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ㅡ 불의 왕
조회 : 777 추천 : 0 글자수 : 4,266 자 2022-07-26
어쩐지 오늘은 술맛이 쓰다. 마유주를 잘못 보관해서 상하기라도 한 건가.
카악-. 퉷.
‘내 이놈의 술창고 놈들을 그냥 확!...어..어?’
그런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잠이 매섭게 밀려 들어온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눈을 부릅떠보지만, 천근의 무게를 이길 수는 없었다. 서서히 그의 눈이 감긴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의 시야에 흐릿한 화마(火魔)가 나타나 춤을 추었다.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이다.
“칸과 그 일족들을 모두 찾아내 죽여라! 단 한놈도 놓쳐선 안 된다!!”
사방에서 불이 춤춘다.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칼들이 연주한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노래한다. 파괴와 살육이 빚어내는 공연에 질려버린 것일까. 달도 구름에 숨어버렸다.
“반로족이다!! 반로족이 쳐들어왔다!”
아직 살아남은 누군가가 애타게 소리쳐보지만 대부분 수면제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 누군가도 이내 반로족의 칼에 쓰러지고 말았다. 인근 부족들의 패권을 거머쥐었던 구야족이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야습해온 반로족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저 잠에 취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차라리 행복한 것이었다. 깨어있는 자들의 악몽에 비한다면.
“칸이다! 칸을 사로잡았다!!”
어디선가 큰 함성이 들려온다. 반로족 전사들이 한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칸을 보기 위해서다. 오랜 시간 준비하고 공들여 온 일의 성공이 드디어 목전에 다다랐다. 반로족의 족장, 진아시가 크게 기꺼워하며 전사들을 독려했다.
“끝이 머지않았다! 칸의 일족들을 놓치지 말고 모두 잡아들이고, 칸은 이리로 데려오라!”
전사들이 수면제에 취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지 못하는 누군가를 질질 끌고 온다. 약이 얼마나 독했는지 그는 제 한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양옆에서 손을 놓자 털썩 쓰러져 비틀거리는 모습이 사뭇 안타깝다. 진아시는 그런 그를 보며 빙긋 웃고는 허리춤의 칼을 꺼내 들었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네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시간도 이걸로 끝이로구나.”
날카로운 칼날이 쓰러진 그의 목에 닿았다. 약에 취해 몽롱한 정신이지만 그는 느꼈다. 시리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시리다. 마지막으로 마셨던 마유주의 쓴맛이 문득 생각났다. 화마(火魔)가 다시 춤춘다.
‘여보...가야...가려.. 다들...’
그는 칸이었다.
*
“가야..! 가야!! 일어나라, 어서!”
한 남자가 애타게 침상의 아이를 흔들어 깨운다. 열 두 셋이나 되었을까.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칼을 지닌, 선이 고와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아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에 억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떠본다. 에메랄드 빛을 띈 눈동자가 남자를 응시한다.
“아.. 바라기 삼촌? 하암...무슨 일이에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 바라기는 급하게 가야의 입을 막았다. 가야의 눈에 놀람이 차오른다. 귀를 기울여보니 시끄러운 말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
“쉿! 가야. 지금 반로족이 쳐들어왔다. 얼른 도망쳐야해. 절대 소리를 내선 안 된단다.”
바라기의 낮은 목소리에 가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어린 아이였음에도 놀랍게도 침착하다. 이들이 황폐한 대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일까.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도하는 환경 때문일까. 가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조용히 바라기에게 말했다.
“삼촌. 그럼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됐어?”
“그게 말이다. 칸은...”
가야의 말에 바라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런 그를 보며 가야는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음은 터트리지 않는다. 슬픔을 삼켰다.
“너는 다행히 마을 외곽의 내 집에서 잤으니 아직 들키지 않았지만 가려는 아무래도...”
안절부절대며 쭈뼛거리는 바라기의 말.
“됐어. 삼촌. 일단 가자. 살아남아야지.”
가야가 싱긋 웃었다. 웃음이 슬프다. 바라기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가야를, 칸의 후예를 살려서 도망치게 해야한다. 그것이 자신을 이 땅에 내려보낸 왕의 뜻이리라.
*
생각보다 반로족의 포위망은 엉성했다. 쉬운 전투에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제일의 목표였던 칸을 해치운 기쁨에 늘어진 탓일까. 왕년에 구야족 제일의 사냥꾼이었던 바라기는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운 채 사방을 경계하며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가야 역시 날쌘 몸놀림으로 그런 바라기의 뒤를 쫓았다.
“조금만 더 힘내거라. 노란 숲 동굴에 내 휴식처 아직 기억하지? 거기까지만 가면 쉴 수 있을거다.”
어린아이의 몸이라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도 묵묵히 쫓아오는 것이 대견했다. 가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달렸다. 아쉽게도 말은 구하지 못 했다. 목마장에는 이미 반로족 전사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 노란 숲 어귀가 보인다. 숲에선 말을 달리기 쉽지 않다. 그곳은 사냥꾼인 바라기의 영역. 저기까지만 가면 살 수 있다. 그 찰나.
쐐애액-.
화살이 덤벼든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뾰족하게 들렸다. 순간 바라기는 뒤돌아서 쫓아오는 가야를 붙잡아 몸을 굴렸다. 자갈에 쓸렸는지 까진 상처 위로 피가 맺힌다. 쓰릴 법도 한데 바라기는 아랑곳 않고 가야를 안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매복이다. 숲의 입구를 적들이 지키고 있었다. 혹시나 도망치는 구야족들을 잡아들이기 위함이리라.
“젠장..! 가야! 내가 미끼가 될테니 먼저 그 동굴로 가있거라!!”
“삼...”
가야는 바라기의 굳은 얼굴을 보고 말을 삼켰다. 어떻게든 자신을 살리려 하는 바라기의 의지를 느꼈다. 자신은 그 의지에 부응해야 한다. 살아남아야만 한다.
“저기다! 구야족 놈들이 저기 있다!”
“숲으로 들어가면 일이 귀찮아져. 얼른 해치워버려!”
어떻게든 칸의 후예인 자신을 살리려 하는 충의, 구야족의 씨를 말리겠다고 모두 죽이려 드는 살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가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바라기의 품안에서 그저 슬픔을 삭이는 것만이 가야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야! 얼른 가거라!”
바라기는 가야를 내려놓고 적들을 향해 마주보고 달렸다. 미친 놈이라며 적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에도 가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달렸다. 가야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바라기를 놓을 수 없을 것이기에.
“오너라! 이 비열한 놈들!! 구야족의 대전사, 바라기가 상대해주마!”
적들이 화살을 쏘았다. 바라기에게 화살이 쏘아진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 바라기는 없다. 민첩하게 옆으로 돌아나와 크게 소리치며 계속 적들을 도발했다.
“언젠가 불의 왕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수치를 모르는 놈들아!”
“이 놈이..?”
구야족과 반로족 이 외에도 모든 부족들이 숭상하는 신, 불의 왕의 이름을 꺼내자 적들이 흠칫 얼굴을 굳혔다. 자신들도 정당하지 못 한 방법으로 이겼음을 알기에 신의 이름 앞에 위축된 것이다. 반로족 전사들은 이를 갈며 바라기를 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바라기는 싱긋 웃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가야! 나도 너를 위해서 기필코 살아남겠다!’
*
“칸의 일족들은 어찌 되었나.”
진아시는 차가운 눈으로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잡혀있는 구야족 포로들을 훑어 보았다. 시간이 지나 약효가 어느 정도 가신 건지, 정신을 하나 둘 차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 했다. 반로족 전사들에게 거친 욕설을 퍼붓다 목이 베여 죽거나, 이건 꿈이라고 눈물 흘리며 벌벌 떨 뿐이었다.
“어미는 잡았으나.. 이미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으려 한 뒤였습니다. 다행히 숨이 끊기기 전에 찾아 구하긴 했으나, 상태가 썩 좋지는 못 하답니다.”
“하, 역시 늑대의 짝이로군. 어차피 그쪽은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자식들은?”
부족민들 사이에서 예로부터 칸은 늑대의 후예라는 전승이 있었다.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칸의 일족들의 가족애는 늑대처럼 끈끈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칸이나 그 아내가 죽으면 머잖아 배우자도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칸을 죽인 시점에서 그의 아내를 잡는 것은 애당초 상정 외였다. 칸을 처치한 진아시의 다음 목표는 바로 칸의 자식들이었다.
“그것이.. 아들과 딸, 둘 모두 행방이 묘연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약 탄 술을 마시지 않기도 했고, 하필 둘 다 예상한 숙소가 아닌 다른 숙소에 머물렀던 듯합니다...”
까드득-.
진아시가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솥뚜껑 같은 손에 쥐여있던 검자루가 우그러진다.
“샅샅이 뒤져라. 포로놈들에게도 정보를 캐물어서 갈 만한 곳을 알아내!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절대!”
진아시는 다음에 꺼내려던 말을 애써 눌러 삼켰다.
‘그들이 복수심에 미쳐 날뛰는 거대한 늑대가 되기 전에.’
*
노란 숲은 구야족의 영역 중에서 제일 외곽에 위치해있었다. 길도 멀고 지형도 험난한데 반해 사냥감이 적어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만큼 바라기는 사냥꾼으로서의 소양을 기르기 좋다 생각하여, 칸의 아들인 가야를 데리고 종종 오곤 했었다. 힘들다고 투정부릴 때도 많았지만 오늘은 고생했던만큼의 이득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여기 어디쯤일텐데...’
급박한 상황에 평소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와서일까. 가야는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동굴을 찾아 헤매며 계속 걷고 걷다 그 이유를 문득 깨닫는다. 발자국 소리가 하나뿐이라는 것을.
‘내 곁엔 정말 이제 아무도 없구나...’
자신에게 사냥기술을 가르쳐주던 바라기 삼촌, 5분 늦게 태어났으면서 누나라 부르라며 자주 다투곤 했던 가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가야에게 든든한 성벽이 되어주었던 그들이 이젠 모두 허물어져버렸다. 깎이고 깎여나가 맨살이 드러났다. 추웠다. 가야는 이를 악물었다.
가야의 걸음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복수. 차가운 걸음걸음마다 부족의 비명소리를 되새겼다. 가시덤불에 찔려 새어나오는 핏방울에 부족의 아픔을 새겼다. 가야는 모든 것을 짊어진 것이다. 작고 여린 열 두살 아이의 자그마한 어깨에.
그때.
화르륵-.
아무런 전조도 없이 조용히 불꽃이 피어오른다. 꾸욱 움켜쥔 가야의 손에서 불꽃이 싹튼다. 구름에 먹혀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에 뜨거운 빛이 피었다. 갑작스런 일에 가야도 놀란 듯 제 손만 멍하니 바라본다. 추위 따윈 가신지 오래다.
‘대체 이건...?’
불꽃이 어둠과 추위를 살라먹는다. 점차 불꽃은 점점 크고 거세져 가야의 몸 전체에 피어올랐다. 아니, 가야 자체가 불꽃이 되었다. 뜨거운 열기가 숲을 먹어치운다. 뜨거운 빛이 어둠을 잠식한다. 이 세계에 화려한 불꽃이 핀다. 이윽고-.
가야는 무언가 홀린 듯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불의 왕이다.”
카악-. 퉷.
‘내 이놈의 술창고 놈들을 그냥 확!...어..어?’
그런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잠이 매섭게 밀려 들어온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눈을 부릅떠보지만, 천근의 무게를 이길 수는 없었다. 서서히 그의 눈이 감긴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의 시야에 흐릿한 화마(火魔)가 나타나 춤을 추었다.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이다.
“칸과 그 일족들을 모두 찾아내 죽여라! 단 한놈도 놓쳐선 안 된다!!”
사방에서 불이 춤춘다.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칼들이 연주한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노래한다. 파괴와 살육이 빚어내는 공연에 질려버린 것일까. 달도 구름에 숨어버렸다.
“반로족이다!! 반로족이 쳐들어왔다!”
아직 살아남은 누군가가 애타게 소리쳐보지만 대부분 수면제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 누군가도 이내 반로족의 칼에 쓰러지고 말았다. 인근 부족들의 패권을 거머쥐었던 구야족이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야습해온 반로족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저 잠에 취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차라리 행복한 것이었다. 깨어있는 자들의 악몽에 비한다면.
“칸이다! 칸을 사로잡았다!!”
어디선가 큰 함성이 들려온다. 반로족 전사들이 한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칸을 보기 위해서다. 오랜 시간 준비하고 공들여 온 일의 성공이 드디어 목전에 다다랐다. 반로족의 족장, 진아시가 크게 기꺼워하며 전사들을 독려했다.
“끝이 머지않았다! 칸의 일족들을 놓치지 말고 모두 잡아들이고, 칸은 이리로 데려오라!”
전사들이 수면제에 취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지 못하는 누군가를 질질 끌고 온다. 약이 얼마나 독했는지 그는 제 한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양옆에서 손을 놓자 털썩 쓰러져 비틀거리는 모습이 사뭇 안타깝다. 진아시는 그런 그를 보며 빙긋 웃고는 허리춤의 칼을 꺼내 들었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네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시간도 이걸로 끝이로구나.”
날카로운 칼날이 쓰러진 그의 목에 닿았다. 약에 취해 몽롱한 정신이지만 그는 느꼈다. 시리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시리다. 마지막으로 마셨던 마유주의 쓴맛이 문득 생각났다. 화마(火魔)가 다시 춤춘다.
‘여보...가야...가려.. 다들...’
그는 칸이었다.
*
“가야..! 가야!! 일어나라, 어서!”
한 남자가 애타게 침상의 아이를 흔들어 깨운다. 열 두 셋이나 되었을까.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칼을 지닌, 선이 고와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아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에 억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떠본다. 에메랄드 빛을 띈 눈동자가 남자를 응시한다.
“아.. 바라기 삼촌? 하암...무슨 일이에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 바라기는 급하게 가야의 입을 막았다. 가야의 눈에 놀람이 차오른다. 귀를 기울여보니 시끄러운 말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
“쉿! 가야. 지금 반로족이 쳐들어왔다. 얼른 도망쳐야해. 절대 소리를 내선 안 된단다.”
바라기의 낮은 목소리에 가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어린 아이였음에도 놀랍게도 침착하다. 이들이 황폐한 대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일까.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도하는 환경 때문일까. 가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조용히 바라기에게 말했다.
“삼촌. 그럼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됐어?”
“그게 말이다. 칸은...”
가야의 말에 바라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런 그를 보며 가야는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음은 터트리지 않는다. 슬픔을 삼켰다.
“너는 다행히 마을 외곽의 내 집에서 잤으니 아직 들키지 않았지만 가려는 아무래도...”
안절부절대며 쭈뼛거리는 바라기의 말.
“됐어. 삼촌. 일단 가자. 살아남아야지.”
가야가 싱긋 웃었다. 웃음이 슬프다. 바라기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가야를, 칸의 후예를 살려서 도망치게 해야한다. 그것이 자신을 이 땅에 내려보낸 왕의 뜻이리라.
*
생각보다 반로족의 포위망은 엉성했다. 쉬운 전투에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제일의 목표였던 칸을 해치운 기쁨에 늘어진 탓일까. 왕년에 구야족 제일의 사냥꾼이었던 바라기는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운 채 사방을 경계하며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가야 역시 날쌘 몸놀림으로 그런 바라기의 뒤를 쫓았다.
“조금만 더 힘내거라. 노란 숲 동굴에 내 휴식처 아직 기억하지? 거기까지만 가면 쉴 수 있을거다.”
어린아이의 몸이라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도 묵묵히 쫓아오는 것이 대견했다. 가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달렸다. 아쉽게도 말은 구하지 못 했다. 목마장에는 이미 반로족 전사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 노란 숲 어귀가 보인다. 숲에선 말을 달리기 쉽지 않다. 그곳은 사냥꾼인 바라기의 영역. 저기까지만 가면 살 수 있다. 그 찰나.
쐐애액-.
화살이 덤벼든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뾰족하게 들렸다. 순간 바라기는 뒤돌아서 쫓아오는 가야를 붙잡아 몸을 굴렸다. 자갈에 쓸렸는지 까진 상처 위로 피가 맺힌다. 쓰릴 법도 한데 바라기는 아랑곳 않고 가야를 안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매복이다. 숲의 입구를 적들이 지키고 있었다. 혹시나 도망치는 구야족들을 잡아들이기 위함이리라.
“젠장..! 가야! 내가 미끼가 될테니 먼저 그 동굴로 가있거라!!”
“삼...”
가야는 바라기의 굳은 얼굴을 보고 말을 삼켰다. 어떻게든 자신을 살리려 하는 바라기의 의지를 느꼈다. 자신은 그 의지에 부응해야 한다. 살아남아야만 한다.
“저기다! 구야족 놈들이 저기 있다!”
“숲으로 들어가면 일이 귀찮아져. 얼른 해치워버려!”
어떻게든 칸의 후예인 자신을 살리려 하는 충의, 구야족의 씨를 말리겠다고 모두 죽이려 드는 살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가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바라기의 품안에서 그저 슬픔을 삭이는 것만이 가야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야! 얼른 가거라!”
바라기는 가야를 내려놓고 적들을 향해 마주보고 달렸다. 미친 놈이라며 적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에도 가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달렸다. 가야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는 바라기를 놓을 수 없을 것이기에.
“오너라! 이 비열한 놈들!! 구야족의 대전사, 바라기가 상대해주마!”
적들이 화살을 쏘았다. 바라기에게 화살이 쏘아진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 바라기는 없다. 민첩하게 옆으로 돌아나와 크게 소리치며 계속 적들을 도발했다.
“언젠가 불의 왕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수치를 모르는 놈들아!”
“이 놈이..?”
구야족과 반로족 이 외에도 모든 부족들이 숭상하는 신, 불의 왕의 이름을 꺼내자 적들이 흠칫 얼굴을 굳혔다. 자신들도 정당하지 못 한 방법으로 이겼음을 알기에 신의 이름 앞에 위축된 것이다. 반로족 전사들은 이를 갈며 바라기를 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바라기는 싱긋 웃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가야! 나도 너를 위해서 기필코 살아남겠다!’
*
“칸의 일족들은 어찌 되었나.”
진아시는 차가운 눈으로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잡혀있는 구야족 포로들을 훑어 보았다. 시간이 지나 약효가 어느 정도 가신 건지, 정신을 하나 둘 차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 했다. 반로족 전사들에게 거친 욕설을 퍼붓다 목이 베여 죽거나, 이건 꿈이라고 눈물 흘리며 벌벌 떨 뿐이었다.
“어미는 잡았으나.. 이미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으려 한 뒤였습니다. 다행히 숨이 끊기기 전에 찾아 구하긴 했으나, 상태가 썩 좋지는 못 하답니다.”
“하, 역시 늑대의 짝이로군. 어차피 그쪽은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자식들은?”
부족민들 사이에서 예로부터 칸은 늑대의 후예라는 전승이 있었다.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칸의 일족들의 가족애는 늑대처럼 끈끈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칸이나 그 아내가 죽으면 머잖아 배우자도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칸을 죽인 시점에서 그의 아내를 잡는 것은 애당초 상정 외였다. 칸을 처치한 진아시의 다음 목표는 바로 칸의 자식들이었다.
“그것이.. 아들과 딸, 둘 모두 행방이 묘연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약 탄 술을 마시지 않기도 했고, 하필 둘 다 예상한 숙소가 아닌 다른 숙소에 머물렀던 듯합니다...”
까드득-.
진아시가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솥뚜껑 같은 손에 쥐여있던 검자루가 우그러진다.
“샅샅이 뒤져라. 포로놈들에게도 정보를 캐물어서 갈 만한 곳을 알아내!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절대!”
진아시는 다음에 꺼내려던 말을 애써 눌러 삼켰다.
‘그들이 복수심에 미쳐 날뛰는 거대한 늑대가 되기 전에.’
*
노란 숲은 구야족의 영역 중에서 제일 외곽에 위치해있었다. 길도 멀고 지형도 험난한데 반해 사냥감이 적어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만큼 바라기는 사냥꾼으로서의 소양을 기르기 좋다 생각하여, 칸의 아들인 가야를 데리고 종종 오곤 했었다. 힘들다고 투정부릴 때도 많았지만 오늘은 고생했던만큼의 이득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여기 어디쯤일텐데...’
급박한 상황에 평소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와서일까. 가야는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동굴을 찾아 헤매며 계속 걷고 걷다 그 이유를 문득 깨닫는다. 발자국 소리가 하나뿐이라는 것을.
‘내 곁엔 정말 이제 아무도 없구나...’
자신에게 사냥기술을 가르쳐주던 바라기 삼촌, 5분 늦게 태어났으면서 누나라 부르라며 자주 다투곤 했던 가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가야에게 든든한 성벽이 되어주었던 그들이 이젠 모두 허물어져버렸다. 깎이고 깎여나가 맨살이 드러났다. 추웠다. 가야는 이를 악물었다.
가야의 걸음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복수. 차가운 걸음걸음마다 부족의 비명소리를 되새겼다. 가시덤불에 찔려 새어나오는 핏방울에 부족의 아픔을 새겼다. 가야는 모든 것을 짊어진 것이다. 작고 여린 열 두살 아이의 자그마한 어깨에.
그때.
화르륵-.
아무런 전조도 없이 조용히 불꽃이 피어오른다. 꾸욱 움켜쥔 가야의 손에서 불꽃이 싹튼다. 구름에 먹혀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에 뜨거운 빛이 피었다. 갑작스런 일에 가야도 놀란 듯 제 손만 멍하니 바라본다. 추위 따윈 가신지 오래다.
‘대체 이건...?’
불꽃이 어둠과 추위를 살라먹는다. 점차 불꽃은 점점 크고 거세져 가야의 몸 전체에 피어올랐다. 아니, 가야 자체가 불꽃이 되었다. 뜨거운 열기가 숲을 먹어치운다. 뜨거운 빛이 어둠을 잠식한다. 이 세계에 화려한 불꽃이 핀다. 이윽고-.
가야는 무언가 홀린 듯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불의 왕이다.”
작가의 말
로판의 탈을 쓴 판타지가 될 지도...
남주 시점에서 로판을 써보고 싶었어용 ㅋㅋㅋ
밸런스 잘 맞춰볼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