식.’
알칸이 타리노의 팔을 거칠게 쳐내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로렌이 그를 경계하며 알칸 앞에 섰다.
“뭐 하는 게냐!”
그제야 타리노가 주눅이 들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셀 제국의 1황자님이시다. 감히 그런 행동을!”
“송구합니다. 그것이.”
타리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알칸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굳이, 애써 말을 꺼냈다.
“저희 왕국에서 구매할 생각입니다. 가격 협상을 하려고 한 것인데. 제 행동이 지나쳤다면 죄송합니다.”
“뭐를 구매해?”
로렌의 질문에 타니노의 눈빛이 반짝였다. 주변 눈치를 보며 알칸을 향해 속삭였다.
“테우스라만테 검과 베르트르 갑옷. 가격을 제시하시면 구매하겠습니다.”
알칸이 목숨을 걸고 얻어낸 검과 갑옷.
가단니안 왕국에선 이렇게 생각했다.
-하셀 제국 베베른 후작가의 가보인 테우스라만테 검은 살 수 없다. 하지만 알칸의 것이라면 가능하다.-
-다누만 왕국의 국보인 베르트르 갑옷의 반지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알칸의 것이라면 가능하다.-
베베른 후작가와 다누만 왕국에선 구매할 수 없었던 값진 물건이다. 그것이 알칸의 것이라면 세상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알칸이 입매를 올리며 타리노에게 다가섰다.
“자네?”
“네에. 말씀하십시오. 얼마면 되겠습니까?”
타리노가 두 손을 비벼댔다.
“죽을까?”
“에, 에?”
“지금 나한테 죽으려고 기를 쓰는 거 아닌가?”
타리노의 두 눈을 똥그래졌다. 비벼대던 손을 공손히 앞으로 두었다. 일칸이 테우스라만테 검을 손에 들었다.
“어디를 먼저 썰어줄까? 목에 접힌 목살부터 썰어줄까? 여기 뱃살부터 썰어줄가?”
테우스라만테 검이 타니노의 살결을 건드렸다. 매우 차가웠다.
“에, 에에?”
타리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알칸이 눈빛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알칸도 테우스라만테 검과 베르트르 갑옷을 공짜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가 실언했습니다.”
“내 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자에게 전해.”
알칸이 타리노를 내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남의 것을 함부로 탐하지 마라. 정 갖고 싶으면 직접 와서 가져가라고.”
“에, 에. 에. 알아들었습니다.”
타리노의 목살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타리노는 알칸이 힘을 숨겼다 확신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처음 알칸에게 접근할 때와는 다르게 바닥에 기다시피 몸을 숙이며 알칸을 떠나갔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알칸이 말에 로렌이 주변을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곳엔 그런 날파리가 잔뜩 모여있는 거 같습니다.”
이전 삶에선 이런 자들이 많이 꼬였다. 한심하게 이런 얘기를 끝까지 들었고, 뒤늦게 온 로렌이 해결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로렌이 없어도 혼자 상황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래. 들어가자. 내일 본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일찍 들어가지, 뭐.”
“예. 전하.”
알칸이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 국왕이 만찬장에 들어섰다. 순식간에 파도가 갈라지듯 귀족들이 국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들은 경배하듯 허리를 숙였다.
“다누만 왕국의 국왕 폐하를 뵈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왕국에 존경을!”
국왕이 왕좌에 앉으며 알칸을 응시했다. 알칸을 보자 그의 눈밑이 바르르 떨렸고, 애써 감추려는 듯 두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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