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조회 : 788 추천 : 0 글자수 : 4,697 자 2022-07-28
별의 노래 2화
똑-.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한다. 손끝이 움찔거린다. 미약한 신음이 입을 비집고 나온다. 이윽고 가야가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다. 바위 틈 사이에 낀 이끼와 서늘한 물방울이 맺힌 종유석들, 간혹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곤 했던 노란 숲의 동굴. 바라기와 약속했던 그 장소였다.
‘아니, 내가 어떻게 여길..?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가야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한참 숲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까지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여기서 잠들어 있었던 걸까. 가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낮은 숨소리가 들린다. 동굴 입구 방향이다. 가야는 천천히 발소릴 죽이며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삼촌?! 바라기 삼촌!"
얼마 가지 않아 벽 한편에 기대어 앉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바라기를 볼 수 있었다. 가야는 서둘러 바라기에게 달려 갔다. 가까이에서 본 바라기는 매우 격한 전투를 치른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다. 등과 허벅지에 꽂힌 몇 대의 화살을 비롯해, 넘어지고 구르면서 까이고 벗겨진 피부, 그리고 어깨어림부터 잘려나간 그의 오른팔. 참혹했다.
가야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바라기는 분명 죽는다. 휴식처로 사용했던 동굴이라 다행히 간단한 식량과 생필품, 약초 등은 비축해두었었다. 그리고 사냥을 배우며 익힌 응급처치 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삼촌...절대 죽으면 안 돼.. 제발..."
치료를 하면서 가야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혼자가 되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가족을, 부족을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 뿐인 것이 싫었다. 기억하지 못 하는 밤, 가야는 홀로 모든 짐을 짊어지기로 결심했건만. 눈앞에 나타난 희망에 가야는 울며 매달리고 만다. 열 두 살의 아직 어린 아이는 혼자가 되는 것이 너무도 겁이 났다.
*
얼마나 지났을까. 까무룩 잠이 든 가야는 문득 자신의 이마 위 온기를 느꼈다. 거칠고 투박한 온기다.
"삼촌!!"
가야는 바라기한테 와락 안겼다. 다행히 바라기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아야야, 이 놈아! 나 죽는다!! 아프다, 아퍼."
바라기는 정말로 아픈 듯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가야가 아차 하며 뒤로 물러나자 바라기가 웃음을 터트리며 가야를 다시 안아 주었다. 비록 그가 한 팔뿐이라 꽉 끌어 안아 주지는 못 했지만 가야에게는 그 온기가 너무 따듯했다.
"하하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가야. 무사했었구나! 무사했었어!!"
"삼촌...삼촌이야말로.. 많이 아플텐데...괜찮아?"
"하, 이 정도 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가야 너도 잘 알잖냐. 내가 엄청 건강한 거. 하하하핫!"
바라기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 호탕한 웃음에 가야도 슬몃 웃음을 지으려다 문득 바라기의 허전한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바라기도 웃음을 멈추고는 왼팔로 가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괜찮다. 가야. 그래도 살아 남았잖냐. 살아있으면 된 거야. 안 그래도 요새 몸이 좀 무거웠는데 한결 가벼워지고 뭐 괜찮구나."
왼팔을 붕붕 돌려보는 바라기. 그 모습을 보며 가야는 억지 웃음을 지어본다. 잠시 무거운 분위기가 둘 사이에 맴돌았다.
"가야, 우린 이제부터 숲을 지나 제국으로 가야한다. 분명 우리를 쫓아 추적대가 올테니까. 황야에서는 반로족의 추적을 벗어날 수가 없어."
"...알겠어."
바라기의 말에 가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무엇보다 바라기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에 장시간의 도망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바라기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건장한 구야족의 대전사라도 간밤의 상처와 출혈은 너무 컸다.
"그래. 떠나버린 칸을 위해서라도, 부족 모두를 위해서라도, 가야. 너는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와 너의 자리를 되찾거라."
"...알겠어. 약속해. 난 반드시 돌아올거야! 그리고 그땐.. 삼촌도 함께야."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굴에서 여분의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했다. 그렇게 작은 늑대는 숲을 벗어나 황야를 떠난다.
*
"다시 한번 말해보자면, 그러니까 네 말은 남자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도망치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놓쳤다..?"
"네...네! 맞습니다!!"
짜악-!
"흠..네 말이 맞구나. 그래. 맞아야지."
진아시는 자신의 두꺼운 손바닥에 맞고 날아가 기절해버린 전사를 일별하고는, 옆에 시립해있던 부관에게 말했다. 손바닥이 약간 아린 걸 보니 진아시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듯하다.
"당장 남자와 아이를 쫓을 추적대를 구성해라. 놓치면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 후..그리고 저 놈, 데려가서 치료는 해줘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인근 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내려두었습니다. 다음 보름날, 붉은 평야에 다들 모일 것입니다."
부관의 말에 진아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황야의 패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겠지. 선택지는 단 둘 뿐이다. 따르거나, 혹은 멸망하거나."
진아시의 말에 부관은 공손히 머리를 숙인다. 더없이 공경의 의미를 가득 담아.
"모든 것은 칸의 뜻대로."
*
숲은 바라기의 영역이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전성기만은 못 하더라도 그는 부족을 대표하는 사냥꾼이었다. 특히나 노란 숲은 그의 주무대, 조금 과장해서 눈을 감고도 오갈 수 있을 정도였다.
숙련된 사냥꾼인 그는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가며 다른 곳으로 추적대를 유인할 함정들을 설치해두었다. 부상을 입은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솜씨였다.
가야는 그런 바라기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원래도 배움이 빨랐었지만 어쩐지 지난 밤을 보낸 후부터 더욱 집중도 잘 되고 체력도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가야는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바라기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숲을 벗어난다. 그럼 제국과의 경계선에 접어들거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인데.."
제국은 가야의 부족들을 야만인이라 여기며 가까이 하는 것을 꺼렸다. 그렇지만 무서운 기마민족을 선뜻 토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강을 따라 긴 장성을 쌓았다. 야만인들이 섣불리 침공할 수 없도록 말이다. 덕분에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큰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국경을 넘는 소규모 국지전은 여전히 잦은 편이었다. 야만인들은 식량을 위해, 제국인들은 복수와 이득을 위해.
"어쩐다.. 제국의 국경을 넘을 방법이 음..."
"삼촌, 삼촌. 저기 마을이 좀 이상해."
가야가 고민에 잠긴 바라기의 허리춤을 잡고 흔든다. 하지만 국경을 넘을 생각에 몰두해 있는 바라기는 건성으로 흘려 들으며 대답했다.
"응? 그래그래. 거긴 아투족 마을인데 어차피 못 간다. 추적자들한테 꼬리를 밟힐 수도 있..."
"아니, 마을에 연기가 가득해! 싸우고 있는 것 같다구!!"
가야는 답답했는지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제야 바라기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마을 방향을 쳐다본다.
"에엥? 저게 뭐야. 음...저건 제국군 깃발인데?"
자세히 보니 아투족 마을이 제국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원래였다면 구야족의 비호를 받았을텐데, 구야족이 사라져버린 지금은 제국군의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다만 구야족의 부재를 어찌 알고 틈을 노려 쳐들어 왔는지는 의문이었지만.
"하.. 제국 놈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쳐들어온거지? 아무튼 좀 돌아서 가야겠구나. 자, 얼른 가자."
바라기가 가야의 손을 잡아 끌었지만 어쩐 일인지 가야는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가야가 한 곳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왜 그러냐, 가야?”
바라기도 가야의 시선을 좇는다. 그곳엔 제국군이 포로로 잡은 아투족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밧줄에 손을 묶인 채 제국군의 감시를 받고 있다. 그 모습을 본 바라기가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제국놈들. 어찌 알고 기회다 싶어 노략질하러 왔구만. 하지만 가야.. 지금 당장 우리로선 어쩔 수가 없다. 우선은 달아나야 한다.”
바라기가 가야를 다독였다. 그때 계속 제국군과 아투족 포로들을 지켜보던 가야가 바라기를 보며 소리쳤다.
“삼촌, 좋은 생각이 났어요!”
*
제국의 기사, 발데스 허트만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불쾌하고 싫었다. 야만족의 마을을 공격하는 것까지는 문제 없었으나, 기사도를 숭상하는 그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노략질은 참아내기 버거웠다. 폭력과 강탈, 강간 등 인간의 온갖 추악한 면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다만 살인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잡아다 사고 팔다니... 명예로운 제국인들이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발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주군인 론다트 자작의 명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더러운 다툼에는 절대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주군이 원망스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이내 발데스는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뼛속까지 기사인 그는 그저 주군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힘없는 이들의 피해를 줄이는 것뿐이다.’
발데스는 흥분한 제국 병사들이 자칫 사람을 죽이려 들거나, 여자가 몸을 더럽힐 위기일 때 이를 막아주었다. 사실 이것은 위선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이 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작은 남자 아이와 부상을 입은 듯한 늙은 남자들 또한 그 대상이었다. 발데스는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괜히 어물쩡대다가 큰일 날 수도 있다. 저기 있는 포로 수용소로 가있거라. 내 특별히 말해두었으니 손찌검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발데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포로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그들의 모습에 발데스는 슬쩍 웃었다.
‘그나저나 방금 꼬마 녀석, 눈빛 하난 정말 맘에 드는군. 어쩐지 빛이 나는 느낌이야. 야만족만 아니었더라면... 아쉽군.”
거의 스쳐가듯 본 것뿐이었는데 어쩐지 발데스는 그 아이를 선뜻 잊을 수 없었다. 묘하게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아이다.
‘다음에 또 다시 볼 기회가 있겠지.’
이제 다시 위선을 베풀 시간이다.
*
구야족은 칸이 늑대의 후예라는 전승을 따랐다. 그때문인지 구야족은 늑대의 영역을 존중했고, 늑대들 역시 구야족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구야족의 마을이 불타 사라지는 지금도 늑대들은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묵묵히.
그런 늑대들을 지나 숲 안 어딘가 깊은 곳을 따라가보면 늑대들의 굴이 있다. 많은 늑대무리들이 모여사는만큼 그곳엔 수많은 동굴들이 있었다. 그 중 어느 깊은 곳, 아주 깊은 곳에서 묘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비명소리와도 같은.
-아아아-!
늑대들이 우는 것일까. 폐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쥐어짜내는 듯한 소리다. 그 소리는 매우 날카로웠고 음산했으며 안타까웠다.
-으아아아--아아아!!
귀를 막고 소리를 따라가본다. 한참을 거슬러 깊은 동굴 속, 거대한 늑대가 있다. 그 늑대는 자신의 품에 안겨 비명을 지르며 우는 무언가를 안타까운 듯 보고 있었다. 잠깐 진정하는가 싶었던 그 무언가는 다시 이내 흐느껴운다.
얼마나 울었을까. 마치 여자아이의 긴 머리카락 같은 갈기를 가진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죽일 거야..모두 죽여버리고 말거야..!"
똑-.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한다. 손끝이 움찔거린다. 미약한 신음이 입을 비집고 나온다. 이윽고 가야가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다. 바위 틈 사이에 낀 이끼와 서늘한 물방울이 맺힌 종유석들, 간혹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곤 했던 노란 숲의 동굴. 바라기와 약속했던 그 장소였다.
‘아니, 내가 어떻게 여길..?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가야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한참 숲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까지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여기서 잠들어 있었던 걸까. 가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낮은 숨소리가 들린다. 동굴 입구 방향이다. 가야는 천천히 발소릴 죽이며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삼촌?! 바라기 삼촌!"
얼마 가지 않아 벽 한편에 기대어 앉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바라기를 볼 수 있었다. 가야는 서둘러 바라기에게 달려 갔다. 가까이에서 본 바라기는 매우 격한 전투를 치른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다. 등과 허벅지에 꽂힌 몇 대의 화살을 비롯해, 넘어지고 구르면서 까이고 벗겨진 피부, 그리고 어깨어림부터 잘려나간 그의 오른팔. 참혹했다.
가야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바라기는 분명 죽는다. 휴식처로 사용했던 동굴이라 다행히 간단한 식량과 생필품, 약초 등은 비축해두었었다. 그리고 사냥을 배우며 익힌 응급처치 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삼촌...절대 죽으면 안 돼.. 제발..."
치료를 하면서 가야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혼자가 되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가족을, 부족을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 뿐인 것이 싫었다. 기억하지 못 하는 밤, 가야는 홀로 모든 짐을 짊어지기로 결심했건만. 눈앞에 나타난 희망에 가야는 울며 매달리고 만다. 열 두 살의 아직 어린 아이는 혼자가 되는 것이 너무도 겁이 났다.
*
얼마나 지났을까. 까무룩 잠이 든 가야는 문득 자신의 이마 위 온기를 느꼈다. 거칠고 투박한 온기다.
"삼촌!!"
가야는 바라기한테 와락 안겼다. 다행히 바라기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아야야, 이 놈아! 나 죽는다!! 아프다, 아퍼."
바라기는 정말로 아픈 듯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가야가 아차 하며 뒤로 물러나자 바라기가 웃음을 터트리며 가야를 다시 안아 주었다. 비록 그가 한 팔뿐이라 꽉 끌어 안아 주지는 못 했지만 가야에게는 그 온기가 너무 따듯했다.
"하하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가야. 무사했었구나! 무사했었어!!"
"삼촌...삼촌이야말로.. 많이 아플텐데...괜찮아?"
"하, 이 정도 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가야 너도 잘 알잖냐. 내가 엄청 건강한 거. 하하하핫!"
바라기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 호탕한 웃음에 가야도 슬몃 웃음을 지으려다 문득 바라기의 허전한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바라기도 웃음을 멈추고는 왼팔로 가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괜찮다. 가야. 그래도 살아 남았잖냐. 살아있으면 된 거야. 안 그래도 요새 몸이 좀 무거웠는데 한결 가벼워지고 뭐 괜찮구나."
왼팔을 붕붕 돌려보는 바라기. 그 모습을 보며 가야는 억지 웃음을 지어본다. 잠시 무거운 분위기가 둘 사이에 맴돌았다.
"가야, 우린 이제부터 숲을 지나 제국으로 가야한다. 분명 우리를 쫓아 추적대가 올테니까. 황야에서는 반로족의 추적을 벗어날 수가 없어."
"...알겠어."
바라기의 말에 가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무엇보다 바라기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에 장시간의 도망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바라기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건장한 구야족의 대전사라도 간밤의 상처와 출혈은 너무 컸다.
"그래. 떠나버린 칸을 위해서라도, 부족 모두를 위해서라도, 가야. 너는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와 너의 자리를 되찾거라."
"...알겠어. 약속해. 난 반드시 돌아올거야! 그리고 그땐.. 삼촌도 함께야."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굴에서 여분의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했다. 그렇게 작은 늑대는 숲을 벗어나 황야를 떠난다.
*
"다시 한번 말해보자면, 그러니까 네 말은 남자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도망치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놓쳤다..?"
"네...네! 맞습니다!!"
짜악-!
"흠..네 말이 맞구나. 그래. 맞아야지."
진아시는 자신의 두꺼운 손바닥에 맞고 날아가 기절해버린 전사를 일별하고는, 옆에 시립해있던 부관에게 말했다. 손바닥이 약간 아린 걸 보니 진아시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듯하다.
"당장 남자와 아이를 쫓을 추적대를 구성해라. 놓치면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 후..그리고 저 놈, 데려가서 치료는 해줘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인근 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내려두었습니다. 다음 보름날, 붉은 평야에 다들 모일 것입니다."
부관의 말에 진아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황야의 패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겠지. 선택지는 단 둘 뿐이다. 따르거나, 혹은 멸망하거나."
진아시의 말에 부관은 공손히 머리를 숙인다. 더없이 공경의 의미를 가득 담아.
"모든 것은 칸의 뜻대로."
*
숲은 바라기의 영역이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전성기만은 못 하더라도 그는 부족을 대표하는 사냥꾼이었다. 특히나 노란 숲은 그의 주무대, 조금 과장해서 눈을 감고도 오갈 수 있을 정도였다.
숙련된 사냥꾼인 그는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가며 다른 곳으로 추적대를 유인할 함정들을 설치해두었다. 부상을 입은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솜씨였다.
가야는 그런 바라기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원래도 배움이 빨랐었지만 어쩐지 지난 밤을 보낸 후부터 더욱 집중도 잘 되고 체력도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가야는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바라기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숲을 벗어난다. 그럼 제국과의 경계선에 접어들거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인데.."
제국은 가야의 부족들을 야만인이라 여기며 가까이 하는 것을 꺼렸다. 그렇지만 무서운 기마민족을 선뜻 토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강을 따라 긴 장성을 쌓았다. 야만인들이 섣불리 침공할 수 없도록 말이다. 덕분에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큰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국경을 넘는 소규모 국지전은 여전히 잦은 편이었다. 야만인들은 식량을 위해, 제국인들은 복수와 이득을 위해.
"어쩐다.. 제국의 국경을 넘을 방법이 음..."
"삼촌, 삼촌. 저기 마을이 좀 이상해."
가야가 고민에 잠긴 바라기의 허리춤을 잡고 흔든다. 하지만 국경을 넘을 생각에 몰두해 있는 바라기는 건성으로 흘려 들으며 대답했다.
"응? 그래그래. 거긴 아투족 마을인데 어차피 못 간다. 추적자들한테 꼬리를 밟힐 수도 있..."
"아니, 마을에 연기가 가득해! 싸우고 있는 것 같다구!!"
가야는 답답했는지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제야 바라기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마을 방향을 쳐다본다.
"에엥? 저게 뭐야. 음...저건 제국군 깃발인데?"
자세히 보니 아투족 마을이 제국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원래였다면 구야족의 비호를 받았을텐데, 구야족이 사라져버린 지금은 제국군의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다만 구야족의 부재를 어찌 알고 틈을 노려 쳐들어 왔는지는 의문이었지만.
"하.. 제국 놈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쳐들어온거지? 아무튼 좀 돌아서 가야겠구나. 자, 얼른 가자."
바라기가 가야의 손을 잡아 끌었지만 어쩐 일인지 가야는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가야가 한 곳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왜 그러냐, 가야?”
바라기도 가야의 시선을 좇는다. 그곳엔 제국군이 포로로 잡은 아투족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밧줄에 손을 묶인 채 제국군의 감시를 받고 있다. 그 모습을 본 바라기가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제국놈들. 어찌 알고 기회다 싶어 노략질하러 왔구만. 하지만 가야.. 지금 당장 우리로선 어쩔 수가 없다. 우선은 달아나야 한다.”
바라기가 가야를 다독였다. 그때 계속 제국군과 아투족 포로들을 지켜보던 가야가 바라기를 보며 소리쳤다.
“삼촌, 좋은 생각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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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사, 발데스 허트만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불쾌하고 싫었다. 야만족의 마을을 공격하는 것까지는 문제 없었으나, 기사도를 숭상하는 그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노략질은 참아내기 버거웠다. 폭력과 강탈, 강간 등 인간의 온갖 추악한 면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다만 살인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잡아다 사고 팔다니... 명예로운 제국인들이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발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주군인 론다트 자작의 명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더러운 다툼에는 절대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주군이 원망스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이내 발데스는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뼛속까지 기사인 그는 그저 주군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힘없는 이들의 피해를 줄이는 것뿐이다.’
발데스는 흥분한 제국 병사들이 자칫 사람을 죽이려 들거나, 여자가 몸을 더럽힐 위기일 때 이를 막아주었다. 사실 이것은 위선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이 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작은 남자 아이와 부상을 입은 듯한 늙은 남자들 또한 그 대상이었다. 발데스는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괜히 어물쩡대다가 큰일 날 수도 있다. 저기 있는 포로 수용소로 가있거라. 내 특별히 말해두었으니 손찌검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발데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포로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그들의 모습에 발데스는 슬쩍 웃었다.
‘그나저나 방금 꼬마 녀석, 눈빛 하난 정말 맘에 드는군. 어쩐지 빛이 나는 느낌이야. 야만족만 아니었더라면... 아쉽군.”
거의 스쳐가듯 본 것뿐이었는데 어쩐지 발데스는 그 아이를 선뜻 잊을 수 없었다. 묘하게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아이다.
‘다음에 또 다시 볼 기회가 있겠지.’
이제 다시 위선을 베풀 시간이다.
*
구야족은 칸이 늑대의 후예라는 전승을 따랐다. 그때문인지 구야족은 늑대의 영역을 존중했고, 늑대들 역시 구야족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구야족의 마을이 불타 사라지는 지금도 늑대들은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묵묵히.
그런 늑대들을 지나 숲 안 어딘가 깊은 곳을 따라가보면 늑대들의 굴이 있다. 많은 늑대무리들이 모여사는만큼 그곳엔 수많은 동굴들이 있었다. 그 중 어느 깊은 곳, 아주 깊은 곳에서 묘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비명소리와도 같은.
-아아아-!
늑대들이 우는 것일까. 폐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쥐어짜내는 듯한 소리다. 그 소리는 매우 날카로웠고 음산했으며 안타까웠다.
-으아아아--아아아!!
귀를 막고 소리를 따라가본다. 한참을 거슬러 깊은 동굴 속, 거대한 늑대가 있다. 그 늑대는 자신의 품에 안겨 비명을 지르며 우는 무언가를 안타까운 듯 보고 있었다. 잠깐 진정하는가 싶었던 그 무언가는 다시 이내 흐느껴운다.
얼마나 울었을까. 마치 여자아이의 긴 머리카락 같은 갈기를 가진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죽일 거야..모두 죽여버리고 말거야..!"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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