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조회 : 757 추천 : 0 글자수 : 4,861 자 2022-08-01
한참을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던 바라기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어떤 낯선 남자의 품에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바라기는 기겁하며 남자를 뿌리쳤다. 어쩐지 불쾌와 혐오가 가득한 눈빛이다.
“사..삼촌. 이분은 우리를 도와주신 분이야. 얼른 사과드려!”
당황한 가야가 바라기에게 소리쳤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못 한 바라기였지만 일단 가야의 말을 따라 그에게 사과하려 했다.
“미안하오. 내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서 그...”
“...역시 도와주는 게 아니었군.”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기를 일별한 그는 둘을 두고 앞의 행렬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따끔한 눈빛으로 바라기를 힐책하던 가야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바라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런 가야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잠깐만요! 고맙다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됐다. 어차피 구야족 놈들의 인사 따위 받아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
“아...!”
가야가 놀란 기색을 보이자 그는 침을 거칠게 내뱉고는 말했다.
“그리 놀랄 일인가? 뒤에 저 남자, 전에 본 적이 있다. 칸과 함께 전방을 순시하러 왔었지. 구야족의 대전사였다고 알고 있는데, 꼴이 말이 아니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잠시 망설이던 가야,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우리 구야족은 멸망했습니다.”
“뭐...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는 고개를 돌려 가야를 노려보았다. 그의 매서운 눈이 방금 한 말이 사실이냐는 듯 가야를 쏘아붙이는 듯했다.
“사실입니다. 반로족이 습격해왔었어요.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지만...제 아...아니 칸도 돌아가셨다 합니다.”
“칸까지..? 그래서 이렇게 될 때까지 구야족의 지원이 없었던 거였나. 하...제국 놈들을 막아준답시고 그렇게 공물을 쥐어 짜내더니 결국 이 꼴인가... 웃기지도 않는군. 하하하.”
그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는지 연신 허탈한 듯 낮은 웃음을 피웠다. 그 모습을 본 가야는 그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질문을 던졌다.
“공물을 쥐어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몰랐다고 할 셈인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들로 너희들이 호의호식할 동안, 우리 부족은 배고픔을 참아가며 이 땅을 지켰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리를 도와준다 했었지만 결국에 가장 큰 피해자는 늘 우리였지. 이번엔 그 알량한 도움마저 받지 못하게 됐지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닫고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가야가 다시 말을 걸어보지만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바라기는 가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야는 바라기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 듯 말을 꺼내려 했지만, 가까운 곳에 병사들이 있다는 바라기의 눈짓에 조용히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다시 침묵 속에서 긴 여정을 시작한다.
*
생각보다 제국의 국경을 넘는 것은 수월했다. 론다트 자작이 미리 언질을 해둔 것일까, 몇 가지 서류만 보여주니 가볍게 통과시켜주었다. 물론 서류 밑으로 찔러준 돈주머니도 한몫했으리라.
국경의 영토를 통과한다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가야와 바라기는 행렬에서 탈출하지 않았다. 제국 영토로 들어와 병사들의 긴장이 풀어져 경계가 느슨했음에도.
그것은 순전히 가야 때문이었다. 바라기가 몇 번이나 도망가자고 여러 차례 종용했지만, 가야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러곤 바라기를 구해준 남자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행렬만 따라 걷던 그도 조금은 마음을 연 것일까, 가벼운 질문에 귀찮다는 듯 대답을 해주었다.
"넌 참 이상한 꼬마로군. 너를 무시하고 구야족을 모욕한 내가 밉지 않으냐?"
"우린 아직 서로를 잘 모르니까요. 모를 땐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다고 아버지가 늘 얘기하셨었어요."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망설이다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냥 아직 어린 네놈이 안쓰러워서 도와준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고마울 때는 고맙다고 하는 게 맞는 거니까요. 다만 저는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차가운 그의 말에도 가야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갑자기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계속 잰걸음으로 자신을 따라오던 가야가 신경 쓰였던 걸까.
"나는 아투족 족장의 아들 대래다."
며칠간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해 갈라진 쇳소리임에도 가야의 귀에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꽂혀 들어온다.
"제국 놈들도 싫지만 너희 구야족 놈들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너희는 힘으로 복속을 강요하고 공물을 요구했지."
조용히 뒤를 따라 걷던 바라기가 눈을 감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은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니. 힘이야말로 진리다. 힘이 있어야 관용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패자이기에..."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자신이 꺼낼 말을 고르는 듯했다. 처음으로 웃음을 띤 그가 가야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었다.
"...그것이 너희를 싫어하고 원망하지만, 탓하지는 않는 이유다."
*
그 후로 오랜 시간 행렬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가야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그저 행렬을 따라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멀리 거대한 하얀 성과 마을이 보인다. 마을 전체가 소란스러운 느낌이 든다. 흥겨운 음악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이윽고 마을 어귀에 당도하자 발데스가 병사와 포로, 모두를 모아두고서 말했다.
"우리는 오늘 아카이 공작령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경비대의 말로는 오늘부터 공녀의 탄생일 축제가 시작된다 하니 다들 경거망동하는 일 없길 바란다. 자칫 꼬투리 잡히면 일이 커지니까 말이지."
발데스가 그 외 경고 사항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동안 가야가 조용한 목소리로 바라기에게 물었다.
"삼촌. 아카이 공작이라면 혹시 그..."
"그래. 맞다. 네 아버지, 칸과 아주 치열하게 싸우던 양반이지. 그놈 영지가 여기일 줄은..."
바라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다시 행렬이 움직인다. 마을 안쪽에 미리 예약해둔 여관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병사들을 위한 숙소였지, 몇십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여관에서 재워줄 리는 만무했다. 마구간조차 공녀의 탄생일 축제 때문에 가득 차, 어디 편히 몸 뉠 곳도 없었다.
그들은 결국 딱딱한 길바닥 위에서 쪽잠을 청해야 했다. 지치고 고단한 몸에겐 그것마저 꿀 같은 휴식이었으리라.
그날 밤 가야는 어쩐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제국의 실상을 두 눈으로 봐서일까, 아버지 칸의 호적수였던 아카이 대공의 이름을 들은 탓일까. 혹은 비명소리 가득한 그날의 기억 때문일까.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눈에 선했다. 뾰족한 쇳소리가 귀에 사무쳤다.
가야는 대차게 고개를 몇 번 휘젓더니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에 높이 떠 있는 달만 속없이 밝다.
“우리 달이나 여기서 뜨는 달이나 다를 게 없구나. 언젠가 고향에서 다시 달을 볼 수 있을 날이 올까...?”
순간 금빛 달무리가 가야의 눈앞을 수놓았다. 천천히 바람에 흩날리는 달무리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찔한 향기가 났다.
"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가야는 홀린 듯 벌떡 일어나 달무리를 보았다.
"꺅! 아니,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 일어난 가야 때문에 놀란 달무리가 숙였던 몸을 화들짝 일으킨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긴 금발의 달무리. 마치 달빛을 품은 듯한 소녀였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치 보름달 같다.
"아, 저기...미안해. 나도 놀라서 그만.."
달빛에 취한 것일까, 향기에 취한 것일까. 가야는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더듬거리며 겨우 사과를 건넸다. 소년의 쑥스러운 사과에 소녀가 피식 웃는다.
"음...사실 이걸론 부족하지만 마음 넓은 내가 용서해주도록 하겠어!"
한껏 어깨를 펴며 너스레 피우는 모습에 가야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기보다 작고 어려 보이는 아이가 점잖은 척하는 것이 퍽 귀여웠다.
“아, 안 돼! 조용히 해. 나 지금 몰래 나온 거라 걸리면 혼나. 쉿!”
가야가 웃음을 터트리자 소녀는 허둥대며 자신의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대며 조용하란 제스처를 취했다. 합죽이가 된 가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살짝 한숨을 내쉰다.
까무잡잡하고 허름한 옷차림의 가야와는 반대로 새하얀 피부에 은색의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소녀. 둘은 눈을 마주쳤다. 에메랄드빛, 녹음(綠陰)을 가득 담은 듯한 영롱한 초록빛의 눈망울로 서로를 본다.
“와, 신기하다. 나랑 눈 색이 똑같네? 우리 아버님이랑 오빠 말고는 본 적이 없는데...”
소녀는 작게 감탄했다. 자신의 열두 번째 탄생일을 앞두고 어쩐지 맘이 샐쭉해져, 알버트 경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바깥 구경을 나온 참이었다. 생각보다 차가운 밤공기에 떠는 자신을 본 알버트 경은 잠시 마차에서 외투를 가지고 오겠다며, ‘꼭! 여기서 기다리세요.’를 연거푸 외치고 떠나갔다.
하지만 금세 심심해진 소녀는 문득 숨어 있다가 알버트 경을 깜짝 놀래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던 중, 길바닥에 많은 사람들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헐벗은 옷차림, 소녀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동그래졌다.
‘혹시 이 사람들이 말로만 듣던 야만족들일까?”
호기심이 많은 그녀는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한 소년이 밤하늘을 보면서 무언가 말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 살그머니 다가가 말을 건넨 것이다.
그것이 소년과 소녀의 첫 만남이었다.
*
"그래, 칸의 아들로 추정되는 녀석을 처리했다고?"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다. 대답은 망설인다. 어찌 이것을 설명해야 노여움을 피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결심한 듯 대답도 입을 나선다.
"그렇습니다. 칸이시여.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노란 숲을 벗어난 그들은 아투족 마을에 숨어든 듯합니다. 그런데 마침 제국군이 마을을 습격하여 포로들을 잡아들였고, 저는 그 포로들 속에 그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야습을 시도하여 대부분의 포로들을 죽였습니다. 눈에 띄는 아이는 모조리 처리했으니...이젠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칸, 진아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추적대의 조장 쿤타가 한 말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한다.
까득-까득-.
쿤타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노여움에 한껏 긴장했다. 그런 그를 어루만지듯 진아시는 예상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이만 되었다. 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네넷! 알겠습니다!"
생각하지 않았던 진아시의 반응에 놀란 듯 잠시 말을 더듬던 쿤타는 머리를 숙이고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 후, 진아시의 옆에 시립해있던 부관이 말한다.
"곤란하게 되었군요. 그쪽이 이걸로 괜히 꼬투리 잡지는 않겠습니까?"
진아시는 코웃음을 쳤다.
"흥. 부득이한 희생일 뿐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거래를 해야 할 텐데 이런 걸로 나와 척지려 들진 않겠지. 그것보다 칸의 아들놈이 죽은 것이 확실할지 그것이 염려될 뿐이다."
“혹시나 하여 제 밑의 사냥개들을 풀어두었습니다. 이빨 하나는 튼튼한 녀석들이니 기대해보셔도 좋을 겁니다.”
진아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근래 들어 그는 잠을 통 이루지 못 했다.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눈에 선했다. 뾰족한 쇳소리가 귀에 사무쳤다. 자신의 앞을 번번이 가로막던 칸의 숨통을 끊어내던 그 순간을 다시 맛보고 싶었다.
진아시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불안감이 아니라, 다시 한번 그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사..삼촌. 이분은 우리를 도와주신 분이야. 얼른 사과드려!”
당황한 가야가 바라기에게 소리쳤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못 한 바라기였지만 일단 가야의 말을 따라 그에게 사과하려 했다.
“미안하오. 내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서 그...”
“...역시 도와주는 게 아니었군.”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기를 일별한 그는 둘을 두고 앞의 행렬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따끔한 눈빛으로 바라기를 힐책하던 가야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바라기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런 가야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잠깐만요! 고맙다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됐다. 어차피 구야족 놈들의 인사 따위 받아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
“아...!”
가야가 놀란 기색을 보이자 그는 침을 거칠게 내뱉고는 말했다.
“그리 놀랄 일인가? 뒤에 저 남자, 전에 본 적이 있다. 칸과 함께 전방을 순시하러 왔었지. 구야족의 대전사였다고 알고 있는데, 꼴이 말이 아니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잠시 망설이던 가야,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우리 구야족은 멸망했습니다.”
“뭐...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는 고개를 돌려 가야를 노려보았다. 그의 매서운 눈이 방금 한 말이 사실이냐는 듯 가야를 쏘아붙이는 듯했다.
“사실입니다. 반로족이 습격해왔었어요.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지만...제 아...아니 칸도 돌아가셨다 합니다.”
“칸까지..? 그래서 이렇게 될 때까지 구야족의 지원이 없었던 거였나. 하...제국 놈들을 막아준답시고 그렇게 공물을 쥐어 짜내더니 결국 이 꼴인가... 웃기지도 않는군. 하하하.”
그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는지 연신 허탈한 듯 낮은 웃음을 피웠다. 그 모습을 본 가야는 그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질문을 던졌다.
“공물을 쥐어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몰랐다고 할 셈인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들로 너희들이 호의호식할 동안, 우리 부족은 배고픔을 참아가며 이 땅을 지켰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리를 도와준다 했었지만 결국에 가장 큰 피해자는 늘 우리였지. 이번엔 그 알량한 도움마저 받지 못하게 됐지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닫고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가야가 다시 말을 걸어보지만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바라기는 가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야는 바라기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 듯 말을 꺼내려 했지만, 가까운 곳에 병사들이 있다는 바라기의 눈짓에 조용히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다시 침묵 속에서 긴 여정을 시작한다.
*
생각보다 제국의 국경을 넘는 것은 수월했다. 론다트 자작이 미리 언질을 해둔 것일까, 몇 가지 서류만 보여주니 가볍게 통과시켜주었다. 물론 서류 밑으로 찔러준 돈주머니도 한몫했으리라.
국경의 영토를 통과한다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가야와 바라기는 행렬에서 탈출하지 않았다. 제국 영토로 들어와 병사들의 긴장이 풀어져 경계가 느슨했음에도.
그것은 순전히 가야 때문이었다. 바라기가 몇 번이나 도망가자고 여러 차례 종용했지만, 가야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러곤 바라기를 구해준 남자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행렬만 따라 걷던 그도 조금은 마음을 연 것일까, 가벼운 질문에 귀찮다는 듯 대답을 해주었다.
"넌 참 이상한 꼬마로군. 너를 무시하고 구야족을 모욕한 내가 밉지 않으냐?"
"우린 아직 서로를 잘 모르니까요. 모를 땐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다고 아버지가 늘 얘기하셨었어요."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망설이다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냥 아직 어린 네놈이 안쓰러워서 도와준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고마울 때는 고맙다고 하는 게 맞는 거니까요. 다만 저는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차가운 그의 말에도 가야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갑자기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계속 잰걸음으로 자신을 따라오던 가야가 신경 쓰였던 걸까.
"나는 아투족 족장의 아들 대래다."
며칠간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해 갈라진 쇳소리임에도 가야의 귀에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꽂혀 들어온다.
"제국 놈들도 싫지만 너희 구야족 놈들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너희는 힘으로 복속을 강요하고 공물을 요구했지."
조용히 뒤를 따라 걷던 바라기가 눈을 감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은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니. 힘이야말로 진리다. 힘이 있어야 관용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패자이기에..."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자신이 꺼낼 말을 고르는 듯했다. 처음으로 웃음을 띤 그가 가야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었다.
"...그것이 너희를 싫어하고 원망하지만, 탓하지는 않는 이유다."
*
그 후로 오랜 시간 행렬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가야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그저 행렬을 따라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멀리 거대한 하얀 성과 마을이 보인다. 마을 전체가 소란스러운 느낌이 든다. 흥겨운 음악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이윽고 마을 어귀에 당도하자 발데스가 병사와 포로, 모두를 모아두고서 말했다.
"우리는 오늘 아카이 공작령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경비대의 말로는 오늘부터 공녀의 탄생일 축제가 시작된다 하니 다들 경거망동하는 일 없길 바란다. 자칫 꼬투리 잡히면 일이 커지니까 말이지."
발데스가 그 외 경고 사항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동안 가야가 조용한 목소리로 바라기에게 물었다.
"삼촌. 아카이 공작이라면 혹시 그..."
"그래. 맞다. 네 아버지, 칸과 아주 치열하게 싸우던 양반이지. 그놈 영지가 여기일 줄은..."
바라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다시 행렬이 움직인다. 마을 안쪽에 미리 예약해둔 여관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병사들을 위한 숙소였지, 몇십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여관에서 재워줄 리는 만무했다. 마구간조차 공녀의 탄생일 축제 때문에 가득 차, 어디 편히 몸 뉠 곳도 없었다.
그들은 결국 딱딱한 길바닥 위에서 쪽잠을 청해야 했다. 지치고 고단한 몸에겐 그것마저 꿀 같은 휴식이었으리라.
그날 밤 가야는 어쩐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제국의 실상을 두 눈으로 봐서일까, 아버지 칸의 호적수였던 아카이 대공의 이름을 들은 탓일까. 혹은 비명소리 가득한 그날의 기억 때문일까.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눈에 선했다. 뾰족한 쇳소리가 귀에 사무쳤다.
가야는 대차게 고개를 몇 번 휘젓더니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에 높이 떠 있는 달만 속없이 밝다.
“우리 달이나 여기서 뜨는 달이나 다를 게 없구나. 언젠가 고향에서 다시 달을 볼 수 있을 날이 올까...?”
순간 금빛 달무리가 가야의 눈앞을 수놓았다. 천천히 바람에 흩날리는 달무리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찔한 향기가 났다.
"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가야는 홀린 듯 벌떡 일어나 달무리를 보았다.
"꺅! 아니,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 일어난 가야 때문에 놀란 달무리가 숙였던 몸을 화들짝 일으킨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긴 금발의 달무리. 마치 달빛을 품은 듯한 소녀였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치 보름달 같다.
"아, 저기...미안해. 나도 놀라서 그만.."
달빛에 취한 것일까, 향기에 취한 것일까. 가야는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더듬거리며 겨우 사과를 건넸다. 소년의 쑥스러운 사과에 소녀가 피식 웃는다.
"음...사실 이걸론 부족하지만 마음 넓은 내가 용서해주도록 하겠어!"
한껏 어깨를 펴며 너스레 피우는 모습에 가야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기보다 작고 어려 보이는 아이가 점잖은 척하는 것이 퍽 귀여웠다.
“아, 안 돼! 조용히 해. 나 지금 몰래 나온 거라 걸리면 혼나. 쉿!”
가야가 웃음을 터트리자 소녀는 허둥대며 자신의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대며 조용하란 제스처를 취했다. 합죽이가 된 가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살짝 한숨을 내쉰다.
까무잡잡하고 허름한 옷차림의 가야와는 반대로 새하얀 피부에 은색의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소녀. 둘은 눈을 마주쳤다. 에메랄드빛, 녹음(綠陰)을 가득 담은 듯한 영롱한 초록빛의 눈망울로 서로를 본다.
“와, 신기하다. 나랑 눈 색이 똑같네? 우리 아버님이랑 오빠 말고는 본 적이 없는데...”
소녀는 작게 감탄했다. 자신의 열두 번째 탄생일을 앞두고 어쩐지 맘이 샐쭉해져, 알버트 경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바깥 구경을 나온 참이었다. 생각보다 차가운 밤공기에 떠는 자신을 본 알버트 경은 잠시 마차에서 외투를 가지고 오겠다며, ‘꼭! 여기서 기다리세요.’를 연거푸 외치고 떠나갔다.
하지만 금세 심심해진 소녀는 문득 숨어 있다가 알버트 경을 깜짝 놀래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던 중, 길바닥에 많은 사람들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헐벗은 옷차림, 소녀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동그래졌다.
‘혹시 이 사람들이 말로만 듣던 야만족들일까?”
호기심이 많은 그녀는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한 소년이 밤하늘을 보면서 무언가 말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 살그머니 다가가 말을 건넨 것이다.
그것이 소년과 소녀의 첫 만남이었다.
*
"그래, 칸의 아들로 추정되는 녀석을 처리했다고?"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다. 대답은 망설인다. 어찌 이것을 설명해야 노여움을 피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결심한 듯 대답도 입을 나선다.
"그렇습니다. 칸이시여.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노란 숲을 벗어난 그들은 아투족 마을에 숨어든 듯합니다. 그런데 마침 제국군이 마을을 습격하여 포로들을 잡아들였고, 저는 그 포로들 속에 그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야습을 시도하여 대부분의 포로들을 죽였습니다. 눈에 띄는 아이는 모조리 처리했으니...이젠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칸, 진아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추적대의 조장 쿤타가 한 말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한다.
까득-까득-.
쿤타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노여움에 한껏 긴장했다. 그런 그를 어루만지듯 진아시는 예상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이만 되었다. 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네넷! 알겠습니다!"
생각하지 않았던 진아시의 반응에 놀란 듯 잠시 말을 더듬던 쿤타는 머리를 숙이고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 후, 진아시의 옆에 시립해있던 부관이 말한다.
"곤란하게 되었군요. 그쪽이 이걸로 괜히 꼬투리 잡지는 않겠습니까?"
진아시는 코웃음을 쳤다.
"흥. 부득이한 희생일 뿐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거래를 해야 할 텐데 이런 걸로 나와 척지려 들진 않겠지. 그것보다 칸의 아들놈이 죽은 것이 확실할지 그것이 염려될 뿐이다."
“혹시나 하여 제 밑의 사냥개들을 풀어두었습니다. 이빨 하나는 튼튼한 녀석들이니 기대해보셔도 좋을 겁니다.”
진아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근래 들어 그는 잠을 통 이루지 못 했다.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눈에 선했다. 뾰족한 쇳소리가 귀에 사무쳤다. 자신의 앞을 번번이 가로막던 칸의 숨통을 끊어내던 그 순간을 다시 맛보고 싶었다.
진아시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불안감이 아니라, 다시 한번 그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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