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조회 : 715 추천 : 0 글자수 : 5,069 자 2022-08-05
제국의 시작부터 아카이 공작가는 언제나 함께였다. 수많은 귀족가문들이 이름을 알리고 스러지기를 반복하는 오랜 시간 동안, 아카이라는 이름은 늘 그들의 위에 서 있었다.
아카이 공작가는 특히 검술로 유명했는데 호사가들은 아카이가문의 가주를 대륙의 검이라 칭하곤 할 정도였다.
아카이 공작령은 제국의 동부에 위치했는데 알트 왕국과 야만족의 땅이라 불리는 황야, 두 곳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제국의 눈치를 보는 알트 왕국과는 달리 매우 호전적이었던 황야는 시시때때로 약탈하려 들어 전투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어쩐 일인지 황야가 잠잠했다. 아카이 공작은 혹시 대규모 공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방의 수비태세와 경계를 더욱 강화할 것을 명하고 정비를 하기 위해 본가로 돌아온 참이었다.
마침 사랑하는 딸의 생일인데다가 오랜만에 볼 가족들의 모습에 공작은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아침이 되자마자 자신한테 총총 뛰어와 모닝 키스를 해주는 딸을 안을 때까지는 좋았다. 아니, 좋았었다.
딸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기 전까진. 한껏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펑 터져버린 기분이다. 공작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조용히 다시 물어보았다.
“로젠, 내가 아직 여독이 덜 풀렸는지 말을 제대로 못 들은 것 같구나. 다시 한번 천천히 말해주겠니?”
“어휴... 사람 좀 찾아달라구요! 내 또래의 남자아인데 얼굴은...”
딸이 계속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공작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남자아이라는 단어만 귓속에서 메아리칠 뿐.
대륙의 검이라 불리는 그도 딸 앞에서는 대륙의 딸 바보에 불과한 듯하다.
“저...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로젠의 호위기사 알버트가 조심스레 공작에게 말을 거는 순간, 온갖 상상의 나래를 헤엄치던 공작이 외친다.
“...내 딸은 안 돼!!”
갑작스러운 공작의 외침에 로젠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알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또 시작이시군...’
자신이 내쉰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인가, 갑작스레 공작은 인상을 한가득 쓰며 알버트를 획하고 돌아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았다.
“당장 수배 내려!! 그 자식...당장 내 눈앞으로 끌고 와. 내일까지 못 잡아오면...”
뿌드드득-.
“네--넵! 저..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그래...어디 얼마나 잘났는지 얼굴 좀 보자.”
공작은 불퉁대며 거친 발걸음으로 집무실로 향했고 알버트는 울상이 가득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우선 목표는 이룬 로젠만이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한데요? 제국의 축제는 우리랑 다른가 봐요. 우리는 한번 축제를 시작하면 다들 뻗을 때까지 마시잖아요.”
숨어서 성문의 경계를 살펴보던 가야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기에게 물어보았다. 바라기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한다.
“흥! 거기 작은 놈들이 다...아, 아니다. 하여튼 제국 놈들 중엔 남자다운 놈들이 없단 말이지.”
바라기가 눈치를 보며 황급히 말을 바꾸는 모습에 가야가 키득거린다.
여관의 세탁물 더미에서 몇 가지 옷과 후드를 챙겨 위장한 것까진 좋았는데, 이른 새벽 시간임에도 성문의 경계가 예상외로 튼튼했다.
하물며 둘은 피부색부터 제국인들과 달랐기에 눈에 띄지 않을래야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야밤을 틈타 달아나려 했던 것인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자,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해볼까?”
바라기는 품에서 커다란 찐 감자를 몇 덩이 꺼내더니 가야에게 건네주었다. 옷가지를 슬쩍하는 김에 겸사겸사 챙겨두었던 것들이다.
“우물우물... 삼촌. 원래 어디를 가든 마을에서 우물우물... 지름길 같은 거 잘 알고 개구멍 잘 찾는 사람 있지 않아요?”
“그렇지? 길잡이들은 어딜 가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전투에서 제국 녀석들을 몇 놈 잡았었는데 정보길드라는게 있다 하더구나. 보통은 허름한 술집으로 위장하고 있다나 뭐라나...”
순식간에 자신의 몫을 해치운 바라기는 품을 다시 뒤적거려보지만 감자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바라기는 가야에게 마지막 감자를 건넸다.
가야 역시 자연스럽게 감자를 받더니 반으로 쪼개어 한 조각을 바라기에게 돌려주었다. 실제로 황야에서는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과정이 황야의 사람들한텐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바로 식량의 분배를 맡긴 것이다. 이는 바라기가 가야를 윗사람으로 인정했다는 말인 셈이다.
“정보길드.. 우물우물.. 한 번 찾아볼까요?”
“하긴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대로는 길이 안 보이니까.”
“허름한 술집을 찾아봐야 한다는 거죠?”
가야의 질문에 바라기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딱히 크게 신경 써서 듣지 않았던 정보여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더욱 가물가물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도 알겠다는 듯 가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어? 이놈아. 네놈도 나이 먹어봐라!”
“네네, 하지만 아직 전 파릇파릇해서 잘 모르겠네요~~."
"요요...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피 말리는 즐거운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을 보면 신고하거나 잡아달라? 맞습니까요, 기사님?"
용병 길드의 아카이 공작령 지부장, 한스는 갑작스런 공작가의 의뢰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워낙 치안이 좋은 공작령이라 용병들이 할 일은 잔심부름 정도밖에 없어 일거리가 늘 부족했다. 때문에 용병들 수도 적었고 당연히 지부장의 힘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꽤 괜찮은 기회였다. 어차피 용병 길드 내에서의 입지는 미약하니 공작가와 친분을 더 쌓아두는 것이 미래를 생각하면 훨씬 이득일 것이다.
한스가 머릿속으로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까 생각하던 중 그의 앞에 쩔그렁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금화가 한가득 이다.
“영지 내 모든 용병들을 모두 고용하겠네. 반드시! 최대한 빨리 이들을 찾아야 해! 안 그러면...내 목숨이..”
어쩐지 기사의 말끝이 점점 흐려져서 확실히 들리진 않았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눈앞의 금화다. 한스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당장 용병들 싹 풀어서 수색해보겠습니다. 혹시 특징할만 한 것이 있다면 알려주시지요.”
“특징? 거기 그림에 있는 그대로라네. 남자는 외팔이 덩치 큰 남자고, 아이는 검은 머리에..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가졌지. 아...그러고보니 신기하게도 아카이 가문과 색이 비슷하군. 흠...그래서 공녀님이 끌리신 건가..”
기사의 말에 한스는 귀를 쫑긋했다. 혼잣말 식으로 마지막은 웅얼거렸지만, 평소 귀가 밝았던 한스였기에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눈치챈 척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음...또 다른 특징은 없습니까요?”
“둘 다 황야의 야만족들이라 바로 티가 날걸세. 큰 문제 없지 않겠나?”
기사의 말에 한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감췄다. 영업용 미소를 다시 장착하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하하, 기사님. 미처 모르고 계셨군요. 영지 내에 의외로 황야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예로 사는 이들도 있고 용병으로 사는 이들도 있지요. 뭐 개중에는 정탐하기 위해 들어온 첩자들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허...그..그렇소? 그건 몰랐군.. 그럼 내일까지 못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이오?!”
어쩐지 다급해지는 기사의 말에 한스가 싱긋 웃는다.
“아..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서 영지 내의 다른 길드들에게도 이야기해두겠습니다요. 귀신이 아닌 이상에야 세상 전체가 감시하는 셈인데 어찌 벗어나겠습니까. 하하하! 대신 돈이 좀 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알겠네. 공작님께서 직접 내린 명인만큼 자금은 걱정 말고 확실하게만 수행해주게!”
“헉! 공작님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호구를 잡았다며 얼마나 등골을 빼먹을까 계산을 하던 한스는 공작님이 내린 명이라는 말에 기겁했다. 재빨리 머릿속 계산을 지우고 깔끔하게 다시 셈해본다.
“아하하하..이거면 충분하겠습니다요, 기사님.”
“아, 그렇소? 혹시나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반드시 꼭 찾아야 한다오.. ”
“알겠습니다! 저만 믿고 맡겨주시지요. 대신 공작님께 제 이름 한 번만 넌지시 좀 흘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요.”
어차피 울궈먹기는 힘든 상황이라면 차라리 이름이라도 알려두는 게 남는 장사이리라. 한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기사에게 약속을 부탁했다. 기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한다.
“이 알버트 데메르탄. 약속은 지키오. 잊지 않고 전해드리지.”
찾아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못 하겠는가. 그럴 수만 있다면 알버트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신의 비상금까지도 모두 털 수 있었다.
*
끼이이익-.
꽤 심하게 녹이 슬었는지 경첩이 아픈 소리를 낸다. 비명과 함께 들어온 것은 두 사람이었다. 덩치 큰 외팔의 남자와 아직은 어린 남자아이.
두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무례하게 힐끔거렸다. 거의 모든 창문을 닫아두어 햇빛이 들어오지 못했기에 내부는 어두웠다.
군데군데 켜둔 작은 양초들이 어렴풋이 빛을 내었는데, 그 빛은 마치 방문자들을 어딘가로 유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야, 여기는 좀 어때 보이냐?”
덩치 큰 외팔의 남자, 바라기가 가야의 귀에 소곤거렸고 가야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다 들으라는 듯 어쩐지 크게 말하는 가야였다.
“아까 이렇게 미리 물었어야지. 왜 급하게 여기가 정보길드 맞느냐면서 소리치다가 술집을 두 개나 깨부수냐고... 어휴, 삼촌. 이번엔 그럼 안 돼!”
가야의 말에 건물 안의 사람들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생긋 웃으며, 열심히 술잔을 닦는 척하는 주인장에게 걸어갔다.
내부가 어둡다 보니 멀리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가보니 어째 주인장의 피부색이 제국인들과는 달랐다. 마치 황야의 사람인 것 같다.
갑작스런 상황에 가야가 당황해 하는 동안, 바라기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다가 주인장을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물었다.
“혹시 감파르...인가?”
“끄응...”
주인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앓는 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굽혔던 허리를 펴는데, 왜소해 보였던 주인장이 점점 커지더니 바라기와 비슷한 덩치가 되었다.
가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표정이다.
“하하하하하-! 여전하구만. 형님 눈썰미는 여전히 날카롭네그려. 그래, 맞소. 나 감파르요, 형님.”
“하...이 녀석 살아있었구나!!”
바라기와 감파르가 격정적으로 껴안았다. 가야는 옆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자칫하면 샌드위치가 될 뻔했다.
“이렇게 쉽게 들킬 줄은 몰랐소. 해 바라기의 이름이 역시 괜한 게 아니구랴.”
감파르의 말에 바라기는 쓴웃음을 짓는다.
“다 옛말이다. 이젠 팔 하나 없는 머저리에 불과해.”
“하하, 그런 말 해봤자 아무도 안 믿소. 아무튼 정보 길드에 온 것을 환영하오, 형님. 쌓인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저 녀석이 우리 칸의 아들이오?”
감파르의 시선이 가야를 향한다. 가야가 바라기를 보자 바라기는 부드럽게 미소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그제야 가야는 감파르에게 인사를 건넨다.
“반갑습니다. 감파르. 저는 선대 칸의 아들, 가야라고 합니다.”
감파르는 피식 웃으며 가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하하하 반갑다! 요 녀석아. 너 진짜 똥오줌 못 가릴 때 보고 처음이지? 참 많이 컸구나.”
가야의 눈이 다시 또 동그래진다.
“이럴 땐 제 아빠랑 똑같네그려. 하하하! 아...이럴 때가 아니지.”
잠깐 숨을 고른 감파르는 재차 말을 이었다.
“영지 내에 두 사람의 수배서가 붙기 시작했소. 경계도 더욱 삼엄해진 마당이고...빠져나가는 것이 어렵게 됐단 말이지..”
가야와 바라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감파르의 입을 계속 주시했다. 감파르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씩 웃더니 깜짝 놀랄 말을 던졌다.
“그러니 우리는 공작가와 거래를 합시다! 담보는 저 녀석으로 말입니다.”
감파르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가야가 어리둥절해하며 서 있었다.
아카이 공작가는 특히 검술로 유명했는데 호사가들은 아카이가문의 가주를 대륙의 검이라 칭하곤 할 정도였다.
아카이 공작령은 제국의 동부에 위치했는데 알트 왕국과 야만족의 땅이라 불리는 황야, 두 곳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제국의 눈치를 보는 알트 왕국과는 달리 매우 호전적이었던 황야는 시시때때로 약탈하려 들어 전투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어쩐 일인지 황야가 잠잠했다. 아카이 공작은 혹시 대규모 공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방의 수비태세와 경계를 더욱 강화할 것을 명하고 정비를 하기 위해 본가로 돌아온 참이었다.
마침 사랑하는 딸의 생일인데다가 오랜만에 볼 가족들의 모습에 공작은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아침이 되자마자 자신한테 총총 뛰어와 모닝 키스를 해주는 딸을 안을 때까지는 좋았다. 아니, 좋았었다.
딸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기 전까진. 한껏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펑 터져버린 기분이다. 공작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조용히 다시 물어보았다.
“로젠, 내가 아직 여독이 덜 풀렸는지 말을 제대로 못 들은 것 같구나. 다시 한번 천천히 말해주겠니?”
“어휴... 사람 좀 찾아달라구요! 내 또래의 남자아인데 얼굴은...”
딸이 계속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공작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남자아이라는 단어만 귓속에서 메아리칠 뿐.
대륙의 검이라 불리는 그도 딸 앞에서는 대륙의 딸 바보에 불과한 듯하다.
“저...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로젠의 호위기사 알버트가 조심스레 공작에게 말을 거는 순간, 온갖 상상의 나래를 헤엄치던 공작이 외친다.
“...내 딸은 안 돼!!”
갑작스러운 공작의 외침에 로젠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알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또 시작이시군...’
자신이 내쉰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인가, 갑작스레 공작은 인상을 한가득 쓰며 알버트를 획하고 돌아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았다.
“당장 수배 내려!! 그 자식...당장 내 눈앞으로 끌고 와. 내일까지 못 잡아오면...”
뿌드드득-.
“네--넵! 저..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그래...어디 얼마나 잘났는지 얼굴 좀 보자.”
공작은 불퉁대며 거친 발걸음으로 집무실로 향했고 알버트는 울상이 가득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우선 목표는 이룬 로젠만이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한데요? 제국의 축제는 우리랑 다른가 봐요. 우리는 한번 축제를 시작하면 다들 뻗을 때까지 마시잖아요.”
숨어서 성문의 경계를 살펴보던 가야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기에게 물어보았다. 바라기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한다.
“흥! 거기 작은 놈들이 다...아, 아니다. 하여튼 제국 놈들 중엔 남자다운 놈들이 없단 말이지.”
바라기가 눈치를 보며 황급히 말을 바꾸는 모습에 가야가 키득거린다.
여관의 세탁물 더미에서 몇 가지 옷과 후드를 챙겨 위장한 것까진 좋았는데, 이른 새벽 시간임에도 성문의 경계가 예상외로 튼튼했다.
하물며 둘은 피부색부터 제국인들과 달랐기에 눈에 띄지 않을래야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야밤을 틈타 달아나려 했던 것인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자,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해볼까?”
바라기는 품에서 커다란 찐 감자를 몇 덩이 꺼내더니 가야에게 건네주었다. 옷가지를 슬쩍하는 김에 겸사겸사 챙겨두었던 것들이다.
“우물우물... 삼촌. 원래 어디를 가든 마을에서 우물우물... 지름길 같은 거 잘 알고 개구멍 잘 찾는 사람 있지 않아요?”
“그렇지? 길잡이들은 어딜 가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전투에서 제국 녀석들을 몇 놈 잡았었는데 정보길드라는게 있다 하더구나. 보통은 허름한 술집으로 위장하고 있다나 뭐라나...”
순식간에 자신의 몫을 해치운 바라기는 품을 다시 뒤적거려보지만 감자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바라기는 가야에게 마지막 감자를 건넸다.
가야 역시 자연스럽게 감자를 받더니 반으로 쪼개어 한 조각을 바라기에게 돌려주었다. 실제로 황야에서는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과정이 황야의 사람들한텐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바로 식량의 분배를 맡긴 것이다. 이는 바라기가 가야를 윗사람으로 인정했다는 말인 셈이다.
“정보길드.. 우물우물.. 한 번 찾아볼까요?”
“하긴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대로는 길이 안 보이니까.”
“허름한 술집을 찾아봐야 한다는 거죠?”
가야의 질문에 바라기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딱히 크게 신경 써서 듣지 않았던 정보여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더욱 가물가물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도 알겠다는 듯 가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어? 이놈아. 네놈도 나이 먹어봐라!”
“네네, 하지만 아직 전 파릇파릇해서 잘 모르겠네요~~."
"요요...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피 말리는 즐거운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을 보면 신고하거나 잡아달라? 맞습니까요, 기사님?"
용병 길드의 아카이 공작령 지부장, 한스는 갑작스런 공작가의 의뢰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워낙 치안이 좋은 공작령이라 용병들이 할 일은 잔심부름 정도밖에 없어 일거리가 늘 부족했다. 때문에 용병들 수도 적었고 당연히 지부장의 힘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꽤 괜찮은 기회였다. 어차피 용병 길드 내에서의 입지는 미약하니 공작가와 친분을 더 쌓아두는 것이 미래를 생각하면 훨씬 이득일 것이다.
한스가 머릿속으로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까 생각하던 중 그의 앞에 쩔그렁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금화가 한가득 이다.
“영지 내 모든 용병들을 모두 고용하겠네. 반드시! 최대한 빨리 이들을 찾아야 해! 안 그러면...내 목숨이..”
어쩐지 기사의 말끝이 점점 흐려져서 확실히 들리진 않았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눈앞의 금화다. 한스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당장 용병들 싹 풀어서 수색해보겠습니다. 혹시 특징할만 한 것이 있다면 알려주시지요.”
“특징? 거기 그림에 있는 그대로라네. 남자는 외팔이 덩치 큰 남자고, 아이는 검은 머리에..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가졌지. 아...그러고보니 신기하게도 아카이 가문과 색이 비슷하군. 흠...그래서 공녀님이 끌리신 건가..”
기사의 말에 한스는 귀를 쫑긋했다. 혼잣말 식으로 마지막은 웅얼거렸지만, 평소 귀가 밝았던 한스였기에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눈치챈 척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음...또 다른 특징은 없습니까요?”
“둘 다 황야의 야만족들이라 바로 티가 날걸세. 큰 문제 없지 않겠나?”
기사의 말에 한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감췄다. 영업용 미소를 다시 장착하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하하, 기사님. 미처 모르고 계셨군요. 영지 내에 의외로 황야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예로 사는 이들도 있고 용병으로 사는 이들도 있지요. 뭐 개중에는 정탐하기 위해 들어온 첩자들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허...그..그렇소? 그건 몰랐군.. 그럼 내일까지 못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이오?!”
어쩐지 다급해지는 기사의 말에 한스가 싱긋 웃는다.
“아..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서 영지 내의 다른 길드들에게도 이야기해두겠습니다요. 귀신이 아닌 이상에야 세상 전체가 감시하는 셈인데 어찌 벗어나겠습니까. 하하하! 대신 돈이 좀 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알겠네. 공작님께서 직접 내린 명인만큼 자금은 걱정 말고 확실하게만 수행해주게!”
“헉! 공작님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호구를 잡았다며 얼마나 등골을 빼먹을까 계산을 하던 한스는 공작님이 내린 명이라는 말에 기겁했다. 재빨리 머릿속 계산을 지우고 깔끔하게 다시 셈해본다.
“아하하하..이거면 충분하겠습니다요, 기사님.”
“아, 그렇소? 혹시나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반드시 꼭 찾아야 한다오.. ”
“알겠습니다! 저만 믿고 맡겨주시지요. 대신 공작님께 제 이름 한 번만 넌지시 좀 흘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요.”
어차피 울궈먹기는 힘든 상황이라면 차라리 이름이라도 알려두는 게 남는 장사이리라. 한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기사에게 약속을 부탁했다. 기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한다.
“이 알버트 데메르탄. 약속은 지키오. 잊지 않고 전해드리지.”
찾아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못 하겠는가. 그럴 수만 있다면 알버트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신의 비상금까지도 모두 털 수 있었다.
*
끼이이익-.
꽤 심하게 녹이 슬었는지 경첩이 아픈 소리를 낸다. 비명과 함께 들어온 것은 두 사람이었다. 덩치 큰 외팔의 남자와 아직은 어린 남자아이.
두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무례하게 힐끔거렸다. 거의 모든 창문을 닫아두어 햇빛이 들어오지 못했기에 내부는 어두웠다.
군데군데 켜둔 작은 양초들이 어렴풋이 빛을 내었는데, 그 빛은 마치 방문자들을 어딘가로 유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야, 여기는 좀 어때 보이냐?”
덩치 큰 외팔의 남자, 바라기가 가야의 귀에 소곤거렸고 가야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다 들으라는 듯 어쩐지 크게 말하는 가야였다.
“아까 이렇게 미리 물었어야지. 왜 급하게 여기가 정보길드 맞느냐면서 소리치다가 술집을 두 개나 깨부수냐고... 어휴, 삼촌. 이번엔 그럼 안 돼!”
가야의 말에 건물 안의 사람들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생긋 웃으며, 열심히 술잔을 닦는 척하는 주인장에게 걸어갔다.
내부가 어둡다 보니 멀리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가보니 어째 주인장의 피부색이 제국인들과는 달랐다. 마치 황야의 사람인 것 같다.
갑작스런 상황에 가야가 당황해 하는 동안, 바라기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다가 주인장을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물었다.
“혹시 감파르...인가?”
“끄응...”
주인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앓는 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굽혔던 허리를 펴는데, 왜소해 보였던 주인장이 점점 커지더니 바라기와 비슷한 덩치가 되었다.
가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표정이다.
“하하하하하-! 여전하구만. 형님 눈썰미는 여전히 날카롭네그려. 그래, 맞소. 나 감파르요, 형님.”
“하...이 녀석 살아있었구나!!”
바라기와 감파르가 격정적으로 껴안았다. 가야는 옆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자칫하면 샌드위치가 될 뻔했다.
“이렇게 쉽게 들킬 줄은 몰랐소. 해 바라기의 이름이 역시 괜한 게 아니구랴.”
감파르의 말에 바라기는 쓴웃음을 짓는다.
“다 옛말이다. 이젠 팔 하나 없는 머저리에 불과해.”
“하하, 그런 말 해봤자 아무도 안 믿소. 아무튼 정보 길드에 온 것을 환영하오, 형님. 쌓인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저 녀석이 우리 칸의 아들이오?”
감파르의 시선이 가야를 향한다. 가야가 바라기를 보자 바라기는 부드럽게 미소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그제야 가야는 감파르에게 인사를 건넨다.
“반갑습니다. 감파르. 저는 선대 칸의 아들, 가야라고 합니다.”
감파르는 피식 웃으며 가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하하하 반갑다! 요 녀석아. 너 진짜 똥오줌 못 가릴 때 보고 처음이지? 참 많이 컸구나.”
가야의 눈이 다시 또 동그래진다.
“이럴 땐 제 아빠랑 똑같네그려. 하하하! 아...이럴 때가 아니지.”
잠깐 숨을 고른 감파르는 재차 말을 이었다.
“영지 내에 두 사람의 수배서가 붙기 시작했소. 경계도 더욱 삼엄해진 마당이고...빠져나가는 것이 어렵게 됐단 말이지..”
가야와 바라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감파르의 입을 계속 주시했다. 감파르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씩 웃더니 깜짝 놀랄 말을 던졌다.
“그러니 우리는 공작가와 거래를 합시다! 담보는 저 녀석으로 말입니다.”
감파르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가야가 어리둥절해하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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