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회 : 758 추천 : 0 글자수 : 4,802 자 2022-07-29
전투를 가장한 노략질이 끝났다. 제국군은 아투족 마을에서 획득한 귀중품들과 재물, 그리고 포로들을 챙겨 귀환하기 시작했다. 끌려가는 아투족 포로들은 텅 빈 눈빛으로 불타버린 자신들의 마을을 돌아보곤 했다.
이렇듯 힘이 없다는 것은 비참한 것이다. 가족과 고향, 자유마저 빼앗긴 그들은 앞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들 비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주저앉아 버리는 그들을, 제국군은 발길질로 재촉했다.
“그만두어라. 아직 어린아이가 아니더냐.”
소란스러움에 이끌려 나타난 발데스가 아이를 구타하는 제국 병사를 말렸다. 발데스는 아이의 상태를 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다른 병사를 불러 짐을 실은 수레에 기절한 아이를 태워 보내고는 다시 행렬을 따라 순찰을 떠났다.
“삼촌, 제국 놈들 중에서도 괜찮은 사람이 있네요.”
“그러게 말이다. 매번 기사도 정신 기사도 정신, 외치더니만 실제로 행하는 놈도 있구나.”
아투족 포로 행렬 중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힘없이 끌려가는 암울한 분위기의 다른 포로들과는 다르게, 두 사람은 계속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그래도 가야, 난 과연 괜찮을지 의문이다. 이렇게 포로로 잡혀가도 괜찮은 건지...나중에 한꺼번에 다 쓱싹해버리는 거 아니냐?”
“바라기 삼촌. 의외로 삼촌도 겁쟁이구나?”
그들은 바로 가야와 바라기였다. 제국군이 아투족 포로들을 생각보다 정중히 대하는 것을 본 가야는 포로들 속에 섞여 국경을 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언제고 쫓아올 반로족의 추적대를 피할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계획이었다. 어떻게 탈출할지는 생각해두지 않았지만.
아무튼 바라기는 가야의 말에 발끈했다.
“겁쟁이?! 내가 겁쟁이라니! 가야, 이 삼촌은 구야족의 대전...”
“쉿! 쉿!! 다 듣겠어. 목소리를 낮춰야지!”
흥분한 바라기를 달래며 가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근 아투족 포로들이 두 사람을 힐끔 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 제국 병사들도 못 들었는지 행렬을 지킬 뿐이었다.
“삼촌, 다 죽일 거였으면 아까 마을을 습격했을 때 처리했을 거야. 그런데 굳이 우리를 살려서 제국까지 끌고 간다는 건, 뭔가 필요한 게 있어서겠지. 아마 그건 노예일 테고...”
“흠,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좋다. 국경을 넘으면 상황을 봐서 탈출하도록 하자.”
바라기는 내심 놀랐다. 가야가 머리가 좋은 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어린아이였음에도 그 통찰력이 상당했다. 어느새 이렇게 커버린 걸까. 걸어가는 가야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라기는 문득 칸이 생각났다.
‘역시 대장의 아들이구나...걱정마라, 대장. 가야는 내가 꼭 지킬 테니까.’
바라기가 다짐하고 있을 때 멀리서 제국군과 포로의 행렬을 감시하는 눈이 있었다. 먼지바람 이는 행렬을 계속 눈여겨보고 있던 그 눈은 이내 방향을 돌려 떠나갔다.
아직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다.
*
“조장, 척후한테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어. 제국 놈들이 아투족 마을을 불태우고 포로를 잡아가고 있다는데?”
“뭐라고?”
반로족의 추적대 조장, 쿤타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늙은 남자와 어린아이 단 둘 뿐. 손쉬운 사냥감이라 여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었는데 웬걸, 가짜 흔적에 당해 다른 길로 헤맨 것이 수차례였다. 겨우겨우 가닥을 잡아 따라왔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여기서 단서가 끊겨버렸다. 그때 들어온 소식이 지금 제국군이 포로를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장. 설마 그 둘이 제 발로 포로로 잡혀가진 않았겠지, 설마?”
“...가능성은 있지.”
쿤타는 한숨을 내쉰다. 지난밤 진아시가 내린 엄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들을 처치하기 전까진 돌아올 생각을 말라는.
“오늘 밤 제국군을 습격한다.”
“말도 안 돼! 우리만으로는 힘들어. 조장.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시간이 부족하다. 지원군이 올쯤엔 저들이 거의 국경을 넘을 거야.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제국 병사들이 아니야. 포로들이지.”
쿤타의 말에 조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쿤타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어차피 제국 놈들에게 잡혔으니 곧 수모를 당할 텐데, 우리가 목숨을 끊어주는 말이다. 멀리서 활로 포로들만 노려.”
“조...조장. 그건..좀...”
동포를 죽이라는 말에 놀란 조원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쿤타는 그 머뭇거림을 날카롭게 끊어내듯 말했다.
“그럼 우리가 죽을테냐?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가면 족장한테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
결심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조원. 쿤타는 그를 다독였다.
“굳게 마음먹어라. 오늘 야습을 한다. 저들은 승리에 취해 경계가 허술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최대한 포로들을, 특히 늙은 남자와 어린아이..를 중점적으로 노려라.”
쿤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역시 이런 명령을 내려야만 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
땡-땡땡-땡!
“야습이다!! 야만족이 쳐들어온다!”
요란한 타종 소리와 누군가의 외침에 한참 단잠에 빠져있던 제국군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지만 화롯불에 비친 제국군과 포로의 모습들만 보일 뿐, 야만족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 한 포로의 목에 박힌다.
“컥-!”
목에 콱 박혀버린 활에 그 포로는 짧은 탄식과 함께 쓰러져버렸다. 어디에도 적은 보이지 않는데 화살이 날아온다. 한 제국군 고참 병사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불 꺼!! 불 끄라고! 이 X끼들아! 표적이 되고 있다!”
허둥지둥 화롯불들을 꺼보지만 이미 상당수의 포로가 희생된 다음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어두워진 탓에 제국군은 미처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그들의 지척으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다가온다.
“지금이 기회다! 단숨에 몰아쳐라!!”
쿤타는 부하들을 데리고 야습을 감행했다. 처음엔 멀리서 활로만 노릴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제국군이 너무 허술했다.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든 쿤타는 계획을 바꾸어 기회를 노려 직접 제국군에게 달려들었다.
그 혼란함 속 가운데 가야와 바라기는 재빨리 인근의 짐수레 뒤에 숨어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역시 아투족을 구하러 온 건 아니고, 우리를 잡으러 온 것 같은데?”
“그러게요. 처음 날아온 화살들이 포로들이 있는 구역을 노린 것을 생각해보면 구출 목적은 확실히 아니에요.”
“네가 생각해도 그러냐? 반로족 놈들이 쫓아오는 걸 눈치채서 미리 야습한다고 알려준 것까진 좋았는데... 생각보다 제국 놈들이 너무 허약한걸?”
이대로 제국군이 패한다면 국경을 넘을 방법도 사라질뿐더러 추적대에게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다.
“국경을 넘으려면 아직 제국군이 필요한데 어떻게 할... 아 저 사람은?”
두 사람이 한참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멀리 행렬의 뒤편에서 한필의 기마가 달려오며 크게 소리쳤다.
“다들 물러서지마라! 적들은 소수다! 어서 갑주를 갖추고 태세를 정비하라!! 나 론다트 자작님의 필두 기사 발데스 허트만이 함께 하리라!!”
우와아아-!!
발데스가 나타나 제국 병사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야습에 혼란스러워하던 제국군이 구심점을 찾고 차츰 대응하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전세를 파악한 쿤타는 나름 많은 포로를 처치하고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 부하들에게 후퇴를 명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야만족들을 보며 이를 갈던 발데스는 제국 병사들을 지휘하여 다시 경계를 세우고 전장을 정리하도록 했다.
제국과 야만, 둘 중 하나를 편들어주자면 오늘은 야만의 밤이었다고 하리라.
*
동이 트고 날이 밝아온다. 제국군들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원래 재물들이 실렸던 짐수레에는 이제 시신들이 실린다. 포로들의 시신 따윌 챙길 여유는 없다. 힘없이 땅에 뒹굴며 널브러진 아투족의 사체들을 보며 가야와 바라기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포로로 끌고 가다 불필요해지니 버리는 제국군? 아니면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을 제공한 반로족? 혹은 아무런 힘 없이 무력하게 상황 따라 휩쓸려 다니는 자신들?
가야는 아직 어렸다. 아무리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어도, 그 속은 아직 어린아이다. 가야는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 응어리진 이 감정이 명확히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슬픈 눈으로 이 모든 참상을 담아둘 뿐이었다.
그런 가야의 마음을 느꼈는지 바라기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발데스라고 했던가? 그 기사, 생각보다 난 놈이었지?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잘 막아냈어, 아주.”
바라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감정의 늪에 빠져있던 가야는 바라기의 말을 따라 늪을 빠져나온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듯 배시시 웃으며 바라기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그렇네요. 덕분에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나 고민했었는데..”
“하하, 그러게 말이다. 우선 국경을 넘으면...억!”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이 고까워 보였던 걸까. 갑작스레 한 제국 병사가 바라기의 등을 봉으로 후려친 것이다.
“이 더러운 야만족 놈들이... 뭐가 그리 재밌다고 웃으면서 얘기를 하시나?”
야습으로 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은 탓일까, 가야와 바라기 뿐만 아니라 아투족을 보는 제국군들의 눈빛이 흉흉했다. 가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은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대항하는 건 죽여달라는 것과 진배없다.
“죄..죄송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많이 불편합니다.. 제발.. 자비를 부탁드립니다.”
카악-, 퉷!
“네 놈 아비한테 잘 일러둬라. 한 번만 더 거슬렸다간 가만두지 않을 테니.”
제국 병사도 아직 어린아이인 가야한테까지 손찌검하기는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엄포를 놓고 돌아갔다. 회복이 채 안 된 몸에 갑작스런 충격을 받은 탓인지 바라기는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른 포로들의 행렬에 합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가야가 안간힘을 쓰며 바라기를 일으키려 해보지만 꿈쩍도 않는다. 아무리 제 나이보다 체격이 좋은 가야라 해도 기골이 장대한 바라기를 홀로 감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투족 포로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둘을 일별하며 터덜터덜 자신들의 걸음을 걸었다. 그렇게 행렬의 거의 끝자락에 이를 때까지 가야는 바라기를 일으키지 못했다. 온몸이 땀에 젖도록 안간힘을 써보지만 소용없다. 이대로면 낙오된 바라기는 병사들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가야는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마음에 새겼다.
뿌드드득-.
가야의 악물린 입에서 이들끼리 부딪치는 거친 마찰음이 새어 나온다. 눈은 충혈돼서 금방이라도 실핏줄이 터져버릴 것 같다. 갑자기 바라기의 몸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라기를 완전히 일으켰을 때, 가야는 그제야 자신의 반대편에서 바라기를 부축해주고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왠지 분노로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
“경비대장님. 론다트 자작의 병사들이 귀환을 위해 성을 통과할 수 있을지 전령을 보냈습니다. 뭐라고 회신할까요?”
“대충 알겠다고 전해라. 그런 것보다 이제 곧 공녀님의 탄생일이다. 경계를 더욱 강화하고 불온 분자들은 모두 보이는 대로 잡아들이도록. 허튼일이라도 생긴다면...너나 나나 알지?”
경비대장은 손으로 목을 슥 긋는 시늉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카이 대공이 각별히 아끼는 공녀의 생일이었기에 평소보다 더욱 삼엄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 그는 가득 쌓인 서류를 보면서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던 중 문득 불안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별일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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