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조회 : 715 추천 : 0 글자수 : 4,853 자 2022-08-08
쾅-!!
“감파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가야를 팔아넘기자는 거냐?!”
바라기가 몹시 화가 난 듯 앞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으르렁거렸다. 그럼에도 감파르는 눈 하나 깜빡 않고 여전히 유들유들한 표정이다.
“어, 맞는데?”
심지어 이젠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비고 있다. 붉으락푸르락 터지기 직전인 바라기를 간신히 뜯어말리며 가야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고..공작가와 무슨.. 아 삼촌 그만 좀! ..공작가와 무슨 거래를 한다는 거예요?”
감파르는 가야와 바라기가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이는 광경을 보며 재밌다는 듯 히죽 웃었다.
“말 그대로야. 칸의 아들인 너를 공작가에 주고, 우리는 거기에 따른 대가를 받는다. 그뿐이지.”
“이놈이 그래도?!”
“그러니까 감파르 아저씨 말은 제가 공작가에... 아 진짜! 삼촌 좀 진정해! ...간다면, 거기에 맞는 합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 거죠?”
가야의 말에 감파르의 눈빛에 살짝 감탄이 어렸다.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쉽게 읽어낸 사람은 오랜만이다.
심지어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성장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감파르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래. 나라면 너의 가치에 걸맞은 확실한 대가를 받아낼 수 있지. 그동안 공작가는 담보를 철저히 지키는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야..”
“좋아요. 가죠. 대신 이것만 좀 알려주세요. 대체 왜 공작가가 저를 수배까지 하며 찾고 있는 건지, 공작가와 황야 사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이에요."
가야의 질문에 감파르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뭔가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의 표정이다.
"우리랑 공작가랑 무슨 관계인지는 그래, 알려주는건 상관없는건데... 그나저나 너.. 공녀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이라니요..?"
순간 가야의 머릿속으로 공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혹시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자신에게 캐묻듯이 다급하게 말하는 가야를 보며, 감파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하핫! 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 녀석이 대단하구만, 아주! 어떻게 이런 부분까지 제 아비랑 똑같지? 안 그렇소 형니...엌!"
감파르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가야는 잡고 있던 바라기를 놓아버렸다. 화는 이미 가라앉았었지만 감파르의 장난이 괘씸했던 바라기가, 방심하고 있던 그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이다.
"아, 씨!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판 해보잔 거요? 예전의 감파르가 아니다 이 말이오!"
"오냐, 꼬우면 덤벼라. 네 녀석은 한손으로도 충분하다. 이놈아!"
"어차피 한손 밖에 없잖소!!"
정말 치고받고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가야는 생각했다.
'난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
아카이 공작가의 집사 클로드 커닝햄 은 집안 대대로 아카이 가문을 모셔 오면서 처음 겪어보는 황당한 경우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방금전까지 클로드는 정원을 돌아다니며 손 볼 곳은 없는지 살펴보던 중 정문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발걸음을 돌렸었다.
그곳엔 위병들과 후드를 눌러 쓴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 대화가 자못 흥미로웠다.
"아 거참, 진짜 이 집 주인이 우릴 찾았다니까?!"
"공작님이 너희 같은 부랑자를 찾을 리가 없지 않느냐! 크게 혼쭐나기 전에 얼른 돌아가거라."
위병들이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가 어찌나 힘이 센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한명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작은 것이 마치 아이 같다.
공작가의 정문 앞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있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클로드는 조심히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무슨 일인가 대체 지금?"
"아, 집사님 오셨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이놈들이 글쎄..."
클로드의 등장에 위병들이 공손히 대답하려는 순간 후드를 눌러 쓴 덩치 큰 사내가 말을 낚아챈다.
"오! 이제야 좀 말이 통할만한 사람이 왔군. 그렇게 말해줘도 저 치들이 어찌나 답답한지 참."
위병들의 인상이 험악해졌지만 클로드가 손짓하자 금세 다시 수그러들었고, 클로드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누구요, 무슨 일로 이렇듯 공작가의 앞을 소란스럽게 했는지 이유를 말해주시겠소?"
그때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아이 같은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깊게 눌러 쓴 후드를 천천히 벗어젖힌 그는 황야의 사람들과도 같은 구릿빛 피부였고,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의 눈을 가진 남자아이였다.
그 눈을 마주하며 클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공작님을 마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놀라 고개를 흔들며 털어냈지만.
잠시 그런 클로드를 바라보던 소년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곤 씩 웃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
"아가씨? 로젠 아가씨?! 어디 계세요?!"
다급한 목소리가 저택의 복도에 울려 퍼졌다. 방을 오가며 정리하던 다른 하녀들이 무슨 일인가 하며 귀를 쫑긋거린다.
"케이트? 나 여깄어."
드레스룸 쪽에서 새어 나온 대답에 케이트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왔어요 왔어!!"
"응? 뭐가 왔다는 거야. 드레스 주문했던 게 아직 남았었나? 이제 이거면 충분해 난..
로젠은 눈앞에 한가득 쌓인 드레스들을 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가(武家)의 핏줄을 이은 탓인지 활동적인 것을 즐기는 그녀였기에 치렁치렁한 것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해 남지 않은 데뷔탕트 때문에 예법을 익히고 드레스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또 입어봐야 할 드레스가 늘어난 줄 알고 질색한 것이다.
케이트는 그런 그녀가 답답한 듯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아닛, 드레스 말구요! 아가씨가 계속 노래를 부르던 사람 말이에요! 아 잠시만 물 좀.."
목에 메인 듯 옆의 주전자에서 물을 한잔 따라 마신 케이트는 다시 말을 이으려 로젠을 돌아보았다.
"어...아가씨?"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아가씨??"
이미 로젠은 밖으로 뛰쳐나간 지 오래였다. 한창 그녀는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아..진짜 이렇게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왜 입는 거람?'
로젠은 드레스를 확 벗어 던지고픈 욕구를 억누르며 바쁘게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자세하게는 못 들었지만 어차피 마지막엔 아버지에게 갈 게 뻔했으니까.
사실 로젠도 자신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정말 짧은 몇 마디 대화 나눈 것이 전부였는데 그때 마주한 눈빛을 좀처럼 잊지 못했다.
케이트는 벌써 우리 아가씨가 사랑을 알게 됐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옆구리 꼬집힘을 당하고 눈물을 찔끔했지만.
로젠이 집무실에 도착해 숨을 잠시 고르곤 노크하려는 순간 문밖으로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믿을 수밖에 없겠군. 그 눈을 보면 말이야."
"저도 공녀님을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으음...그래, 아무튼 약속은 지켜야...거기 누구 있느냐?!"
귀를 쫑긋거리며 엿듣던 로젠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공작이 갑자기 문을 벌컥 열었다. 들킨 로젠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아...안녕하세요. 아ㅃ...버지."
*
전장을 누비다 오랜만에 본가에 돌아온 공작은 잠깐의 휴식을 누리기도 전에 또 업무에 치여 있었다. 며칠 안 봤다고 책상 한가득 쌓인 서류를 보면 한숨만 푹푹 나왔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듯하다는 클로드 집사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당장 해결할 테니 얼른 데려오라 말했었는데, 서류보다도 큰 문젯거리 일 줄이야.
그 문젯거리들이 들어오자마자 내뱉은 말도 가관이었다. 뭐? 자수하러 왔습니다?
당장 끌어다 혼쭐을 내려 했는데 후드를 벗으며 자신에게 인사하는 아이의 모습은 공작의 화를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햇볕에 그을린 듯한 강한 구릿빛 피부, 그럼에도 고운 선만으로 그려낸 것 같은 미형의 얼굴, 공작 자신과 빼다박은 듯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칸...?"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와버린 말. 그러나 이내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났겠는가. 마땅한 호위조차 없이. 무엇보다 저렇게 어리지도 않다.
아 만약 아들이라면? 혹시 하는 생각에 번쩍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니, 마치 생각을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칸의 아들, 가야라고 합니다. 오랜 선조들이 맺은 맹약에 따라 한가지 거래를 청하러 왔습니다."
"맹약..? 거래..? 허!"
자신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의 아들이 이렇게 아무런 방비 없이 공작가로 온 것에 놀랐었지만, 가야가 꺼낸 맹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다 더욱 놀랐다.
지금은 잊혀진 기록이지만 사실 초대 황제가 제국을 세울 때 아카이 가문 외에도 도움을 준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야만족의 핏줄을 타고났지만 황제와 친분을 맺게 되고 제국을 세울 때 큰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아카이 가와도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었고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둘의 힘이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우려한 황제는 계책을 써서 둘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런 황제의 계책을 눈치챘지만 알량한 우정 때문에라도 차마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제국을 벗어나 고향인 황야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랑하는 그의 아내와 함께.
그는 제국을 떠나며 아카이 가문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
'에메랄드빛이 우리를 비추는 한 서로를 적대하지 말며, 거래의 이름을 띈 부탁을 한가지 들어주기로 하자.'
이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도 잊혀질만큼 오래된 이야기였다. 공작도 가문 내 비밀리 내려오는 서책들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황야 또한 이미 실전된 줄 알았는데 이런 작은 아이가 맹약을 걸고 나올 줄이야.
'재밌군.'
아카이 공작은 진심으로 재밌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지지부진 끌어온 황야와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오랜 옛날의 친우였을지는 몰라도 현재는 적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 잊혀지지 않고 내려온 맹약이란 단어는 공작에게 옛 저녁에 흘러가 버린 로맨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때문에 거래를 받아들인다.
"믿을 수밖에 없겠군. 그 눈을 보면 말이야."
"저도 공녀님을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으음...그래, 아무튼 약속은 지켜야...거기 누구 있느냐?!"
갑자기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벌컥 문을 열자 어색하게 웃는 딸이 반겨준다.
"아...안녕하세요. 아ㅃ...버지."
공작은 로젠이 아버지인 자신은 본체만체 대충 인사만 던져놓고, 흘깃흘깃 방 안의 동태만 살피는 모습이 내심 섭섭했다. 그래서일까, 괜히 커다란 덩치로 로젠의 시선을 방해해본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딸. 어떻게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 역시!!"
“감파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가야를 팔아넘기자는 거냐?!”
바라기가 몹시 화가 난 듯 앞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으르렁거렸다. 그럼에도 감파르는 눈 하나 깜빡 않고 여전히 유들유들한 표정이다.
“어, 맞는데?”
심지어 이젠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비고 있다. 붉으락푸르락 터지기 직전인 바라기를 간신히 뜯어말리며 가야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고..공작가와 무슨.. 아 삼촌 그만 좀! ..공작가와 무슨 거래를 한다는 거예요?”
감파르는 가야와 바라기가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이는 광경을 보며 재밌다는 듯 히죽 웃었다.
“말 그대로야. 칸의 아들인 너를 공작가에 주고, 우리는 거기에 따른 대가를 받는다. 그뿐이지.”
“이놈이 그래도?!”
“그러니까 감파르 아저씨 말은 제가 공작가에... 아 진짜! 삼촌 좀 진정해! ...간다면, 거기에 맞는 합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 거죠?”
가야의 말에 감파르의 눈빛에 살짝 감탄이 어렸다.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쉽게 읽어낸 사람은 오랜만이다.
심지어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성장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감파르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래. 나라면 너의 가치에 걸맞은 확실한 대가를 받아낼 수 있지. 그동안 공작가는 담보를 철저히 지키는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야..”
“좋아요. 가죠. 대신 이것만 좀 알려주세요. 대체 왜 공작가가 저를 수배까지 하며 찾고 있는 건지, 공작가와 황야 사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이에요."
가야의 질문에 감파르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뭔가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의 표정이다.
"우리랑 공작가랑 무슨 관계인지는 그래, 알려주는건 상관없는건데... 그나저나 너.. 공녀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이라니요..?"
순간 가야의 머릿속으로 공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혹시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자신에게 캐묻듯이 다급하게 말하는 가야를 보며, 감파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하핫! 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 녀석이 대단하구만, 아주! 어떻게 이런 부분까지 제 아비랑 똑같지? 안 그렇소 형니...엌!"
감파르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가야는 잡고 있던 바라기를 놓아버렸다. 화는 이미 가라앉았었지만 감파르의 장난이 괘씸했던 바라기가, 방심하고 있던 그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이다.
"아, 씨!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판 해보잔 거요? 예전의 감파르가 아니다 이 말이오!"
"오냐, 꼬우면 덤벼라. 네 녀석은 한손으로도 충분하다. 이놈아!"
"어차피 한손 밖에 없잖소!!"
정말 치고받고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가야는 생각했다.
'난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
아카이 공작가의 집사 클로드 커닝햄 은 집안 대대로 아카이 가문을 모셔 오면서 처음 겪어보는 황당한 경우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방금전까지 클로드는 정원을 돌아다니며 손 볼 곳은 없는지 살펴보던 중 정문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발걸음을 돌렸었다.
그곳엔 위병들과 후드를 눌러 쓴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 대화가 자못 흥미로웠다.
"아 거참, 진짜 이 집 주인이 우릴 찾았다니까?!"
"공작님이 너희 같은 부랑자를 찾을 리가 없지 않느냐! 크게 혼쭐나기 전에 얼른 돌아가거라."
위병들이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가 어찌나 힘이 센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한명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작은 것이 마치 아이 같다.
공작가의 정문 앞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있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클로드는 조심히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무슨 일인가 대체 지금?"
"아, 집사님 오셨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이놈들이 글쎄..."
클로드의 등장에 위병들이 공손히 대답하려는 순간 후드를 눌러 쓴 덩치 큰 사내가 말을 낚아챈다.
"오! 이제야 좀 말이 통할만한 사람이 왔군. 그렇게 말해줘도 저 치들이 어찌나 답답한지 참."
위병들의 인상이 험악해졌지만 클로드가 손짓하자 금세 다시 수그러들었고, 클로드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누구요, 무슨 일로 이렇듯 공작가의 앞을 소란스럽게 했는지 이유를 말해주시겠소?"
그때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아이 같은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깊게 눌러 쓴 후드를 천천히 벗어젖힌 그는 황야의 사람들과도 같은 구릿빛 피부였고,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의 눈을 가진 남자아이였다.
그 눈을 마주하며 클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공작님을 마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놀라 고개를 흔들며 털어냈지만.
잠시 그런 클로드를 바라보던 소년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곤 씩 웃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
"아가씨? 로젠 아가씨?! 어디 계세요?!"
다급한 목소리가 저택의 복도에 울려 퍼졌다. 방을 오가며 정리하던 다른 하녀들이 무슨 일인가 하며 귀를 쫑긋거린다.
"케이트? 나 여깄어."
드레스룸 쪽에서 새어 나온 대답에 케이트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왔어요 왔어!!"
"응? 뭐가 왔다는 거야. 드레스 주문했던 게 아직 남았었나? 이제 이거면 충분해 난..
로젠은 눈앞에 한가득 쌓인 드레스들을 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가(武家)의 핏줄을 이은 탓인지 활동적인 것을 즐기는 그녀였기에 치렁치렁한 것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해 남지 않은 데뷔탕트 때문에 예법을 익히고 드레스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또 입어봐야 할 드레스가 늘어난 줄 알고 질색한 것이다.
케이트는 그런 그녀가 답답한 듯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아닛, 드레스 말구요! 아가씨가 계속 노래를 부르던 사람 말이에요! 아 잠시만 물 좀.."
목에 메인 듯 옆의 주전자에서 물을 한잔 따라 마신 케이트는 다시 말을 이으려 로젠을 돌아보았다.
"어...아가씨?"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아가씨??"
이미 로젠은 밖으로 뛰쳐나간 지 오래였다. 한창 그녀는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아..진짜 이렇게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왜 입는 거람?'
로젠은 드레스를 확 벗어 던지고픈 욕구를 억누르며 바쁘게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자세하게는 못 들었지만 어차피 마지막엔 아버지에게 갈 게 뻔했으니까.
사실 로젠도 자신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정말 짧은 몇 마디 대화 나눈 것이 전부였는데 그때 마주한 눈빛을 좀처럼 잊지 못했다.
케이트는 벌써 우리 아가씨가 사랑을 알게 됐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옆구리 꼬집힘을 당하고 눈물을 찔끔했지만.
로젠이 집무실에 도착해 숨을 잠시 고르곤 노크하려는 순간 문밖으로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믿을 수밖에 없겠군. 그 눈을 보면 말이야."
"저도 공녀님을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으음...그래, 아무튼 약속은 지켜야...거기 누구 있느냐?!"
귀를 쫑긋거리며 엿듣던 로젠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공작이 갑자기 문을 벌컥 열었다. 들킨 로젠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아...안녕하세요. 아ㅃ...버지."
*
전장을 누비다 오랜만에 본가에 돌아온 공작은 잠깐의 휴식을 누리기도 전에 또 업무에 치여 있었다. 며칠 안 봤다고 책상 한가득 쌓인 서류를 보면 한숨만 푹푹 나왔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듯하다는 클로드 집사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당장 해결할 테니 얼른 데려오라 말했었는데, 서류보다도 큰 문젯거리 일 줄이야.
그 문젯거리들이 들어오자마자 내뱉은 말도 가관이었다. 뭐? 자수하러 왔습니다?
당장 끌어다 혼쭐을 내려 했는데 후드를 벗으며 자신에게 인사하는 아이의 모습은 공작의 화를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햇볕에 그을린 듯한 강한 구릿빛 피부, 그럼에도 고운 선만으로 그려낸 것 같은 미형의 얼굴, 공작 자신과 빼다박은 듯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칸...?"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와버린 말. 그러나 이내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났겠는가. 마땅한 호위조차 없이. 무엇보다 저렇게 어리지도 않다.
아 만약 아들이라면? 혹시 하는 생각에 번쩍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니, 마치 생각을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칸의 아들, 가야라고 합니다. 오랜 선조들이 맺은 맹약에 따라 한가지 거래를 청하러 왔습니다."
"맹약..? 거래..? 허!"
자신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의 아들이 이렇게 아무런 방비 없이 공작가로 온 것에 놀랐었지만, 가야가 꺼낸 맹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다 더욱 놀랐다.
지금은 잊혀진 기록이지만 사실 초대 황제가 제국을 세울 때 아카이 가문 외에도 도움을 준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야만족의 핏줄을 타고났지만 황제와 친분을 맺게 되고 제국을 세울 때 큰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아카이 가와도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었고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둘의 힘이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우려한 황제는 계책을 써서 둘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런 황제의 계책을 눈치챘지만 알량한 우정 때문에라도 차마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제국을 벗어나 고향인 황야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랑하는 그의 아내와 함께.
그는 제국을 떠나며 아카이 가문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
'에메랄드빛이 우리를 비추는 한 서로를 적대하지 말며, 거래의 이름을 띈 부탁을 한가지 들어주기로 하자.'
이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도 잊혀질만큼 오래된 이야기였다. 공작도 가문 내 비밀리 내려오는 서책들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황야 또한 이미 실전된 줄 알았는데 이런 작은 아이가 맹약을 걸고 나올 줄이야.
'재밌군.'
아카이 공작은 진심으로 재밌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지지부진 끌어온 황야와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오랜 옛날의 친우였을지는 몰라도 현재는 적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 잊혀지지 않고 내려온 맹약이란 단어는 공작에게 옛 저녁에 흘러가 버린 로맨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때문에 거래를 받아들인다.
"믿을 수밖에 없겠군. 그 눈을 보면 말이야."
"저도 공녀님을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으음...그래, 아무튼 약속은 지켜야...거기 누구 있느냐?!"
갑자기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벌컥 문을 열자 어색하게 웃는 딸이 반겨준다.
"아...안녕하세요. 아ㅃ...버지."
공작은 로젠이 아버지인 자신은 본체만체 대충 인사만 던져놓고, 흘깃흘깃 방 안의 동태만 살피는 모습이 내심 섭섭했다. 그래서일까, 괜히 커다란 덩치로 로젠의 시선을 방해해본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딸. 어떻게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 역시!!"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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