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조회 : 912 추천 : 0 글자수 : 4,632 자 2022-08-04
아카이 공작가의 기사, 알버트는 현재 인생 최대의 고비에 서있었다.
갑자기 어디론가 공녀님이 사라져버렸다.
이리 둘러봐도 저리 둘러봐도 드레스 끝자락조차 보이지 않는다. 몇 분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에 어디로 가버리신 걸까. 알버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진정해라. 알버트! 넌 잘 해결할 수 있어!! 암, 그렇고 말고!’
마음을 다잡은 알버트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칭 문무겸비의 기사라 자부하는 자신이다.
‘납치? ..아니야. 이 짧은 시간에 ‘그 공녀’님을 아무런 흔적도 납치할 수 있을리 없지.’
납치일 가능성은 버렸다. 그렇다면.
‘혹시 미아가 되신 것일까?!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며 이 알버트를 찾고 계신 건 아닐지..!’
알버트는 자신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울고 있는 공녀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다려주세요오오---! 공녀님! 알버트가 갑니다--!!”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가는 알버트.
동료들이 그를 ‘멧돼지 기사’라 몰래 부르곤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
가야는 여지껏 자신이 이토록 당황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았다.
어릴 때부터 사냥을 하며 산짐승들과 싸웠고 목숨이 오가는 위기도 몇 번 겪었던 가야였건만, 작고 여린 소녀의 눈을 도통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저기저기 넌 이름이 뭐야? 나랑은 왜 피부색이 다른 거지? 왜 길에 누워 있던 건지 물어봐도 돼??”
바짝 얼어있는 가야에게 소녀가 다가가며 질문 공세를 펼친다. 눈동자엔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저기.. 내 이름은 가야...”
- 이 노옴--! 당장 공녀님에게서 물러나라!!
가야가 쑥쓰러워하며 말을 꺼내는 순간 웬 노호성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뒤를 돌아본 소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알버트 경! 안 돼요!!”
하지만 이미 그는 가야의 지척에 다다라있었다. 검은 꺼내지 않는다. 다만 공녀님을 희롱하는 거라 생각한 녀석에게 따끔한 벌을 줄 셈이었다.
그때-.
알버트의 측면에서 누군가 그를 덮쳐 들었다. 갑작스런 강한 충격에 잠깐 정신을 잃을 뻔 했지만, 두 어번 고개를 털며 호흡을 회복했다.
상대는 덩치 큰 외팔이 야만족. 온몸에 가득한 흉터를 보아하니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이리라.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투의 냄새에 소름이 올라오려는 순간.
“알.버.트으-----.!”
정말 소름이 돋고만 알버트는 다급히 소녀에게 달려갔다. 황소마냥 저돌적으로 달려들 땐 언제고 지금은 마치 순한 양 같은 모습이다.
“고...공녀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다치신 데는..?”
버벅이며 말하는 알버트를 보며 소녀는 한숨을 크게 내쉰다.
“알버트 경. 대체 이게 무슨 무례지? 본 공녀가 길을 잃어 저들에게 물어보던 참이었는데, 은혜를 갚지 못 할망정 공격을 하다니! 아카이 공작가에 먹칠을 할 셈인가?”
‘아...망했다. 공녀님 진짜 화나셨네...’
평소에는 애교 많고 기사와 사용인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기로 유명한 공녀였지만, 한번 화가 나면 말투부터 달라졌다. 이때는 그저 싹싹 비는 것이 최선이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사과할 대상은 제가 아닐텐데요?”
알버트가 뒤를 슬쩍 돌아보니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꽤 소란스러운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공녀님. 아무리 그래도 야만족 따위에게 사과를 하는건...앜!”
소녀에게 시원하게 정강이를 까인 알버트가 깡충깡충 뛰었다. 그런 알버트를 찌릿 노려보던 소녀가 가야에게 말했다.
“애, 정말 미안해.. 알버트 경이 좀 유난이라..”
소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고, 당황한 가야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 순간 바라기가 가야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야. 그만둬라. 저들은 우리랑은 사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다. 얽히면 너만 피곤해져.”
“삼촌...”
바라기의 만류에 가야가 말끝을 흐렸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쉬운 마음을 버릴 수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바라기의 얼굴에 가야도 결국 뒤돌아서고 만다.
“아...저..저기!”
그 모습에 아쉬워하던 소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까인 정강이를 부여잡고 깨금발 뛰던 알버트가 꽈당 자빠질만큼 놀라운 말을.
“...혹시 우리 집에 같이 가지 않을래?”
*
발데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당최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잘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밖이 소란스러워 나와봤는데 포로들의 웅성거림 한가운데 떡하니 서있는 아카이 공작가의 공녀님이라니. 제시한 인장을 확인해보니 틀림없는 공작가였다.
“그러니까.. 공녀님 말씀은 그 아이를 데려가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발데스가 가야를 들먹이며 말했다. 무슨 이유에선진 모르겠지만 공녀가 가야를 콕 집어 지목한 것이다.
“그래요. 본 공녀는 그 아이와...”
소녀는 가야와 함께 있는 바라기를 떠올렸다.
“그 아이와 같이 지내던 남자까지 데려갈까 합니다. 셈은 톡톡히 치르도록 하지요.”
발데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나이임에도 투정 한번 없이 궂은 행군을 잘 따라오던 아이였다. 또 눈에 총기가 있어 내심 곁에 두고 키워볼까 싶을 정도로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러나 상대는 아카이 공작가였다. 자신의 주군인 론다트 자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성세를 구가하는 가문이다. 이런 상대가 요구하면 무엇이 되든 들어줄 수밖에 없다.
발데스가 망설인다고 여겼는지 소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얼마를 말하시든 값을 치를 생각입니다. 그러니..”
“공녀님. 전 기사이지, 장사치가 아닙니다.”
소녀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발데스가 단호하게 대답한다. 마음이 급해 자신도 모르게 흥정을 하려 했다. 소녀는 내심 자책하며 사과를 건넸다.
“아... 경에게 무례를 저질렀군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좋습니다. 데려가십시오. 돈은 필요없습니다.”
발데스는 차라리 공작가로 가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공녀에게 당부를 남겼다.
"영민한 아이입니다. 곁에 두시고 많은 가르침을 내리시면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발데스가 흔쾌히 수락하자 소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옆에 서있는 알버트의 거무죽죽한 얼굴과 사뭇 대조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실책이 있어 더이상 말하지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는게 안타까워 보인다.
그런 알버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발데스와 대화를 이어갔다.
*
“가야, 어쩐지 돌아가는 상황이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으냐?”
소녀와 발데스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던 바라기가 가야에게 물었다. 아까 그 공녀라는 아가씨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데 어쩐지 가야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가야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공허한 메아리 같다. 고개를 숙여 가야를 보니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바라기는 가야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하하하, 어느새 너도 사랑을 할 나이가 되었구나.”
바라기의 말에 당황한 가야가 팔을 버둥거린다.
“아..아니, 삼촌. 그런게 아니라!”
“아직 조그만 녀석이 벌써 발랑 까져가지곤...”
“아...그런거 아니라구--!”
바라기는 부끄러워하는 가야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너무 빨리 철이 든 것 같아 안타까웠는데, 아직 남아있는 아이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차가운 현실을 말해주어야 할 때다.
“미안하구나, 가야. 하지만 우린 해야할 일이 있다.. 그날 밤의 일을 잊어서는 안 돼."
바라기의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던 가야가 단숨에 이끌려 나온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소름 끼치게도 정말 잠깐이지만 그때의 일을 잊었었다.
가야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날의 광경을 되새긴다. 복수라는 두 글자를 가슴 속에 단단히 박아넣어야 한다.
이윽고 가야는 바라기를 보며 싱긋 웃는다.
“고마워, 삼촌. 제일 중요한 걸 잊을 뻔 했어.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지.”
바라기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가야의 미소가 너무 처연해보였기에. 아직 열두살 어린 소년이 자신의 감정을 속여가며 세상과 싸운다는 것이 너무 안쓰러웠다.
‘정말 미안하다..가야. 네게 너무 많은 짐을 강요하는구나.’
자신이 가야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제 어디까지고 함께 걸어가주는 것뿐이다. 그곳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든, 수많은 죽음들로 가득한 길이든.
바라기가 조용히 다짐하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가야가 의견을 제시했다.
“삼촌. 이제 슬슬 여기서 탈출하자. 마침 저...아가씨 덕분에 경계가 많이 허술해졌고, 지금이 축제기간이라니까 소란스러울테니 숨어들기도 쉬울거야.”
"그래. 알겠다. 잠시 상황을 좀 보자꾸나."
바라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아카이 가문의 공녀를 훔쳐 보기 바빴고, 다른 포로들은 관심없다는 듯 다시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대래만이 무덤덤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서 탈출할 셈인가?"
"네, 맞아요. 혹시 대래 아저씨도 같이 가실래요?"
들키면 놀랄 이야기를 태연스럽게도 던진다. 가야 역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바라기만 괜히 화들짝 놀라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아쉽게도 나는 가지 못 한다. 아버지가 떠났으니 내가 뒤를 이어 부족원들을 살펴야 한다. 당장 한치 앞날을 알 수 없지만은.."
"역시 그렇겠죠? 쉬운 일이 아니네요. 아버지의 과업을 물려받는다는건.."
대래의 말에 가야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대래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보기엔 넌 그 일을 쉽게 내팽개칠 정도로 요령 좋은 녀석이 아니야."
가야는 아무런 대답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어째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대래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가거라, 가야. 뒷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그리고 언젠가 내 책임을 다 할 때까지, 내 목숨이 붙어있다면 어디든 너를 찾아가겠다."
울먹이던 가야가 고개를 들어 대래를 보았을 때, 그는 지금껏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얼굴 한가득 띄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야 역시 눈물 가득한 얼굴로 밝게 웃는다.
"아저씨, 그거 알아요? 방금 처음으로 날 이름으로 불러준거?"
"...잘못 들었겠지."
바라기도 결국 웃음을 참지 못 했다.
잠시 후-.
소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소년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뒤였다.
갑자기 어디론가 공녀님이 사라져버렸다.
이리 둘러봐도 저리 둘러봐도 드레스 끝자락조차 보이지 않는다. 몇 분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에 어디로 가버리신 걸까. 알버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진정해라. 알버트! 넌 잘 해결할 수 있어!! 암, 그렇고 말고!’
마음을 다잡은 알버트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칭 문무겸비의 기사라 자부하는 자신이다.
‘납치? ..아니야. 이 짧은 시간에 ‘그 공녀’님을 아무런 흔적도 납치할 수 있을리 없지.’
납치일 가능성은 버렸다. 그렇다면.
‘혹시 미아가 되신 것일까?!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며 이 알버트를 찾고 계신 건 아닐지..!’
알버트는 자신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울고 있는 공녀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다려주세요오오---! 공녀님! 알버트가 갑니다--!!”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가는 알버트.
동료들이 그를 ‘멧돼지 기사’라 몰래 부르곤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
가야는 여지껏 자신이 이토록 당황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았다.
어릴 때부터 사냥을 하며 산짐승들과 싸웠고 목숨이 오가는 위기도 몇 번 겪었던 가야였건만, 작고 여린 소녀의 눈을 도통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저기저기 넌 이름이 뭐야? 나랑은 왜 피부색이 다른 거지? 왜 길에 누워 있던 건지 물어봐도 돼??”
바짝 얼어있는 가야에게 소녀가 다가가며 질문 공세를 펼친다. 눈동자엔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저기.. 내 이름은 가야...”
- 이 노옴--! 당장 공녀님에게서 물러나라!!
가야가 쑥쓰러워하며 말을 꺼내는 순간 웬 노호성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뒤를 돌아본 소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알버트 경! 안 돼요!!”
하지만 이미 그는 가야의 지척에 다다라있었다. 검은 꺼내지 않는다. 다만 공녀님을 희롱하는 거라 생각한 녀석에게 따끔한 벌을 줄 셈이었다.
그때-.
알버트의 측면에서 누군가 그를 덮쳐 들었다. 갑작스런 강한 충격에 잠깐 정신을 잃을 뻔 했지만, 두 어번 고개를 털며 호흡을 회복했다.
상대는 덩치 큰 외팔이 야만족. 온몸에 가득한 흉터를 보아하니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이리라.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투의 냄새에 소름이 올라오려는 순간.
“알.버.트으-----.!”
정말 소름이 돋고만 알버트는 다급히 소녀에게 달려갔다. 황소마냥 저돌적으로 달려들 땐 언제고 지금은 마치 순한 양 같은 모습이다.
“고...공녀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다치신 데는..?”
버벅이며 말하는 알버트를 보며 소녀는 한숨을 크게 내쉰다.
“알버트 경. 대체 이게 무슨 무례지? 본 공녀가 길을 잃어 저들에게 물어보던 참이었는데, 은혜를 갚지 못 할망정 공격을 하다니! 아카이 공작가에 먹칠을 할 셈인가?”
‘아...망했다. 공녀님 진짜 화나셨네...’
평소에는 애교 많고 기사와 사용인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기로 유명한 공녀였지만, 한번 화가 나면 말투부터 달라졌다. 이때는 그저 싹싹 비는 것이 최선이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사과할 대상은 제가 아닐텐데요?”
알버트가 뒤를 슬쩍 돌아보니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꽤 소란스러운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공녀님. 아무리 그래도 야만족 따위에게 사과를 하는건...앜!”
소녀에게 시원하게 정강이를 까인 알버트가 깡충깡충 뛰었다. 그런 알버트를 찌릿 노려보던 소녀가 가야에게 말했다.
“애, 정말 미안해.. 알버트 경이 좀 유난이라..”
소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고, 당황한 가야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 순간 바라기가 가야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야. 그만둬라. 저들은 우리랑은 사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다. 얽히면 너만 피곤해져.”
“삼촌...”
바라기의 만류에 가야가 말끝을 흐렸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쉬운 마음을 버릴 수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바라기의 얼굴에 가야도 결국 뒤돌아서고 만다.
“아...저..저기!”
그 모습에 아쉬워하던 소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까인 정강이를 부여잡고 깨금발 뛰던 알버트가 꽈당 자빠질만큼 놀라운 말을.
“...혹시 우리 집에 같이 가지 않을래?”
*
발데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당최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잘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밖이 소란스러워 나와봤는데 포로들의 웅성거림 한가운데 떡하니 서있는 아카이 공작가의 공녀님이라니. 제시한 인장을 확인해보니 틀림없는 공작가였다.
“그러니까.. 공녀님 말씀은 그 아이를 데려가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발데스가 가야를 들먹이며 말했다. 무슨 이유에선진 모르겠지만 공녀가 가야를 콕 집어 지목한 것이다.
“그래요. 본 공녀는 그 아이와...”
소녀는 가야와 함께 있는 바라기를 떠올렸다.
“그 아이와 같이 지내던 남자까지 데려갈까 합니다. 셈은 톡톡히 치르도록 하지요.”
발데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린 나이임에도 투정 한번 없이 궂은 행군을 잘 따라오던 아이였다. 또 눈에 총기가 있어 내심 곁에 두고 키워볼까 싶을 정도로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러나 상대는 아카이 공작가였다. 자신의 주군인 론다트 자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성세를 구가하는 가문이다. 이런 상대가 요구하면 무엇이 되든 들어줄 수밖에 없다.
발데스가 망설인다고 여겼는지 소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얼마를 말하시든 값을 치를 생각입니다. 그러니..”
“공녀님. 전 기사이지, 장사치가 아닙니다.”
소녀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발데스가 단호하게 대답한다. 마음이 급해 자신도 모르게 흥정을 하려 했다. 소녀는 내심 자책하며 사과를 건넸다.
“아... 경에게 무례를 저질렀군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좋습니다. 데려가십시오. 돈은 필요없습니다.”
발데스는 차라리 공작가로 가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공녀에게 당부를 남겼다.
"영민한 아이입니다. 곁에 두시고 많은 가르침을 내리시면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발데스가 흔쾌히 수락하자 소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옆에 서있는 알버트의 거무죽죽한 얼굴과 사뭇 대조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실책이 있어 더이상 말하지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는게 안타까워 보인다.
그런 알버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발데스와 대화를 이어갔다.
*
“가야, 어쩐지 돌아가는 상황이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으냐?”
소녀와 발데스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던 바라기가 가야에게 물었다. 아까 그 공녀라는 아가씨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데 어쩐지 가야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가야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공허한 메아리 같다. 고개를 숙여 가야를 보니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바라기는 가야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하하하, 어느새 너도 사랑을 할 나이가 되었구나.”
바라기의 말에 당황한 가야가 팔을 버둥거린다.
“아..아니, 삼촌. 그런게 아니라!”
“아직 조그만 녀석이 벌써 발랑 까져가지곤...”
“아...그런거 아니라구--!”
바라기는 부끄러워하는 가야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너무 빨리 철이 든 것 같아 안타까웠는데, 아직 남아있는 아이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차가운 현실을 말해주어야 할 때다.
“미안하구나, 가야. 하지만 우린 해야할 일이 있다.. 그날 밤의 일을 잊어서는 안 돼."
바라기의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던 가야가 단숨에 이끌려 나온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소름 끼치게도 정말 잠깐이지만 그때의 일을 잊었었다.
가야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날의 광경을 되새긴다. 복수라는 두 글자를 가슴 속에 단단히 박아넣어야 한다.
이윽고 가야는 바라기를 보며 싱긋 웃는다.
“고마워, 삼촌. 제일 중요한 걸 잊을 뻔 했어.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지.”
바라기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가야의 미소가 너무 처연해보였기에. 아직 열두살 어린 소년이 자신의 감정을 속여가며 세상과 싸운다는 것이 너무 안쓰러웠다.
‘정말 미안하다..가야. 네게 너무 많은 짐을 강요하는구나.’
자신이 가야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제 어디까지고 함께 걸어가주는 것뿐이다. 그곳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든, 수많은 죽음들로 가득한 길이든.
바라기가 조용히 다짐하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가야가 의견을 제시했다.
“삼촌. 이제 슬슬 여기서 탈출하자. 마침 저...아가씨 덕분에 경계가 많이 허술해졌고, 지금이 축제기간이라니까 소란스러울테니 숨어들기도 쉬울거야.”
"그래. 알겠다. 잠시 상황을 좀 보자꾸나."
바라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아카이 가문의 공녀를 훔쳐 보기 바빴고, 다른 포로들은 관심없다는 듯 다시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대래만이 무덤덤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서 탈출할 셈인가?"
"네, 맞아요. 혹시 대래 아저씨도 같이 가실래요?"
들키면 놀랄 이야기를 태연스럽게도 던진다. 가야 역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바라기만 괜히 화들짝 놀라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아쉽게도 나는 가지 못 한다. 아버지가 떠났으니 내가 뒤를 이어 부족원들을 살펴야 한다. 당장 한치 앞날을 알 수 없지만은.."
"역시 그렇겠죠? 쉬운 일이 아니네요. 아버지의 과업을 물려받는다는건.."
대래의 말에 가야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대래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보기엔 넌 그 일을 쉽게 내팽개칠 정도로 요령 좋은 녀석이 아니야."
가야는 아무런 대답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어째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대래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가거라, 가야. 뒷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그리고 언젠가 내 책임을 다 할 때까지, 내 목숨이 붙어있다면 어디든 너를 찾아가겠다."
울먹이던 가야가 고개를 들어 대래를 보았을 때, 그는 지금껏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얼굴 한가득 띄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야 역시 눈물 가득한 얼굴로 밝게 웃는다.
"아저씨, 그거 알아요? 방금 처음으로 날 이름으로 불러준거?"
"...잘못 들었겠지."
바라기도 결국 웃음을 참지 못 했다.
잠시 후-.
소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소년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뒤였다.
작가의 말
코로나에 걸려서... 좀 쉬엄쉬엄할게용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