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의 방문
조회 : 243 추천 : 0 글자수 : 4,462 자 2024-07-21
켈렌은 눈을 떴다.
그는 암흑 속에 있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나.
당황하지 않고, 켈렌은 얼음 등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너무나도 미약한 불빛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켈렌은 얼음 등불을 포기하고 마력을 넓게 방사했다.
하지만 공간은 넓었고, 그의 마력이 먼저 한계를 맞이했다.
켈렌은 오랜만에 마력의 한계를 느껴서인지 신선한 기분으로 걸었다.
"허."
켈렌의 목소리는 소리로 전달되지 않았다.
텔레파시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올 뿐이었다.
"신기하군."
켈렌은 앞으로(방향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걸어가며, 뒤로는 얼음 조각들을 뿌렸다.
녹거나 부서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같은 곳을 빙빙 도는 일은 없을 터였다.
"꿈인가?"
그러나 지나치게 생생해서 현실 이상의 현실로 느껴지는 기분에, 켈렌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공간과, 이 공간에 존재하는 자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생각하며, 켈렌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얼음 분신과 놀기도 하고, 얼음 정령을 만들어내거나, 아예 저택을 통째로 창조하는 것까지도 시도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성에 찰 리는 없었고, 켈렌은 이곳에서 빠져나가길 원했다.
켈렌은 마력 회로에 부하를 더해 일부러 고장을 넀다.
오로지 마력심장이 마력을 흘리는 것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자, 켈렌은 숨을 헐떡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것.
켈렌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그저 숨을 쉬기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후."
켈렌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심장을 멈췄다.
그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얼음심장인 만큼 통제는 능숙하게 가능했다.
켈렌은 죽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짜증과 공포가 섞인 비명에 그의 곁에서 얕은 잠에 빠진 소녀와 숙녀와 정령이 놀라서 일어났다.
"헉, 허억."
깊고 어두운 물속에 가라앉아 그 모든 압력을 받아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채, 켈렌은 저택 주위로 마력을 방사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마력은 뿜어내는 족족 흩어지거나 옅어지며 사라졌다.
"언제 이게 풀린 거지?"
켈렌은 자신이 느낀 것을 설명하며 아내들에게 물었지만, 그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이변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켈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넘길 사건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자고 있는 켈렌을 찌르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과민반응이야."
"우리가 있는데 그런 걱정을 한다고?"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아내들의 다정한 질타에 켈렌은 안심했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현상 자체도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택 근처에 뿌려놓은 마력이 순간 사라져 있었다.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자연적으로 흩어졌거나, 자신이 직접 치웠거나, 누군가 없앴거나.
자연적으로 흩어졌을 리는 없다.
그만한 양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흩어지려면 수십 년은 족히 걸릴 테니.
자신이 직접 치운 기억도 없다.
꿈에 취한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흡수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아내들 중 누군가라도 그것을 느꼈을 터.
결국 세 가지 경우 중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개입이었다.
켈렌은 어느 고서에서 봤던 문장을 떠올렸다.
'불가능한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남은 것은 반드시 진실이다.'
켈렌은 다시 한 번 마력을 방사했고, 그와 동시에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얼음으로 분신과 새들과 개, 눈이 되어줄 많은 것들을 만들어 저택 밖으로 나가게 했다.
그리고 켈렌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먹구름이었다.
아니, 마력 덩어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맑고 청명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컴컴하고 언제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했다.
켈렌이 그런 기분을 느끼자마자, 하늘에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번개가 치고, 강풍이 불어닥쳤다.
그리고 켈렌은 그 먹구름 속에서, 거대한 용의 윤곽을 보았다.
비바람은 점점 강해져 폭풍우가 되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켈렌은 어느 순간 이질감을 느꼈다.
바로 코앞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켈렌은 엎드렸다.
자신의 마력을 흔적도 없이 치워버리고, 이 정도의 자연 현상을 아무렇지 않게 불러오고, 그러면서도 켈렌을 압도하는 존재.
공간을 다루는 바루펠도, 그 강했던 마왕조차도 이런 것은 불가능했다.
가장 강력한 신의 힘을 다루는 천사들 또한 그럴 것이었다.
신계를 제외한 모든 계界를 통틀어 이런 힘을 가진 존재는 단 하나였다.
"여제를 뵙습니다."
켈렌이 납작 엎드려 말을 꺼낸 순간, 비가 멈췄다.
정확히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빗방울이 허공에 정지했다.
만해태와룡滿海泰渦龍, 물의 정령왕은 기쁨도, 분노도 표출하지 않은 채 켈렌에게 침묵으로 답했다.
켈렌은 자신의 마력을 안쪽 깊숙이 숨기고는, 저택 안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여제가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비바람은 다시 강하게 몰아쳤다.
"엄마! 웬일이야?"
"조용."
여제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딸을 작은 종달새로 변신시키고는 새장에 가두어버렸다.
안 그래도 만해태와룡滿海泰渦龍의 위압감에 입을 꾹 닫은 상태였던 스텔라와 카르샤는 그 모습을 보곤 조심스럽게 여제의 시야 밖으로 움직였다.
초월적인 존재이니만큼 감정을 숨기고 있기에 다행이지, 까딱 그녀를 거슬렀다간 뒷일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응접실로."
여제는 차분하면서도 고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켈렌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안내했다.
여제는 응접실에 앉아, 켈렌에게 홍차 한 잔을 요구했다.
켈렌은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직접 대접했다.
차를 한 모금 넘기고, 여제는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는지 옅은 미소를 띄었다.
"잘 지냈나요?"
"예, 덕분에 평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있나요?"
"...짐작하고 있습니다."
여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응접실에 물로 이루어진 벽이 올라와 소음과 시야를 차단했다.
스며든 마력에는 조금의 살기도 없었지만, 켈렌은 목숨이 놓인 위기임을 직감했다.
"내 딸은 잘 지내나요?"
"...예.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령과 인간의 결혼이라."
"......"
"그것도 아내가 둘이나 더 있고요."
"...예."
켈렌은 밀려오는 압박감에 몸을 움츠렸다.
죄책감은 없었다. 애초에 잘못이 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정령왕에게 그딴 식으로 변명했다간 산산조각나서 죽어버릴 터였다.
"탐욕은 인간의 오랜 대죄 중 하나였죠."
"...사죄드립니다. 빙설신룡께서 떠나고 싶으시다면..."
"아니, 죄를 따지려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항상 그런 거죠."
여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죠."
여제는 자신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켈렌은 더 이상 여제가 뭘 위해 왔는지 짐작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쓸데없는 말이 많았군요."
"아닙니다. 경각심을 일깨워주시어 감사드리는 마음뿐입니다."
"거짓말은 좋지 않아요."
여제가 소리 내어 웃자, 그제야 켈렌의 표정도 한결 풀렸다.
그녀는 단지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켈렌을 다독였다.
폭풍우를 물리치고 켈렌의 저택을 뒤덮은 마력을 걷어낸 여제는 켈렌에게 사과했다.
위엄과 격에 걸맞는 등장을 보여주려던 게, 과한 압박감을 선사했다는 점에서였다.
"오랜만에 초월경의 존재를 마주하니 오히려 제 수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그만. 격식은 가볍게 차리라고 했었을 텐데요."
"...알겠습니다."
"결혼식은 언제죠?"
뜻밖의 질문에 켈렌은 당황했다.
식을 올리긴 하겠지만, 느긋이 할 생각이었던 터라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좋네요. 슬슬 준비할 때겠어요."
"...맞습니다."
졸지에 결혼식 준비를 시작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켈렌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켈렌의 아군이 나타났다.
"엄마! 벌써부터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그래!"
"조용!"
만해태와룡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휘둘렀으나, 빙아설파신룡은 저항했다.
마법이 깨진 것을 깨닫자 여제의 얼굴이 약간 흔들렸다.
"간섭하지 마!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건방진 딸내미 같으니."
여제는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용으로 변했다.
저택의 한쪽 벽이 무너지면서 어느새 맑게 걷힌 하늘이 보였다.
빙설신룡, 프리나는 빼액 소리를 쳤지만 여제는 자애롭게 웃으면서 아츠라카로 돌아갔다.
켈렌은 그녀가 부수고 나간 저택을 복구하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이젠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걸맞는 행사가 곧 시작될 터였다.
그는 암흑 속에 있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나.
당황하지 않고, 켈렌은 얼음 등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너무나도 미약한 불빛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켈렌은 얼음 등불을 포기하고 마력을 넓게 방사했다.
하지만 공간은 넓었고, 그의 마력이 먼저 한계를 맞이했다.
켈렌은 오랜만에 마력의 한계를 느껴서인지 신선한 기분으로 걸었다.
"허."
켈렌의 목소리는 소리로 전달되지 않았다.
텔레파시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올 뿐이었다.
"신기하군."
켈렌은 앞으로(방향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걸어가며, 뒤로는 얼음 조각들을 뿌렸다.
녹거나 부서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같은 곳을 빙빙 도는 일은 없을 터였다.
"꿈인가?"
그러나 지나치게 생생해서 현실 이상의 현실로 느껴지는 기분에, 켈렌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공간과, 이 공간에 존재하는 자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생각하며, 켈렌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얼음 분신과 놀기도 하고, 얼음 정령을 만들어내거나, 아예 저택을 통째로 창조하는 것까지도 시도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성에 찰 리는 없었고, 켈렌은 이곳에서 빠져나가길 원했다.
켈렌은 마력 회로에 부하를 더해 일부러 고장을 넀다.
오로지 마력심장이 마력을 흘리는 것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자, 켈렌은 숨을 헐떡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것.
켈렌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그저 숨을 쉬기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후."
켈렌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심장을 멈췄다.
그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얼음심장인 만큼 통제는 능숙하게 가능했다.
켈렌은 죽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짜증과 공포가 섞인 비명에 그의 곁에서 얕은 잠에 빠진 소녀와 숙녀와 정령이 놀라서 일어났다.
"헉, 허억."
깊고 어두운 물속에 가라앉아 그 모든 압력을 받아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채, 켈렌은 저택 주위로 마력을 방사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마력은 뿜어내는 족족 흩어지거나 옅어지며 사라졌다.
"언제 이게 풀린 거지?"
켈렌은 자신이 느낀 것을 설명하며 아내들에게 물었지만, 그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이변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켈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넘길 사건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자고 있는 켈렌을 찌르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과민반응이야."
"우리가 있는데 그런 걱정을 한다고?"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아내들의 다정한 질타에 켈렌은 안심했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현상 자체도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택 근처에 뿌려놓은 마력이 순간 사라져 있었다.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자연적으로 흩어졌거나, 자신이 직접 치웠거나, 누군가 없앴거나.
자연적으로 흩어졌을 리는 없다.
그만한 양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흩어지려면 수십 년은 족히 걸릴 테니.
자신이 직접 치운 기억도 없다.
꿈에 취한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흡수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아내들 중 누군가라도 그것을 느꼈을 터.
결국 세 가지 경우 중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개입이었다.
켈렌은 어느 고서에서 봤던 문장을 떠올렸다.
'불가능한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남은 것은 반드시 진실이다.'
켈렌은 다시 한 번 마력을 방사했고, 그와 동시에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얼음으로 분신과 새들과 개, 눈이 되어줄 많은 것들을 만들어 저택 밖으로 나가게 했다.
그리고 켈렌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먹구름이었다.
아니, 마력 덩어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맑고 청명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컴컴하고 언제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했다.
켈렌이 그런 기분을 느끼자마자, 하늘에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번개가 치고, 강풍이 불어닥쳤다.
그리고 켈렌은 그 먹구름 속에서, 거대한 용의 윤곽을 보았다.
비바람은 점점 강해져 폭풍우가 되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켈렌은 어느 순간 이질감을 느꼈다.
바로 코앞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켈렌은 엎드렸다.
자신의 마력을 흔적도 없이 치워버리고, 이 정도의 자연 현상을 아무렇지 않게 불러오고, 그러면서도 켈렌을 압도하는 존재.
공간을 다루는 바루펠도, 그 강했던 마왕조차도 이런 것은 불가능했다.
가장 강력한 신의 힘을 다루는 천사들 또한 그럴 것이었다.
신계를 제외한 모든 계界를 통틀어 이런 힘을 가진 존재는 단 하나였다.
"여제를 뵙습니다."
켈렌이 납작 엎드려 말을 꺼낸 순간, 비가 멈췄다.
정확히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빗방울이 허공에 정지했다.
만해태와룡滿海泰渦龍, 물의 정령왕은 기쁨도, 분노도 표출하지 않은 채 켈렌에게 침묵으로 답했다.
켈렌은 자신의 마력을 안쪽 깊숙이 숨기고는, 저택 안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여제가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비바람은 다시 강하게 몰아쳤다.
"엄마! 웬일이야?"
"조용."
여제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딸을 작은 종달새로 변신시키고는 새장에 가두어버렸다.
안 그래도 만해태와룡滿海泰渦龍의 위압감에 입을 꾹 닫은 상태였던 스텔라와 카르샤는 그 모습을 보곤 조심스럽게 여제의 시야 밖으로 움직였다.
초월적인 존재이니만큼 감정을 숨기고 있기에 다행이지, 까딱 그녀를 거슬렀다간 뒷일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응접실로."
여제는 차분하면서도 고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켈렌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안내했다.
여제는 응접실에 앉아, 켈렌에게 홍차 한 잔을 요구했다.
켈렌은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직접 대접했다.
차를 한 모금 넘기고, 여제는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는지 옅은 미소를 띄었다.
"잘 지냈나요?"
"예, 덕분에 평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있나요?"
"...짐작하고 있습니다."
여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응접실에 물로 이루어진 벽이 올라와 소음과 시야를 차단했다.
스며든 마력에는 조금의 살기도 없었지만, 켈렌은 목숨이 놓인 위기임을 직감했다.
"내 딸은 잘 지내나요?"
"...예.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령과 인간의 결혼이라."
"......"
"그것도 아내가 둘이나 더 있고요."
"...예."
켈렌은 밀려오는 압박감에 몸을 움츠렸다.
죄책감은 없었다. 애초에 잘못이 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정령왕에게 그딴 식으로 변명했다간 산산조각나서 죽어버릴 터였다.
"탐욕은 인간의 오랜 대죄 중 하나였죠."
"...사죄드립니다. 빙설신룡께서 떠나고 싶으시다면..."
"아니, 죄를 따지려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항상 그런 거죠."
여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죠."
여제는 자신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켈렌은 더 이상 여제가 뭘 위해 왔는지 짐작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쓸데없는 말이 많았군요."
"아닙니다. 경각심을 일깨워주시어 감사드리는 마음뿐입니다."
"거짓말은 좋지 않아요."
여제가 소리 내어 웃자, 그제야 켈렌의 표정도 한결 풀렸다.
그녀는 단지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켈렌을 다독였다.
폭풍우를 물리치고 켈렌의 저택을 뒤덮은 마력을 걷어낸 여제는 켈렌에게 사과했다.
위엄과 격에 걸맞는 등장을 보여주려던 게, 과한 압박감을 선사했다는 점에서였다.
"오랜만에 초월경의 존재를 마주하니 오히려 제 수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그만. 격식은 가볍게 차리라고 했었을 텐데요."
"...알겠습니다."
"결혼식은 언제죠?"
뜻밖의 질문에 켈렌은 당황했다.
식을 올리긴 하겠지만, 느긋이 할 생각이었던 터라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좋네요. 슬슬 준비할 때겠어요."
"...맞습니다."
졸지에 결혼식 준비를 시작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켈렌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켈렌의 아군이 나타났다.
"엄마! 벌써부터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그래!"
"조용!"
만해태와룡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휘둘렀으나, 빙아설파신룡은 저항했다.
마법이 깨진 것을 깨닫자 여제의 얼굴이 약간 흔들렸다.
"간섭하지 마!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건방진 딸내미 같으니."
여제는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용으로 변했다.
저택의 한쪽 벽이 무너지면서 어느새 맑게 걷힌 하늘이 보였다.
빙설신룡, 프리나는 빼액 소리를 쳤지만 여제는 자애롭게 웃으면서 아츠라카로 돌아갔다.
켈렌은 그녀가 부수고 나간 저택을 복구하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이젠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걸맞는 행사가 곧 시작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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