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조회 : 184 추천 : 0 글자수 : 4,496 자 2024-07-20
바루펠은 한숨을 쉬며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집무실 탁자에만 쌓여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랴, 바닥과 천장, 허공에까지 서류 뭉치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젠장. 수락하는 게 아니었어."
켈렌을 비롯한 동료들과의 여행은 물론 즐거웠다.
마계를 다시 탐험하며 추억을 회상하는 건 오랜 업무로 지쳤던 심신을 회복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 대가가 이런 것이라니.
과거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고민했을 텐데.
"여, 황제. 바쁘냐?"
"덕분에."
바루펠은 이를 갈며 켈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여행을 제안하다니 몹쓸 친구놈이었다.
"잠깐 나와봐. 할 얘기가 있으니."
"또 속지는 않는다. 간악한 신하 같으니."
"어허. 또 그런다. 결국 재밌게 잘 놀았으면서."
바루펠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져 나오며, 공간이 찌그러졌다.
살벌한 경고에 켈렌은 한 걸음 물러나며 타협을 제안했다.
"거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정말."
얼음 분신들이 각자 서류들을 집어들고 업무를 시작하자, 그제야 바루펠은 켈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별 거 아니면 진짜 가둬버린다."
"나 결혼한다."
"...뭐?!"
바루펠은 심드렁한 반응을 준비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대신 몹시 놀라 경악하면서, 켈렌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네놈! 켈렌이 아니구나! 첩자냐, 암살자냐?!"
"하하. 그럴 만도 하지."
정신이 나갔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냉혹한데다 제멋대로에 밥이나 축내는 켈렌이 결혼이라니!
해가 북쪽에서 뜰 것만 같았다.
"말이 심한데."
"그럴 리가 없어. 켈렌이... 결혼?! 무슨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상대는 카르샤다."
"......"
바루펠은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을 느꼈다.
켈렌과는 정반대로 근면성실하며 철저하고 고고한 그녀가 왜?
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어이."
황제의 유언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바루펠이 황제가 되고도 암살 위협에서 안전한 것은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루펠은 그녀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터라, 더더욱 자신의 못난 친구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아깝다는 건 이해해. 근데 뭐, 내가 좋다는데 어떡한담?"
바루펠은 켈렌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가 돼서 대제국마도장관을 죽일 수는 없었기에 참았다.
대신 켈렌을 아공간으로 던져버리고, 카르샤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야?"
"네."
황궁의 특수호위대장이자 암살업계의 여왕은 짤막한 대답을 내놓았다.
"왜지?"
"네?"
"왜 켈렌 같은 놈이랑...?"
"좋아하니까요."
바루펠은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켈렌은 고작해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나뭇가지 정도의 가치뿐인데, 어째 보석이 겸상을 하느냔 말이다.
"야, 진짜. 말이 심하다."
아공간을 찢고 나온 켈렌이 항의했지만, 바루펠은 아예 다른 차원으로 그를 날려버렸다.
"벌써 놀라시면 안 되는데."
"무슨 뜻이지?"
"말 안했나 보네요? 둘이나 더 있다고."
"무슨... 설마. 아니라고 말해."
"유감이네요. 신부가 셋이에요. 하 참 나."
카르샤는 아직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뱉었지만, 바루펠은 더더욱이나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얼탱이가 산산조각나는 말씀인가!
켈렌 따위에게 신부가 셋이라니.
하나는 카르샤고, 하나는 애플파이, 하나는 에그타르트인가?
"카르샤, 스텔라, 빙아설파신룡이다."
"죽어라 그냥."
바루펠은 공간까지도 소멸시키는 도끼를 냅다 휘둘렀다.
차원을 도약해 돌아온 켈렌은 황급히 얼음 분신을 앞세워 희생시켰다.
"무슨 짓이냐!"
"미친 도둑놈! 제국의 범죄자 같으니!"
"우와악!"
켈렌은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바루펠을 냅다 얼려버렸다.
물론 바루펠은 자력으로 빠져나와 켈렌을 노려보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왜, 너도 외롭냐?"
"여기서 더 열받게 하지 마라."
바루펠이 으르렁거리자 켈렌은 한 수 접었다.
하긴, 두 여자와 정령왕까지 데리고 살겠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생각이긴 했다.
"대체 뭘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설명할 게 없네. 난 아무런 짓도 안 했어."
"용케도."
"황제이자 친구로서 축하는 해줘야지?"
"진짜 멀리 보내줄까?"
바루펠은 켈렌을 죽여버릴 듯 노려보다가, 항복했다는 듯 양손을 들어보였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켈렌의 등짝을 후리자 켈렌은 비명을 질렀다.
"그래, 뭐 축하해줘야지. 이 탐욕스러운 새끼야."
"감사합니다. 소박하신 황제 폐하."
바루펠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켈렌을 황궁 바깥으로 내쫓았다.
*****
"나 왔어."
켈렌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그러자 켈렌을 향해 불타는 마력이 실린 검기와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서린 얼음 조각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켈렌은 마력을 대규모로 방출해 검기를 무력화시키고, 동시에 얼음 조각을 흡수해 마력을 보충했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카르샤가 휘두른 단검을 켈렌의 목 한 뼘 거리에서 멈췄다.
"일식."
"태빙격설류泰氷激屑流."
"까마귀 죽이기."
어마어마한 위력의 공격들이 이어서 날아들었다.
스텔라의 참격이 켈렌의 왼어깨를 갈랐고, 카르샤의 검붉게 물든 단검이 켈렌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어서 빙설신룡의 얼음이 켈렌을 덮쳤다.
켈렌은 저택 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에 위화감을 느낀 두 사람과 정령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남편을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면 쓰나."
켈렌은 짐짓 화가 난 척하며 마력을 실은 손으로 아내들을 쓰다듬었다.
그 성가신 태도에 분노한 이들의 이어지는 공격을 피해, 켈렌은 서재로 숨어들었다.
역시 아내를 셋이나 두는 건 무리였나?
하지만 켈렌은 자신에게 솔직했다.
제국의 법도는 켈렌에게 죄가 없음을 입증했다.
정령계와 마계의 결혼 관습은 그보다 훨씬 관대했다.
정령계는 애초에 자유로운 영혼들의 교류를 억제하지 않고, 마계는 힘이 있다면 쟁취하는 게 당연한 세계였으니.
"후우..."
그러나 아무리 합리화를 해도 아내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윽고 스텔라가 검을 들고 서재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켈렌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는 위압적으로 말했다.
"사지를 모두 잘라버리기 전에 말해."
"...뭘?"
"대체 언제지?"
켈렌은 모두에게 사랑을 약속했지만, 정작 자신의 영역 안으로 셋을 들이고 나서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꼭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니고, 집에 와서는 마법 연구나 하고 있으니 속이 탈 수밖에.
"질투할까봐 그랬는데."
서걱-!
스텔라의 팔이 없어지는가 싶었더니, 켈렌의 오른쪽 다리가 썰렸다.
다음은 켈렌의 손목이었다.
스텔라는 검고 깊은 눈빛으로 켈렌에게 다그쳤다.
"언제야?"
"......오늘."
스텔라는 검을 거두고는 마력이 새는 켈렌의 상처를 자신의 마력으로 회복시켰다.
"다른 대답이 나왔으면 진짜..."
켈렌은 순간 팔다리가 사라지고 몸뚱이만 남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스텔라의 의념이 마력으로 변해 자신에게 흘러들어왔음을 깨달은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런 끔찍한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거의 없었다.
*****
켈렌은 몹시 피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해가 어느새 중천이었다.
얼음 분신을 쓰지 않았다면 몇 시간을 더 잤을지도 모른다.
켈렌은 애써 기억을 억누르고, 식사를 하러 나섰다.
세 아내의 요리 대결이 또 주방에서 펼쳐지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윽고 투박한 모양의 팬케이크와 고기를 동그랗게 빚은 완자, 각얼음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각자 먹을 것에 켈렌의 몫을 조금 더한 소량.
게다가 저택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하다 못해 조촐한 메뉴.
하지만 켈렌은 맛있게 요리들을 즐겼다.
내색은 하지 않았다.
켈렌은 마음을 가둬두고 있었다.
얼어붙은 심장처럼 감정을 숨기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도무지 움직여야 할 때를 몰랐다.
움직이려 할 때도 굳은 채로 어색할 뿐이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으려나."
켈렌은 침대에 누워서 중얼거렸다.
스텔라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카르샤는 그러거나 말거나 켈렌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프리나는 작은 얼음 토끼가 되어 켈렌의 가슴팍 위에 엎드려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이 채워진 것을 느낀 켈렌은 세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감각을 겨우내 깨달은 것이다.
켈렌은 미소를 지으며 달콤한 꿈속으로 사라졌다.
집무실 탁자에만 쌓여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랴, 바닥과 천장, 허공에까지 서류 뭉치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젠장. 수락하는 게 아니었어."
켈렌을 비롯한 동료들과의 여행은 물론 즐거웠다.
마계를 다시 탐험하며 추억을 회상하는 건 오랜 업무로 지쳤던 심신을 회복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 대가가 이런 것이라니.
과거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고민했을 텐데.
"여, 황제. 바쁘냐?"
"덕분에."
바루펠은 이를 갈며 켈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여행을 제안하다니 몹쓸 친구놈이었다.
"잠깐 나와봐. 할 얘기가 있으니."
"또 속지는 않는다. 간악한 신하 같으니."
"어허. 또 그런다. 결국 재밌게 잘 놀았으면서."
바루펠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져 나오며, 공간이 찌그러졌다.
살벌한 경고에 켈렌은 한 걸음 물러나며 타협을 제안했다.
"거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정말."
얼음 분신들이 각자 서류들을 집어들고 업무를 시작하자, 그제야 바루펠은 켈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별 거 아니면 진짜 가둬버린다."
"나 결혼한다."
"...뭐?!"
바루펠은 심드렁한 반응을 준비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대신 몹시 놀라 경악하면서, 켈렌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네놈! 켈렌이 아니구나! 첩자냐, 암살자냐?!"
"하하. 그럴 만도 하지."
정신이 나갔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냉혹한데다 제멋대로에 밥이나 축내는 켈렌이 결혼이라니!
해가 북쪽에서 뜰 것만 같았다.
"말이 심한데."
"그럴 리가 없어. 켈렌이... 결혼?! 무슨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상대는 카르샤다."
"......"
바루펠은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을 느꼈다.
켈렌과는 정반대로 근면성실하며 철저하고 고고한 그녀가 왜?
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어이."
황제의 유언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바루펠이 황제가 되고도 암살 위협에서 안전한 것은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루펠은 그녀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터라, 더더욱 자신의 못난 친구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아깝다는 건 이해해. 근데 뭐, 내가 좋다는데 어떡한담?"
바루펠은 켈렌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가 돼서 대제국마도장관을 죽일 수는 없었기에 참았다.
대신 켈렌을 아공간으로 던져버리고, 카르샤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야?"
"네."
황궁의 특수호위대장이자 암살업계의 여왕은 짤막한 대답을 내놓았다.
"왜지?"
"네?"
"왜 켈렌 같은 놈이랑...?"
"좋아하니까요."
바루펠은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켈렌은 고작해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나뭇가지 정도의 가치뿐인데, 어째 보석이 겸상을 하느냔 말이다.
"야, 진짜. 말이 심하다."
아공간을 찢고 나온 켈렌이 항의했지만, 바루펠은 아예 다른 차원으로 그를 날려버렸다.
"벌써 놀라시면 안 되는데."
"무슨 뜻이지?"
"말 안했나 보네요? 둘이나 더 있다고."
"무슨... 설마. 아니라고 말해."
"유감이네요. 신부가 셋이에요. 하 참 나."
카르샤는 아직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뱉었지만, 바루펠은 더더욱이나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얼탱이가 산산조각나는 말씀인가!
켈렌 따위에게 신부가 셋이라니.
하나는 카르샤고, 하나는 애플파이, 하나는 에그타르트인가?
"카르샤, 스텔라, 빙아설파신룡이다."
"죽어라 그냥."
바루펠은 공간까지도 소멸시키는 도끼를 냅다 휘둘렀다.
차원을 도약해 돌아온 켈렌은 황급히 얼음 분신을 앞세워 희생시켰다.
"무슨 짓이냐!"
"미친 도둑놈! 제국의 범죄자 같으니!"
"우와악!"
켈렌은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바루펠을 냅다 얼려버렸다.
물론 바루펠은 자력으로 빠져나와 켈렌을 노려보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왜, 너도 외롭냐?"
"여기서 더 열받게 하지 마라."
바루펠이 으르렁거리자 켈렌은 한 수 접었다.
하긴, 두 여자와 정령왕까지 데리고 살겠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생각이긴 했다.
"대체 뭘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설명할 게 없네. 난 아무런 짓도 안 했어."
"용케도."
"황제이자 친구로서 축하는 해줘야지?"
"진짜 멀리 보내줄까?"
바루펠은 켈렌을 죽여버릴 듯 노려보다가, 항복했다는 듯 양손을 들어보였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켈렌의 등짝을 후리자 켈렌은 비명을 질렀다.
"그래, 뭐 축하해줘야지. 이 탐욕스러운 새끼야."
"감사합니다. 소박하신 황제 폐하."
바루펠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켈렌을 황궁 바깥으로 내쫓았다.
*****
"나 왔어."
켈렌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그러자 켈렌을 향해 불타는 마력이 실린 검기와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서린 얼음 조각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켈렌은 마력을 대규모로 방출해 검기를 무력화시키고, 동시에 얼음 조각을 흡수해 마력을 보충했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카르샤가 휘두른 단검을 켈렌의 목 한 뼘 거리에서 멈췄다.
"일식."
"태빙격설류泰氷激屑流."
"까마귀 죽이기."
어마어마한 위력의 공격들이 이어서 날아들었다.
스텔라의 참격이 켈렌의 왼어깨를 갈랐고, 카르샤의 검붉게 물든 단검이 켈렌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어서 빙설신룡의 얼음이 켈렌을 덮쳤다.
켈렌은 저택 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에 위화감을 느낀 두 사람과 정령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남편을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면 쓰나."
켈렌은 짐짓 화가 난 척하며 마력을 실은 손으로 아내들을 쓰다듬었다.
그 성가신 태도에 분노한 이들의 이어지는 공격을 피해, 켈렌은 서재로 숨어들었다.
역시 아내를 셋이나 두는 건 무리였나?
하지만 켈렌은 자신에게 솔직했다.
제국의 법도는 켈렌에게 죄가 없음을 입증했다.
정령계와 마계의 결혼 관습은 그보다 훨씬 관대했다.
정령계는 애초에 자유로운 영혼들의 교류를 억제하지 않고, 마계는 힘이 있다면 쟁취하는 게 당연한 세계였으니.
"후우..."
그러나 아무리 합리화를 해도 아내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윽고 스텔라가 검을 들고 서재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켈렌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는 위압적으로 말했다.
"사지를 모두 잘라버리기 전에 말해."
"...뭘?"
"대체 언제지?"
켈렌은 모두에게 사랑을 약속했지만, 정작 자신의 영역 안으로 셋을 들이고 나서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꼭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니고, 집에 와서는 마법 연구나 하고 있으니 속이 탈 수밖에.
"질투할까봐 그랬는데."
서걱-!
스텔라의 팔이 없어지는가 싶었더니, 켈렌의 오른쪽 다리가 썰렸다.
다음은 켈렌의 손목이었다.
스텔라는 검고 깊은 눈빛으로 켈렌에게 다그쳤다.
"언제야?"
"......오늘."
스텔라는 검을 거두고는 마력이 새는 켈렌의 상처를 자신의 마력으로 회복시켰다.
"다른 대답이 나왔으면 진짜..."
켈렌은 순간 팔다리가 사라지고 몸뚱이만 남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스텔라의 의념이 마력으로 변해 자신에게 흘러들어왔음을 깨달은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런 끔찍한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거의 없었다.
*****
켈렌은 몹시 피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해가 어느새 중천이었다.
얼음 분신을 쓰지 않았다면 몇 시간을 더 잤을지도 모른다.
켈렌은 애써 기억을 억누르고, 식사를 하러 나섰다.
세 아내의 요리 대결이 또 주방에서 펼쳐지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윽고 투박한 모양의 팬케이크와 고기를 동그랗게 빚은 완자, 각얼음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각자 먹을 것에 켈렌의 몫을 조금 더한 소량.
게다가 저택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하다 못해 조촐한 메뉴.
하지만 켈렌은 맛있게 요리들을 즐겼다.
내색은 하지 않았다.
켈렌은 마음을 가둬두고 있었다.
얼어붙은 심장처럼 감정을 숨기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도무지 움직여야 할 때를 몰랐다.
움직이려 할 때도 굳은 채로 어색할 뿐이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으려나."
켈렌은 침대에 누워서 중얼거렸다.
스텔라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카르샤는 그러거나 말거나 켈렌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프리나는 작은 얼음 토끼가 되어 켈렌의 가슴팍 위에 엎드려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이 채워진 것을 느낀 켈렌은 세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감각을 겨우내 깨달은 것이다.
켈렌은 미소를 지으며 달콤한 꿈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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